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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걷던 도중, 눈치채면 시야 끝에 바다색이 있었다. 카논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참으로 심드렁한 얼굴이다. 사라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 했다. 그때, 놀란 것처럼 카논의 안색이 휙 뒤바뀐다. 어째서?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찰나, 세계가 흔들렸다.
“사라!!”
카논의 노성이 들린다.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다. 반대로 사라는 태평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카논이 제대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 듣는 것 같네. 어째서인지 천장이 보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게 옳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겨우 망막에 상이 제대로 맺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사라는 반쯤 카논에게 안겨 있었다. 머리 위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카논?”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화가 난 것처럼 사나운 얼굴이 보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으르렁거린다.
“너, 열이 심하잖아.”
“……네?”
열?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사라는 의아해하며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당연히 손바닥 아래에선 미지근한 감촉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체온이 낮은 듯하다.
다시금 혀를 찬 카논이 손을 뻗어왔다. 투박한 손끝에 닿아 사라는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의 온기가 지독히도 시리다. 그럴 리 없는데도 차가운 바람에 피부가 에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라는 한참 후에야 그 이유가 카논의 체온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체온이 너무 높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몸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현기증 때문이 아니다.
알아차렸을 때, 사라는 이미 카논의 어깨 위에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뭐지, 이 기시감. 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아, 전에 사가가 폭주했을 때구나. 그때도 내 의지완 상관없이 억지로 끌려갔는데.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카논이 말한 대로 열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논?”
사라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카논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대로 척척 걸어나갔다. 하여튼 샤카 못지않게 제멋대로인 남자다. 순간이지만 사라는 카논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치미는 걸 느꼈다. 후환이 두려워서 금방 포기하긴 했어도.
“……어딜 가는지 정도는 얘기해 주세요.”
짜증을 억누르고 다시 묻자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상황에서 어디겠냐. 의무실이지.”
“……어린애도 아니고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 굳이 수고스럽게 옮겨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퍽이나. 또 아까처럼 쓰러져서 성역을 뒤집어 놓으려고?”
빈정거리는 말에 사라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아까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별 이상을 못 느꼈으니 아무리 지금 몸 상태가 괜찮게 느껴진들 정말로 괜찮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조금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다가 중간에 쓰러져서 기어갈 확률이 99.9%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지.
허나 아무리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것은 잘 알고 있다. 세인트의 종특이기라도 한 건지 카논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한 고집 하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결국 사라는 ‘포기하면 편해.’라는 옛 격언─그리고 현재는 사가의 좌우명이 되어버린─을 떠올리며 카논의 어깨 위에 축 늘어졌다. 열이 있다는 걸 자각해서 그런지 몸도 점점 아파져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음, 그래도 머리카락 정도는 잡아당겨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허튼짓하면 떨어트린다.”
“……안 하면 되잖아요.”
사라는 얌전히 모든 걸 포기했다.
의무실에 있던 의사는 사라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단번에 진단을 내렸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감기몸살이군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라는 손쉽게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하면 9할 이상은 대충 맞아떨어지지 않던가. 여기에 운동 부족을 더하면 완벽한 3대장이 되고.
하지만 건강하다 못해 힘이 넘쳐 주변 시설을 부수고 다니는 세인트 중 하나인 카논에게는─물론 실제로 건물을 부수는 횟수는 아이오리아가 압도적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던 것 같다. 기분 탓인지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에 한심함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았다.
“뭐야, 얼마나 심각한가 했더니 고작 감기냐?”
“……감기를 무시하지 마세요. 제대로 된 치료 약도 없는 불치병이라고요.”
“그래 봤자 감기지. 세인트 주제에 근성이 없네.”
“무조건 근성론을 들먹이는 것도 그만둬 주세요. 그리고 저는 세인트가 아닌데요.”
어째서 이 남자들은 갈수록 착각이 심해지는 건지. 사라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따박따박 반박했다. 지금 머리가 아픈 건 필시 열 때문이 아니라 카논 때문일 거다. 에라이, 망해라.
속으로 저주를 퍼붓는 것도 상관없이 카논이 코웃음을 쳤다. 사소한 원망 따윈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더한 폭언을 내뱉기도 했다.
“게다가 과로는 그렇다 치고 스트레스는 뭐야. 너도 스트레스를 받나 보지?”
“……그 말은 좀 상처인데요. 이래 봬도 저 꽤 섬세한데.”
“네가?”
“………….”
카논이 상당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쳐다봐 사라는 침묵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방금 그건 좀 망발이긴 했다. 섬세하긴 개뿔, 둔해도 너무 둔하기로 유명한 자신이 아니었던가. 카논에게 피력할 정도로 섬세했다면 이미 쓰러져도 골백번은 더 쓰러지고 남았다. 음, 그렇게 생각하면 둔해서 참 다행이네.
여기서 더 따지고 들어봤자 자신만 쓰러지겠다고 판단한 사라는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볼이 달아올랐다. 아니, 이 수준 낮은 말싸움을 보고 그렇게 흐뭇한 얼굴을 하지 말아주세요. 뭔진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요.
다행히 의사는 카논보다는 훨씬 배려 깊은 성격이었다. 사근사근 중재가 들어온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카논 님. 말씀대로 사라 님은 평범한 일반인이니까 감기에 걸리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박할 말이 없던 것인지, 의사랑은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지 귀찮았던 것인지 카논은 그저 어깨만 으쓱이고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 틈을 타 의사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부드럽게 웃는다.
“어쨌든 사라 님은 며칠 동안 입원해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자신보다 먼저 입원해야 할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사라는 그걸 무시하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사가. 나라도 살아야겠어요. 당신이라면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해 주시겠죠.
물론 사가가 실제로 이 말을 들었다면 절대 이해 못 한다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겠으나 사라는 그 사실을 모른 척 넘겨버렸다. 애당초 자신은 합법적으로 땡땡이를 칠 구실이 생겼는데 그를 무시하고 일할 만큼 근면 성실한 성격이 아니다. 예전처럼 하루 안 나간다고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심지어 의사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라 님의 안정을 위해서 알데바란 님과 동생분들을 제외하곤 전부 면회 금지입니다.”
“뭐? 나까지?!”
카논이 팍 인상을 구겼다. 원래 체격과 박력이 있는 만큼 그 기세가 무섭다. 하지만 의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말 자신이 사라 님께 스트레스를 하나도 안 준다고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
의무실 내 최대 권력자의 횡포에 이번엔 카논이 침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찔리는 게 있나 보다. 그 모습을 조마조마 보고 있던 사라는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아싸.”
의사와 카논의 시선을 받고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뺨 위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양심상 차마 마주 볼 수 없던 사라는 카논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말을 내뱉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니, 그, 뭐라고 해야 할지, 카논이 싫은 건 아닌데 저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달까…….”
“……변명하지 마라.”
“……네.”
여기서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어쨌든 사라는 건강과 맞바꿔 한때의 자유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하하! 과연, 그래서 카논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던 건가.”
“……너무 웃지 말아주세요, 알데바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사라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가 화끈거린다.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요단강 건너 아멘이다. 이게 바로 수치사인가. 신이시여, 왜 인간에겐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없는 건가요.
슬쩍 눈치를 살피자 알데바란이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매우 간신히. 그 모습에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나니. 그러니 실컷 웃으세요. 저는 열심히 버티겠나이다. 중얼중얼하자 다시 알데바란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라는 나 몰라라 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라가 카논에게 업혀 의무실에 온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즉, 입원한 것도 벌써 3일째란 소리다. 덕분에 사라는 진심으로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원래 증상 자체가 심하지 않았던 만큼 열은 벌써 내렸다. 하지만 의무실 쪽에서는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좀처럼 퇴원을 허가해 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견은 없었다. 병원에서 의사가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사라도 처음에는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빈둥거려주겠다고 맘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3일째가 되니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그동안 일이 얼마나 쌓였는지 근심이 드는 건 둘째 치고, 사가가 그동안 죽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 것도 둘째 치고, 딱 잘라 말해 심심해 미칠 것 같았던 것이다. 과로에 익숙해진 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라가 반쯤 진심으로 탈출 계획을 세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찾아온 것이 알데바란이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없었던 사라는 반갑게 알데바란을 맞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는 게 전말이다. 하지만 역시 이 얘기는 하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면회가 가능한 사람이 알데바란밖에 없다지만.
‘……그러고 보니.’
면회가 가능한 사람이 알데바란뿐이란 소리는 다른 사람들 얼굴을 못 본 지도 벌써 3일이 됐다는 말이다.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라는 알데바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있나요?”
사실 이걸 제일 먼저 물었어야 했다. 그리고 일이 얼마나 쌓였는지, 사가는 아직까지 살아있는지도. 나도 참. 어지간히 정신을 놓고 있었구나. 이러니 가끔 카논에게 한소리 듣고, 므우랑 아이오로스에게 은근한 눈치를 받아도 할 말이 없지.
“음, 다들 잘 지내고 있지.”
알데바란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과 말에 뭔가 잔뜩 감추어져 있었기에 사라는 의구심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알데바란은 재촉하기도 전에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서류도 그리 쌓이지 않았고 사가도 아직 멀쩡해.”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요?”
신도 아니고 미력한 인간들이 그만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없다. 희망과 기적의 대명사인 세이야가 있다면 혹시 또 모르지만 지금 세이야들은 기말고사 때문에 전부 일본에 가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머리 위로 잔뜩 퀘스천 마크를 띄우자 알데바란이 손을 내저었다. 거대한 체구에서 숨길 수 없는 유쾌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아니, 아니. 사실은 시온 님께서 직접 감독하고 계시거든.”
“……시온이요?”
“그래. 뭐, 그게 아니더라도 다들 여러 가지로 반성하고 있는 모양이고.”
“………….”
어쩐지 지나치게 조용하다 했더니. 여신과 교황이라면 모를까 고작 의사의 경고가 골드 세인트를 막을 수 없는 법인데. 최소한 몰래(혹은 당당하게) 들어오려다 쫓겨나는 정도의 소란은 있었어야 했다. 특히 이상한데서 폭주하고 하는 A모 씨라든가, 사수좌의 모 씨라든가, 사자좌의 형인 모 씨라든가.
모든 전말을 알아채고 사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웃음이었다.
“그래서 알데바란이 직접 온 거군요.”
추정컨대 사주자使嗾者는 분명 므우일 것이다. 닥치고 돌진하는 사수, 사자 형제에 비해 목양좌의 골드 세인트는 뒤에서 움직이는 것에도 능했으니까. 카논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으니까 후보에서 제외고 다른 사람은 굳이 그럴 정도로 자신을 걱정하진 않을 테니까─그것도 고작 감기에─.
애매한 말투를 알아차렸는지 알데바란이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그건 평소의 남자에게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웃음이었다.
“내가 걱정한 것도 진심인데.”
“알고 있어요.”
상냥한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필시 므우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한 번쯤 얼굴을 내밀었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괜히 툴툴거린 건 어색했기 때문이다. 아팠을 때 혼자 견뎠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누군가 걱정해 준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물론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고 있다. 대놓고 과보호를 하는 아이오로스나 므우에게도, 아닌 척해도 툴툴거리며 챙겨주는 카논에게도,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부 상냥하고 착한─몇몇은 의심스럽긴 하지만─, 소중한 지인들.
괜히 얼굴이 홧홧해진다. 방금 뭔가 엄청 자연스럽게 오글거리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 단순한 사람들 속에 있다 보니 생각마저 단순해지는 건지. 혼자 부끄러워진 사라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그보다…….”
“누나!!”
갑작스럽게 말이 잘렸다. 외침과 함께 진짜로 문을 부수며 들어온 사람은 세이야다. 당연히 슌이나 시류, 효가도 뒤따라 들어왔다. 심지어 잇키도 있다. 사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알데바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쪽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니,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할 애들이 왜?
그래도 그것뿐이면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는 사나흘 뒤에야 올 거란 소릴 들었지만 예정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사라가 정말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동생들이 전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세이야랑 슌은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다. 너희가 신경 쓸 것 같지 않지만 혹시 시험이라도 망했니?
“누나!!”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제일 어린 막내들이 침대에 매달렸다. 고개를 파묻고 있는 부위가 천천히 젖어가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한 모양이다. 사라는 멍청하게 동생들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야? 슌?"
그러자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아, 그래. 원래 옆에서 달래면 더 울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래, 울렴. 실컷 울렴. 분이 풀릴 때까지 울렴. 그러고 나면 내 얘기 좀 들어주고. 사고가 엉뚱한 데로 빠지고 있다. 슬슬 생각하길 포기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사라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왜 우는지 이유는 좀 설명해 주지 않을래.”
“누나, 죽지 마!!”
“응????”
느닷없는 동문서답이 되돌아온다.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어 사라는 그나마 침착한 형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쓴웃음을 그리고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소년들은 전부 동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언어를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 어째 나오는 게 저 말뿐이다. 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의미를 모르겠지. 혹시 발음만 같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세이야.”
어버버거리고 있자 오작동을 일으킨 자신을 대신해 알데바란이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것까지 무시할 수 없었는지 세이야가 울면서 토막 난 문장을 내뱉는다. 젖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카논이, 누나, 아프다고, 근데……, 잘, 제대로 안 가르쳐, 주고, 면회, 안 되고……, 아이오로스는, 표정, 이상하고, 그래서 분명, 엄청, 큰일이라고…….”
미안, 무슨 소린지 더 모르겠어. 중간에 뭔가 엄청난 오해와 비약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그 과정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니, 세이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류나 효가, 잇키 너희까지 도대체 왜. 같은 심정인지 알데바란의 표정도 영 좋지 못하다.
사라는 잘못된 게 있다고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말해봤자 더 꼬일 것만 같단 말이지. 그래서 사라는 일단 제일 객관적이고 명료한 사실만을 내뱉었다.
“나 내일 퇴원하는데.”
“……응????”
폭탄 발언에 동생들이 전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필시 아까 자신의 표정도 저랬으리라. 그래, 너희 심정 다 안단다.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며 강해진 사라는 모든 걸 초월한─혹은 심각하게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가 전부 풀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는 것으로.”
이때까지의 일을 대강 설명하자 열심히 경청하고 있던 네 소년의─알데바란은 남매끼리 시간을 보내라고 돌아갔고 잇키는 사라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전부 표정이 비슷하다. 사라는 동생들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맘 다 알아. 부끄럽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이게 뭔가 싶을 거고 그러겠지. 내가 여기(성역)에 와서 많이 느꼈거든. 그리고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민망할 거다.
하지만 아직 어리다고 해도 수많은 고난을 헤쳐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 무시하는 게 답이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는지 제일 먼저 슌이 말을 돌렸다. 솔직히 너무 말을 돌리는 게 뻔히 보여서 보고 있는 이쪽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어, 어쨌든 몸은 괜찮은 거지?”
“아, 물론.”
사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애당초 주변에서 떠든 것에 비해 병이 그리 심각했던 것도 아니다. 스스로는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니까. 뭐, 이건 자신이 둔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자신의 이런 성격은 동생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편견 때문에 제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갑자기 효가가 한 발짝 다가왔다. 사라는 의아하게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딱 한 번 눈꺼풀을 깜빡거리자 보라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순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멈췄던 호흡이 다시 시작되자 서늘한 온기가 떨어져 나간다. 사라는 그제야 효가가 자신의 열을 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놀라라. 예고 좀 해주면 어디 덧나니. 이 천연들.
당황해서 어정쩡한 포즈로 동생을 보자 효가가 눈썹을 찌푸렸다. 소년의 미간에 섬세하게 주름이 졌다.
“아직 뜨거운데.”
“……너에 비하면 일반인은 다 뜨겁지 않을까.”
반사적으로 딴지를 걸자 그런가? 라며 효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서 시류가 어정쩡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동의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사라는 한숨인지 미소인지 모를 것을 그려냈다.
“그래도 누나가 괜찮다니 다행이네!”
때마침 분위기를 환기하듯 세이야가 크게 웃었다. 평소 주변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소년의 성격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짤막한 말 한마디에 어색하던 공기가 부드럽게 풀려간다. 온화하고 자연스러워진 동생들의 얼굴을 보며 사라도 느슨하게 긴장을 풀었다. 덕분에 입술도 가볍게 열렸다. 조금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지만, 여신에 맹세코 사라에게 결코 악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기말은? 시험 잘 봤어?”
“………………………………아니요.”
그래, 못 봤겠지. 그렇게 공부를 안 했는데 잘 볼 리가 없지. 누나가 눈치가 없어서 미안해.
순식간에 원상복구 되어 침울해진 동생들을 보고 사라는 속으로 열심히 사죄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사오리 씨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할게.”
물론 다들 시험 성적 가지고 뭐라 하진 않겠지만─그럴 군번도 안 되지만─ 그래도 의리란 게 있는 법이다.
그날 밤, 사라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내일이 퇴원이라고 괜히 설레는 건 아닐 터였다. 퇴원해봤자 기다리는 건 지겨운 얼굴들과 처리해야 할 일밖에 없는데 설렐 리가. 아니면 낮에 세이야들과 떠들썩하게 논 탓에 흥분이 아직 남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잠들고 싶은데 잘 수 없다는 건 생각보다 불유쾌한 기분이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역시 수마는 몰려오지 않는다. 사라는 양을 세볼까 했다가 포기했다. 어쩐지 양을 세다간 잠이 더 안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슬픈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지.
결국 사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누워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아무래도 좀 움직여야겠다 싶었다. 어쩌면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삼 일 내내 너무 자서일지도 모르니까. 설마 내일이 퇴원인데 잠깐 산책 좀 했다고 혼내진 않겠지.
그때-
「똑똑」
그대로 겉옷을 걸치던 사라는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지? 지금 소린? 이 밤중에 의사가 찾아올 리가 없는데?
사라는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의무실은 워낙 조용한 곳에 있는지라 낮에도 딱히 무슨 소리를 듣는 일은 적었다. 지금도 그렇다. 고요함이 희미하게 노이즈를 세우고, 거기에 섞여 가끔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없다.
‘……잘못 들었나?’
그래, 잘못 들었겠지. 이 밤중에 무슨 소리가……
「똑똑」
나는구나. 아이고.
사라는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놀랐는데 두 번째가 되니까 묘하게 침착해졌다. 사실 짐작 가는 데가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는 참 특이하게도 문이 아니라 창문 쪽에서 났다. 어쩔까 망설이던 사라는 곧 느긋한 걸음으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짧은 호흡. 굳게 닫혀있던 커튼을 열어젖히자 금색이 화악 쏟아진다.
“좋은 밤이구나, 사라.”
“……네, 그러네요. 샤카.”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사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창밖에 서 있던 사람은 샤카였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별빛을 받아 남자의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빛난다. 건물 안팎 지면의 높이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항상 올려다보던 얼굴이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게 굉장히 생경했다.
사라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창문을 열었다. 밤의 쌀쌀한 바람이 살짝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사라는 어깨를 움츠렸다.
“뭔가 할 말은 많지만 일단 어째서 이런 밤중에, 그것도 창문으로 찾아왔는지 물어봐도 괜찮나요?”
“면회가 금지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게 몰래 찾아와도 된다는 소리는 아닐 텐데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새삼스러운 얘기다. 솔직히 이제는 별 허탈감도 들지 않는다. 당신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죠.
“……용건만 간단하게 해주세요.”
당돌한 발언에 샤카가 삐뚜름하게 입귀를 비틀었다. 불만이 있는 건지 그도 아니면 별 의미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매정하구나. 뭐어, 좋다. 이것을.”
“……?”
반사적으로 샤카가 건넨 물건을 받아든 사라는 조금 놀랐다. 작은 꽃다발이었다. 흰색에 가깝게 연한 분홍색이 도는,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무리. 종이와 끈으로 어설프게 묶고 있는 모양이 어설프면서도 어딘지 귀엽다.
사라는 희미하게 볼을 붉혔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남자에게 꽃다발을 받아보는 건 퍽 오랜만이라 쑥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게 중학교 졸업식 때 후배에게 받았던 거였나. 하지만 이걸 왜? 의문을 알아챘는지 질문도 전에 샤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병문안 선물이다.”
“……퇴원이 내일인데요.”
부끄러움 때문에 사라는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낮에 왔던 알데바란과 세이야들은 살짝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때론 뻔뻔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샤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 태도에 비하면 지나치게 쌀쌀맞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자신의 볼일만 보고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럼─”
미련도 남지 않은 태도로 남자가 몸을 돌린다. 그를 보고 사라는 황급히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샤카!”
예상보다 크게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다행히 샤카는 바로 걸음을 멈춰주었다. 돌아보는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불러 세운 게 아니다. 그냥 저도 모르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사라는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꽃, 고마워요.”
“……음.”
그제야 샤캬의 입술에 달과 같은 미소가 걸렸다. 사라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적잖이 안심이 됐다.
“아. 그리고 밤공기가 차니까 아무리 잠이 안 오더라도 산책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에.”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정말이지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하지만 굳이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사라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반응에 샤카가 만족한 듯 한 번 더 웃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흔들흔들, 밤의 어둠 속에서 뒷모습이 희미해진다.
사라는 한동안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덤 1.
목표 지점까지는 고작 3m 남짓이었다. 몇 발자국도 되지 않을 짧은 거리.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오로스는 알고 있었다. 매우 은밀하게, 기척을 최대한 감춰서, 발소리는 무음에 가까울 정도로 죽이고. 그리하여 이제 목표로 손만 뻗으면 되었는데─
“아이오로스.”
낮고 무겁게 경고의 목소리가 깔렸다.
쳇, 결국 들켰나. 아이오로스는 내심 혀를 찼지만 그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여기서 티를 내는 건 하수나 하는 짓. 아이오로스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왜 그래, 사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대놓고 불쾌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전우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의 압력이 따갑다. 하지만 아이오로스는 오히려 방긋방긋 웃음으로써 사가에게 맞섰다. 제가 이리 나오면 지은 죄가 있는 사가가 강경하게 나오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치사하지만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사가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무거운 분위기도 조금 가신다. 아이오로스는 남몰래 안심했다. 이로써 어느 정도는 추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를 가는 거지.”
“아무 데도 안 가는데?”
“……그런가.”
음?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추궁을 안 할 리가 없는데? 예상 밖의 반응에 아이오로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건 또 다른 찬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집무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건가! 기다려라, 사라! 오빠가 간다!!
하지만 아이오로스의 기쁨은 다음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호오. 아무 데다 안 간다는 것 치고 태도가 이상한데, 아이오로스.”
“시, 시온 님?!”
그랬다. 아이오로스는 잊고 있던 것이다. 현 상태 최대의 장애물이자 자신의 권위마저 통하지 않는 성역 최고의 지배자를. 그리고 그 대가는 곧바로 몸으로 돌아왔다.
“에잇! 시스콤도 적당히 하란 말이다, 이 애송이가!!”
“자, 잠깐!!!”
아이오로스의 필사적인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온은 즉시 필살기, ‘허둥대지 마라, 애송이들아!’를 직격으로 날렸다.
덤 2.
팔랑, 하고 얇은 종이 같은 것이 떨어졌다. 우연히 그걸 본 슌은 몸을 굽혀 떨어진 것을 주웠다.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깨졌다.
확인해 보자 압화로 만든 조그만 책갈피였다. 코팅지 안에는 작고 소담한 들꽃이 들어있었다. 꽃잎 색은 옅은 핑크. 끝에 묶은 진홍색 리본과 어울려 꽤 귀여워 보이는 모양새다.
“누나, 이거.”
“아, 고마워.”
책갈피를 떨어트린 당사자, 사라에게 돌려주던 슌은 무심코 웃어버렸다. 책갈피만 봤을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게 누나 손에 들어가 있는 걸 보니까 괜히 웃음이 났던 것이다. 이상한 게 아니라 누나에게도 저렇게 소녀 같은 감성이 있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책갈피 귀엽네.”
슌은 큰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그에 사라가 눈을 깜빡이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네.”
헌데 말투가 어쩐지 이상했다. 자신의 물건이 분명할 텐데 어쩐지 남이 준 물건을 가지고 품평하는 듯한 말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누나가 기뻐 보였기에 슌은 딱히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의욕 없음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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