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추위가 도래했다. 입을 열면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뽀얀 입김이 나왔다. 해도 짧다. 늦은 오후인데도 사위가 컴컴하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추워졌네.” 의미 없이 텐마가 말을 흘린다. 말투는 지독히 열없고 얄팍했다. 옆에 있던 야토도 여상히 말을 받았다. “벌써 12월이니까. 어떤 가게는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도 세웠더라.” 대단할 것 없는 문장이었으나 뚝, 부자연스럽게 텐마의 걸음이 끊어졌다. 덩달아 야토와 유즈리하의 다리도 멈췄다. “12월?” 세상에 종말,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하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모양새가 기름칠 안 한 고철덩어리 같다. 왜 저래? 야토와 유즈리하는 서로 눈짓했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늘이 28일이니 내일모레면 12..
“야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어?” 느닷없는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야토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지 익숙한 얼굴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하얗게 빛나는 하복 셔츠, 생기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 거의 몇 달만인 것 같은 그리움. 울컥, 이유도 없이 눈물이 솟으려 한다. 꼴사납긴. 울음을 참기 위해 야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즈리하.” 오랜만. 많은 말은 못하고 살랑살랑 대충 손을 흔들자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쉼표. 그래서? 맥락도 없이 질문이 가볍게 던져졌다.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토는 이내 아까의 질문을 떠올렸다. 아, 그거라면. 야토는 대답 대신 운동장 쪽을 가리켰다. 유즈리하의 시선이 손가락을..
사방이 조용했다. 이따금 시곗바늘 소리가 울리고 그 사이로 타자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들렸다. 숨이 막힐 듯한 깊은 정적. 그런 침묵 속에서 마니골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시드.” “뭐냐.” “지금 몇 시냐?” “6시 57분.” “우리 퇴근 시간은?” “6시 20분.” “근데 우리가 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일이 남았으니까.” 따지는 듯한 질문에도 엘시드는 미동하지 않았다. 언제나 날카로운 검처럼 약간의 휘어짐도 없는 녀석이다. 원래라면 존경해야 할 부분이지만 가끔은 얄미워지기도 한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는. 조금 망설이긴 해도 담담하게 사실만을 고하는 동료의 대답에 마니골도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러니까 왜 또 야근이냐고!!!!” 자그만 공간에 마니골도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