모처럼의 한가한 오후였다.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엄쉬엄해도 될 정도다. 덕분에 그동안 미뤄왔던 취미생활(독서)을 재개하려고 모처럼 마음먹었다. 조용한 공기, 허공을 맴도는 달콤한 차의 향기, 적당히 밝은 램프의 불빛. 그야말로 완벽한 오후였을 터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새근새근 조용한 숨소리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사라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회상했다. 라고 말해도 시작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하면 언제나와 같은 시각. 몸은 피곤을 호소하지만 이미 버릇이 붙어있는 신체는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으로 나아갔다...
복도를 걷던 도중, 눈치채면 시야 끝에 바다색이 있었다. 카논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참으로 심드렁한 얼굴이다. 사라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 했다. 그때, 놀란 것처럼 카논의 안색이 휙 뒤바뀐다. 어째서?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찰나, 세계가 흔들렸다. “사라!!” 카논의 노성이 들린다.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다. 반대로 사라는 태평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카논이 제대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 듣는 것 같네. 어째서인지 천장이 보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게 옳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겨우 망막에 상이 제대로 맺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사라는 반쯤 카논에게 안겨 있었다. 머리 위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
손등 위로 햇빛이 떨어졌다. 공기가 가라앉아 있다. 고요한 숨소리,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멀리 떨어져 띄엄띄엄한 목소리. 이 외에 다른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정적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세계처럼. 반쯤은 타성으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사가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오늘 서류 처리 당번은 아이오로스와 아이오리아 두 사람이다. 얼핏 보면 쌍둥이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똑 닮은 형제지만 태도는 매우 달랐다. 이런 서류 처리엔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한때 교황 후보로 이름을 올린 전적이 있는 만큼 아이오로스는 별 무리 없이 업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반면, 정말로 서류 처리에 재능이 없는 아이오리아는 혼과 육체가 거의 분리된 모습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다. 저 서류는 분명 못 쓰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