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아궁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세찬 비다. 흔한 표현으로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아까만 해도 화창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사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소나기일 확률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맞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기실 세인트로서 단련한 게 있는 데 비 좀 맞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테니 평소라면 그냥 뛰었을 거다. 문제는 제가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서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품에 꽁꽁 싸매고 간다고 한들 이 빗속에서 종이가 젖지 않기는 어렵겠지. 만약 글자 몇 개라도 번진다면 저와 동료들의 3일 철야가 헛수고가 된다. 사가는 잔업에 ..
창을 통해 깨끗한 하늘이 보였다.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예쁜 하늘이었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동화책에나 나오는 것 같은 구름이 흐른다. 너무 평화롭고 행복한 광경이라 이대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구름을 따라 사고가 멍하니 흘러갔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머릿속으로 바보 같은 동요가 울려 퍼진다. 이 어처구니없는 흐름의 이유를 세이야는 알고 있었다. 적당히 도피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현실이 들이밀어졌다. 커다란 테이블 위로 흐트러진 필기구와 수많은 책, 책, 책. 소위 교과서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 세이야는 현재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자신의 본분─이라기엔 조금 미묘하지만─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랬단 소리다. 암담함에 포로록 한숨이 새어 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행 시절, 세이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세이야보다 키가 컸다. 형과 같았던 아이오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카시오스 같은 또래의 경쟁자들도 세이야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마린의 수행으로 그런 사소한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이야 본인이 주변과의 인종 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양인인 이상 서양인보다 신체 조건에서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이것은 불합리한 비하의 근거가 되었지만 다행히 세이야에게는 콤플렉스 따윈 생기기도 전에 부숴줄 엄격한 스승과 상냥한 선배가 있었다. 세인트가 될 수 있냐 없냐 하는 문제에 비하면 신장에 관한 일은 매우 사소했고, 신체조건의 열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