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들 의심하지만 세인트는 인간이다.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물건을 얼리고, 때론 하늘을 나는 둥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긴 해도 분명 인간이다. 때문에 세인트에게도 한계는 분명히 있었고(한계마저 넘어 기적을 일으키는 소수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막을 수 없는 사건도 당연히 존재했다. 이번 일이 그랬다. 때는 환절기, 날씨가 급격하게 바뀌는 시기. 성역에 전염성 강한 병이 돌았다. 일반인, 세인트를 가리지 않고 성역 대부분을 쓰러트린 병은 결국 골드 세인트까지 굴복시켰다. 제일 처음 쓰러진 사람은 온갖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잔뜩 약해졌던 사가. 쓰러진 곳은 집무실 책상 옆이고, 심지어 발견자는 아테나였다. 그쯤 되자 처음엔 낙관적으로 생각하던 의료진은 몇 남지 않은 생존자와 함께 투쟁에 들어갔다. 이대로..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머나먼 곳의 웅성거림, 살금거리는 발걸음 소리,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 언제나와 같은, 아니 조금 다르다. 평소처럼 작은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세심한 부분까지 똑똑히 들리는 듯한. 멍한 머리를 억지로 일깨웠다. 간신히 눈꺼풀이 떨어졌다. 몇 번 깜빡이면 시야가 선명해진다. 사라는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위화감이 습격한다. ‘……내 방이 이렇게 컸나?“ 천장이 높았다. 문도 멀리 떨어져 있다. 작진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았던 침대가 지금은 널찍하게 펼쳐졌다. 넘실대는 흰색은 그야말로 시트의 바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잠결 때문에 환상이라도 보고 있나 싶었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봐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진짜 이게..
느즈막한 오후였다. 벽 한쪽을 온통 차지하는 커다란 창에서 햇빛이 쏟아 든다. 방안이 온통 오렌지 색으로 물들었다. 구름 그림자가 희미하게 스친다. 그 한가운데 사라가 있었다. 살짝 내리깔린 속눈썹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다갈색이 얼핏 황금빛으로 물든다. 세이야는 그런 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시선을 알아채고 금방 얼굴을 마주해줬겠으나 드물게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반응이 없다. 한 5분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사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 바람직한 자세겠으나 세이야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길 몰라준다고 삐진 건 아닌 데 뭔가 허전하다. 결국 세이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천천히 사라가 고개를 든다. 주변에서 이것만큼은 꼭 저와 닮았다고 말하는 눈동자가 깜빡였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