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손등 위로 햇빛이 떨어졌다.
공기가 가라앉아 있다. 고요한 숨소리,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멀리 떨어져 띄엄띄엄한 목소리. 이 외에 다른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정적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세계처럼.
반쯤은 타성으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사가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오늘 서류 처리 당번은 아이오로스와 아이오리아 두 사람이다. 얼핏 보면 쌍둥이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똑 닮은 형제지만 태도는 매우 달랐다.
이런 서류 처리엔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한때 교황 후보로 이름을 올린 전적이 있는 만큼 아이오로스는 별 무리 없이 업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반면, 정말로 서류 처리에 재능이 없는 아이오리아는 혼과 육체가 거의 분리된 모습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다. 저 서류는 분명 못 쓰겠군.
업무가 원활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사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자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다름 아닌 사라다.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커다란 책들과 약간의 서류 더미를 들고 그녀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치고 들어온다. 처음 성역에 왔을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약간 움츠러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망설임 없이 사가가 앉아있는 책상까지 다가온 사라는 들고 있던 것을 전부 그 위로 올려놓았다.
“여기 부탁하신 것들요.”
“아, 고마워.”
사가는 반사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사실 그것밖에 말할 게 없었다. 딱히 시시한 잡담을 나눌만한 사이도,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가버릴 거란 예상과 달리 사라는 옆에서 어설프게 말을 붙여왔다.
“이게 거의 끝이니 당분간 바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이건 꽤 희소식이다. 그렇다면 지금 멤버로도 일을 마치는 데는 무리가 없겠군. 사가는 머릿속에서 아이오리아를 빨리 내쫓고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휴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느닷없는 말에 사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에 사라가 손끝을 꼼지락거린다. 무언無言을 뭐라 해석했는지 ‘물론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요.’ 하고 조그맣게 덧붙이기도 했다. 사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관은 없지만 네가 휴가를 요청하다니 드문 일이군.”
“그런가요?”
사라가 성역에서 일한 것도 제법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그녀가 자발적으로 휴가를 신청한 적은 없었다. 성역에서 그런 제도 자체가 일반화되어있지 않기도 했지만─지금 생각하면 참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이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봤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실제 본인 입으로 다른 사람들, 특히 사가 자신이 일하는 걸 보면 불쌍해서 차마 그런 요청을 못 하겠다고 하기도 했고.
본인도 그런 상황을 떠올렸는지 애매한 표정을 한다. 그러더니 흘끗 뒤쪽, 형제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서 사가는 다시 한 번 의아함을 가졌다. 어째서인지 사라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이오로스가 아니라 아이오리아 쪽을.
뭔가 있는 건가. 물론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간섭할 권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사가는 그냥 긍정만을 표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문제없을 테니 나오지 않아도 좋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가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문 쪽에 다다랐을 때, 사가는 문득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사라가 움찔 자리에 멈춰 섰다. 쨍하니 굳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하다. 괜한 걸 물었나 싶어 사가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취소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사라가 먼저 이쪽을 돌아봤다. 다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다.
“데이트가 있어서요.”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마치 더 이상의 대화를 잘라버리려는 듯.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남자들의 합창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뭐?!!”
십이궁을 내려가던 사라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두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의뭉스럽게 웃는 아프로디테는 그렇다 치고 기묘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던 카뮤나 뭔가 말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 듯한 모습의 미로라니. 뭔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의심은 거해궁에서 데스마스크가 굳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 최고조로 부풀어 올랐다.
“여-”
원래 데스마스크는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다는 이유로 사라에 대해 수수방관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굳이 말을 거는 건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하나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다른 하나는 놀려먹기 딱 좋은 일이 있어서.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리 봐도 후자다.
사라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히죽히죽 웃고 있는 데스마스크의 얼굴이 참 능글맞았다. 조금 통렬하게 말하자면 참 재수 없었다.
“데이트한다며?”
“……어째서 알고 있는 건가요”
“글쎄~”
전혀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데스마스크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사라는 그를 바라보다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정말이지, SNS도 별다른 통신체계도 없는 주제에 이런 소문은 참 잘 퍼진다. 무슨 연락 네트워크라도 따로 있는 건지. 왜 어제저녁, 엄중한 집무실에서, 소문을 퍼트릴 만한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것도 딱 한 마디 한 게 여기까지 퍼져있는 거냐고요. 게다가 기분 탓인진 몰라도 유독 자신의 얘기가 잘 퍼진다. 도대체 왜?
당연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부르짖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직접 물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경험에 의거한 추론이다. 비슷한 질문을 던지면 다들 어째서 그걸 모르냐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으니까.
“그래서. 데이트라고 그렇게 꾸몄냐?”
품평하듯 노골적으로 데스마스크가 자신을 훑어보았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사라도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다. 절로 의문이 나왔다.
“전혀 안 꾸몄는데요.”
“뭐? 하지만 평소랑 엄청 다른데?”
그렇게 말해도 안 꾸민 건 안 꾸민 거다. 위에 걸친 건 몇 년을 입어서 낡아 버린 셔츠에 스웨터, 아래엔 시장에서 산 싸구려 청바지. 신발도 튼튼한 거 외엔 장점이 없는 운동화다. 머리는 귀찮아서 하나로 질끈 묶었고 심지어 화장도 안 했다. 마지막 양심으로 로션이랑 립글로스만 발랐을 뿐이다.
아무리 잘 봐줘도 동네주민1일 뿐인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꾸민 걸로 보는 걸까.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몇 안 된다. 데스마스크의 심미안이 지나치게 낮거나, 그도 아니면─
“……제가 평소에 좀 좀비처럼 다니긴 했죠.”
“아, 과연.”
데스마스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납득해서 사라는 좀 슬퍼졌다.
문득 데스마스크가 말을 끊었다. 부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사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보고 있는 건 이보다 조금 뒤, 아무것도 없는 어느 장소. 혹시나 해서 뒤를 바라보았으나 역시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스마스크?”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데스마스크가 몸을 움칠거렸다. 그러더니 기묘한 한숨을 내쉰다. 이 남자에게서 나오리라곤 생각할 수 없던 한숨이다.
“어, 그래, 뭐, 힘내라.”
조롱과 어처구니없음과 동정이 담긴 응원 역시. 갑자기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하지만 굳이 물어볼 용기가 없었기에 사라는 수동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네, 뭐. 힘낼게요?”
시간을 거슬러 전날 저녁.
사라의 폭탄선언을 들은 아이오로스는 당장 모든 집무를 내팽개치고 처녀궁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사가가 아픈 위를 부여잡으며 이름을 불렀지만 물론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내 동생이 이상한 놈에게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집무가 대수냐! 동료 좋다는 게 뭐냐고!
코스모 통신으로 대략적인 내용─사실은 단말마에 가까웠던─을 들은 므우도 당장 장비를 내팽개치고 처녀궁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깜짝 놀란 키키가 이름을 불렀지만 물론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내 누이가 이상한 남자에게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일이 대수인가요. 뒤를 부탁합니다, 키키.
그리하여 둘이 처녀궁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쾅! 하고 문짝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안쪽에 있던 샤카가 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샤카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의 수면처럼, 불투명하니 속이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무엇 하나도 분명하지 않은 그런 모습. 사라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많지만 타인에게 있어 샤카는 대개 이런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샤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어차피 범인凡人의 인지로는 파악할 수 없는 남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이오로스와 므우는 익숙한 모습에도 괜히 울컥해버렸다.
아이오로스와 므우는 샤카를 앞에 두고 서로 눈짓했다. 둘 중 먼저 움직인 건 아이오로스였다. 괜히 아이오리아의 형이 아닌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이오로스는 일단 샤카의 멱살부터 잡고 봤다.
“네가 그렇게 무뢰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샤카.”
“……흠. 명계에 가 있는 사이 예의를 많이 잃었구나, 아이오로스.”
“예의 문제에 관한 거라면 당신에게 듣고 싶지 않군요.”
미소를 지운 므우가 날카롭게 대꾸한다. 평소 골드 세인트 중에서 제일 온화하단 평을 듣는 그이지만 상대가 무뢰한(아직 추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자신의 누이에게 손을 대려는 이라면 얘기가 더더욱 달랐다.
빈정거림이 통한 건지 아닌 건지 샤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스윽 훑어봤을 뿐이다. 시선을 받고 아이오로스와 므우는 어깨를 긴장시켰다. 샤카의 성질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아테나가 말리지 않는 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그를 깨듯 느닷없이 샤카가 희미한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 보아라.”
아무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뿐인 듯하다. 그 모습이 시치미를 떼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오로스와 므우는 무심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뭐야, 샤카가 사라한테 손댄 것 아니었어?(아니었습니까?)
“네가 뭔가 한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뭐를…….”
“사라 말입니다.”
사라의 이름이 나온 순간 샤카의 기색이 변했다. 거칠게 아이오로스의 손을 떼어내고 되묻는 모습이 사납다.
“사라가 무얼?”
아무래도 이쪽이 범인이 아닌 것 같아 아이오로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므우도 그 옆에 조용히 앉았다. 저절로 기묘한 삼자 구도가 이루어졌다.
노골적인 압박을 받으며 아이오로스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까 본인에게 들었는데 내일 데이트를 한다던데.”
곧바로 샤카의 코스모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서 큰바람이 분다.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므우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 앞에 크리스탈 윌을 펼치며 샤카를 타박했다.
“진정하세요, 샤카.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라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화낸 너희들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
대답이 띠껍다. 그래도 진정은 한 모양이다. 공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속이야 어땠든 겉보기로는 잔잔한 흐름이 되돌아온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듯하던 샤카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건 아이오로스나 므우도 마찬가지다. 한 줄기의 눈빛만으로 서로의 각오를 확인한 셋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 멱살잡이하던 것도 잊고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치했다.
일단은 상대가 누군지 밝혀내는 게 먼저였다.
“……세이야들이 상대라면 별문제 없는데 말이지.”
조용한 아이오로스의 중얼거림에 샤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들은 형제가 아닌가.”
“형제들과 놀러 가는 거라도 장난스럽게 데이트라 말하기도 하잖아.”
사라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세이야들이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사라를 끌어내는 일이야 많았으니까. 하지만 므우는 둘의 바람에 가까운 추측을 단번에 박살 냈다.
“현재 세이야들은 일본에 있습니다만.”
─자신들에게만─최선의 시나리오가 무너져 셋은 머리를 싸맸다. 그 외에도 경우의 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아니, 왜 우리가 사라가 데이트 할 만한 남자를 떠올려야 하는 거냐고요.
“……카논은?”
“해계의 일로 바빠서 당분간은 틈이 없을 거야.”
“아니면 미로는?”
“둘이 친한 건 맞지만 사라가 데이트라는 친근한 단어를 쓸지 의문인 데다 미로가 그렇게까지 학습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 외에는 없나?”
“골드 세인트 중에서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군.”
“실버 이하의 세인트들과는 그다지 친분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고 보니 명계의 그리폰과도 꽤 친하지 않았던가.”
“………….”
“………….”
“………….”
안 되겠다. 답이 없다. 빛 하나 없는 캄캄한 미래에 셋은 좌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라에게 달려가 상대가 누구냐고 묻거나 데이트를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게, 자신들의 행동이 일반론에서 제법 벗어나 있다는 것 정도는 (일단은)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걸 사라에게 얘기해봤자 상관하지 말라는 말이나 듣겠지.
결국 셋은 이심전심이라는 훌륭한 수단을 사용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의 동시에 결심했다.
‘미행하자!’
이상한 논리지만 그랬다.
그리하여 현재, 셋이 거해궁의 기둥 그늘에 숨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데스마스크와 사라를 훔쳐보고 있는 상황에 이른다.
세인트의 오감은 일반인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서인지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둘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건대 그렇게까지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기에 남자들은 안심했다.
“……일단은 데스마스크도 아닌 모양이군요.”
“그보다 사라는 오늘 왜 저렇게 꾸민 거야!”
“아니, 저건 딱히 꾸민 게 아닌 것 같다만.”
드물게도,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샤카가 냉정하게 사실을 꼬집었지만 그 말은 말릴 수 없는 시스콤들에게 장렬히 씹혔다.
때마침 사라가 인사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셋은 그 뒤를 따라 은밀하게 위대하게 첩보작전을 속행했다. 중간에 데스마스크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그건 당연히 무시하고.
사라는 가볍게 쌍아궁, 금우궁, 백양궁을 통과했다. 세인트 후보생들의 훈련 장소도 통과했다. 심지어 일반인 거주구역도 가볍게 통과했다. 발걸음이 참 거침없다. 중간에 인사하는 사람은 있어도 동행하는 사람은 없다. 뭐야, 이거. 정말로 데이트하러 가는 거 맞아? 셋이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을 때 사라는 이미 성역과 마을로 이어지는 입구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장소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늘에 잠겨있어 얼굴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실루엣만 봐도 다부진 체격이란 걸 알 수 있다.
사라가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건다. 뭐라 대꾸하며 남자도 사라에게 다가섰다. 한 발짝 그늘에서 벗어난 그의 머리카락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밀 빛 머리카락. 눈부신 듯 남자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 타이밍에 사라가 다시 말을 하자 얼핏 굳어있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셋은 무심코 절규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셋은 무심코 절규했다.
“아이오리아?!!!!”
그래, 아이오리아였다. 방년 21세, 레오의 골드 세인트이자 아이오로스의 동생이기도 한 남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대의 등장에 므우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왜 아이오리아가 튀어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 옳다.
제삼자가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모저모 따져봤을 때, 아이오리아와 사라가 제법 관계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관계는 대개 세이야나 아이오로스를 가운데 둔, 간접적인 관계에 그치는 일이 많았다. 실제로 타인을 빼놓고 단둘만의 사이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설명이 굉장히 모호해진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여기서 등장한다고? 도대체 어떤 경로로?
므우가 고심에 빠져있는 사이 사라와 아이오리아는 어느새 나란히 마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 퍽 다정하다. 그 모습을 보고 므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아이오로스와 샤카를 돌아보니 두 사람의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의동생에게 달라붙은 벌레를 떼러 왔더니 그 벌레가 실은 친동생이란 사실에 오류가 난 것인지 아이오로스는 지독히도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샤카는 세상만사가 끝나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므우는 흘러넘치는 경멸을 참지 못했다. 둘 다 한심하네요, 정말.
그래도 난동을 부려 미행이 들킬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다. 므우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따라가죠.”
“어? 따라간다고?”
아이오로스가 멍청하게 되묻는다. 므우는 성역의 영웅을 향해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힌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럼 여기서 바보같이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러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어쨌든 저는 확실히 확인해야겠습니다. 솔직히 여기서 왜 아이오리아가 나오는지 의문이 너무 많군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동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는지 아이오로스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샤카는 소극적으로 물러섰다. 언동에 힘이 없는 게 괜히 으스스하다.
“……나는 되었다. 애초에 내가 간섭할 자격은 없지 않느냐.”
심지어 사라가 좋다면 됐다고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연애소설에 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도록 조용히 떠나보내겠다.’ 모드인 것 같다. 평소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참 기특한 태도다. 므우는 그런 샤카를 보며 코웃음 쳤다.
“조금 전까지 난리를 쳤으면서 잘도 말하는군요. 됐으니까 얌전히 따라오세요. 뒤에서 괜히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지나 말고.”
샤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행이 속행됐다.
지켜본 바에 의하면 딱히 목적지는 없었던 듯, 사라와 아이오리아는 아테네 시내로 나와 계속 걷기만 했다. 그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이따금 길 가에 있는 가게 진열대를 들여다보고,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피고. 그게 둘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둘은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연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므우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라는 일부러 휴가를 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전에 무언가 계획이 있었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하는 건 산책뿐이다. 최대한으로 봐도 기껏해야 쇼핑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 정말로 데이트를 하려던 거면 저러고만 있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이상한 게 두 사람은 연인이라기엔 너무 건조했다. 뭐가 건조하냐고 물으면 딱 대답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분위기일까. 여하튼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고 남자의 직감이 속삭였다.
“……수상하네요.”
“그냥 네 과대망상이 아니고?”
속삭이듯 혼잣말을 떨어트리자 샤카가 즉각 반박했다. 이 남자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성적인지 모르겠다.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므우는 조금 짜증을 내며 아이오리아와 사라를 가리켜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는 아이오리아가 사라에게 가깝게 붙어 서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조용히 해야 하는 공간도 아닌데 왜 굳이 가깝게 붙어있는 건가요.
차마 나서지 못하는 울분을 담아 므우는 오랜 동료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행동은 점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
귓속말에 답하여 사라도 조그맣게 입술을 열었다. 아이오리아가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한다. 짧게 귓속말이 이어진다. 잠깐의 침묵. 사라가 몇 마디를 더 속삭였다. 직후, 아이오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 사라가 키득거렸다.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다. 평소와 다르게 드러난 감정이 선명하다. 더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아이오리아가 허둥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므우는 슬슬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까지 마모되는 걸 느꼈다.
“……역시 아이오리아를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일단 친형이 옆에 있는데 그런 발언은 좀 너무하지 않을까.”
옆에서 아이오로스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므우는 코큐토스의 냉기에도 지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답지 않군요. 동생이라고 감싸주는 건가요?”
“아니. 생각해 봤는데, 사라가 아이오리아랑 결혼한다면 정말로 내 동생이 되는 거니까 꽤 괜찮은 계획 같아서.”
“그거야말로 과대망상이네요.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멋대로 결혼까지 진행시키지 마십시오. 샤카보다는 100배, 아니 1000배는 낫지만 어쨌든 전 아직 인정 못 합니다.”
“……므우여, 어째서 가만히 있던 나를 끌어들여 욕하는 거지.”
““이때까지의 언동을 생각해 봐(보세요).””
아이오로스와 므우의 합창에 샤카가 가볍게 침몰했다. 찔리는 게 참으로 많을 터이다. 그럼에도 태도를 잘 고치지 않는다는 게 저 남자의 나쁜 점이지만.
하여튼 간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므우는 샤카를 무시하고 아이오로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언젠가 사라가 새싹과 닮았다고 얘기했던 눈동자가 지금은 투지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과연 교황의 애제자 愛弟子. 기세가 심상치 않다.
“누가 이대로 얌전히 있을 줄 알고? 두고 보세요. 시월드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거 좀 다른 것 같은데.”
물론 소심한 아이오로스의 딴지는 단번에 튕겨져 나갔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았는지 아이오로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샤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므우의 성격이 이렇게 된 건 지난 13년간의 일 때문일까?”
“코큐토스에 갇혔던 일로 나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
“그런데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이렇게까지 변하나?”
“음. 생각해 보니 원래 성격도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다 들려요, 둘 다.”
여하튼 일은 이렇게 되었다.
므우가 웃었다. 황금양의 매우 온화하고 우아한 웃음이었으나 그 뒤로는 보일 리 없는 수라도의 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환상 주제에 리얼하게 아수라들이 들끓는다. 싸움을 좋아하는 귀신답게 전부 피에 젖어있음에도 요사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즉, 싸움을 걸면 얼마든지 받아 주겠단 태도다. 므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슬 쓸데없는 환상을 버리는 게 어떤가요, 아이오로스.”
대응해서 아이오로스가 웃었다. 영웅답게 호쾌하면서도 포용력 있는 웃음이었으나 그 뒤로는 보일 리 없는 지옥도의 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슬금슬금 검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꼴이 퍽 무서우면서도 징그럽다. 비유하자면 새카만 촉수 괴물. 즉, 나는 죽어도 포기 못 하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아이오로스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쓸데없다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을까.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므우?”
두 사람이 말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어지간한 자라면 헤라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제우스처럼 만들 정도로 기세가 무섭다. 그러면서도 둘 다 겉보기에는 퍽 우호적이고도 평화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게 질이 나쁘다.
자세히 보면 므우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리고 있다. 아이오로스도 팔짱을 낀 팔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고 꿈틀대고 있다. 작은 계기만 하나 있다면 당장에라도 천일 전쟁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만약 아테나나 시온이 여기 있었다면 세인트들이 사감私憾을 가지고 무슨 짓이냐며 규탄했을 게 틀림없다. 허나 둘에게는 다행히도, 그리고 말려들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겐 불행히도 성역 최고 권력자들은 현재 여기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해계에 있었던 터라 아직 제대로 상황파악이 안 된 카논이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뭔 일인데?”
카논은 저도 모르게 빈정거림에 가까운 질문을 내뱉었다. 물론 그 질문은 한창 기 싸움 중인 두 사람에겐 닿지 않았다.
사실 짐작이 전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저 둘이 이성을 잃을 일이라면 아테나나 세이야들이나 사라의 일밖에 더 있는가. 이 경우는 99.9%의 확률로 사라겠지만. 다만 그 자세한 사정이 궁금할 뿐이다. 아니, 무슨 일인지 알아야 끼어들든지 도망치든지 하지.
결국 유일하게 동생의 질문을 듣게 된 사가는 그저 웃었다. 마치 무언가─인간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한 듯 부드러우면서도 깨끗한 미소였다.
“대단치 않은 일이다. 그냥 내버려 둬.”
“……진짜 그래도 돼?”
평소였다면 저 둘이 싸웠을 경우 뒤처리를 신경 쓰느라 배를 부여잡고 있었을 사가가 너무 상쾌하게 말해 카논은 꽤 놀랐다. 순간이지만 다른 사람이 사가로 분장하고 들어온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쌍둥이의 감으로 금방 본인이라는 걸 알긴 했지만.
그런 카논을 심정을 알아챘는지 사가가 다시 웃었다. 그 미소가 아까보다 훨씬 깊고 공허했다.
“포기하면 편하다.”
“………….”
아, 그래. 괜찮은 게 아니라 그냥 미쳐버린 거였구나.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카논은 진심으로 사가를 동정했다.
그 후로 사흘이 흘렀다.
아이오리아는 아직 살아 있기는 했다. 매우 온전치 못한 상태로.
“어째서 내가…….”
므우에게서 거의 구르다시피 쫓겨 온 아이오리아가 사가와 무척이나 흡사한 모습으로 좌절했다. 그야말로 꿈과 희망도 없는 모습이다. 지상이 하데스에게 지배당했어도 저런 모습은 나왔을지 어땠을지. 황금 사자의 위용 따윈 어디 갖다 버린 지 오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라는 안타까움을 담아 아이오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힘내요. 며칠만 더 참으면 되니까.”
“……자기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
거의 정신을 놓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음울한 대답이 돌아온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사라는 어깨만 으쓱였다. 성역에 와서 는 건 체념과 스트레스와 독설뿐이라고 언제 말했던가. 이런 마음은 날로 갈고 닦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한의 이기주의에 가까워진 상태다. 그래도 완전히 양심을 잃은 건 아니라 일단 미안하단 표정 정도는 지어주었다. 물론 아이오리아에겐 별 위로도 되지 않겠지만.
짐작이 맞았는지 아이오리아가 퀭한 눈동자로 사라를 쳐다보더니 다시 느릿느릿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아무래도 나쁜 쪽으로 완전히 해탈해 버린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지옥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을까. 덕분에 사라는 진심으로 아이오리아에게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일이 끝나면 제대로 보상할게요.”
물론 말이 보상이지 이게 아이오리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진 모른다. 그래도 마음만은 전해졌는지 아이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단순하단 건 이럴 때 좋은 법이다.
한 번 더 어깨를 두드려 주자 이번에는 아이오리아도 별말 없이 위로를 받아들였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스르륵 풀린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아이오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나도 관련되어 있고. ……그보다 넌 괜찮나?”
“네?”
느닷없는 말이다. 의미를 알 수 없어 사라는 무심코 반문했다. 데이트 사건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건 므우 뿐. 그리고 므우가 자신에게까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건 아이오리아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 갑자기 안부는 왜 묻는 걸까. 설마 심하게 폭주한 므우가 자신에게도 손을 뻗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
헌데 그 뜻을 모르는 건 이쪽뿐인 듯했다. 반문에 아이오리아가 더욱 이상한 얼굴을 했다. 마치 그걸 왜 모르냐는 냥.
“샤카말이다.”
아. 사라는 그제야 깨달은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남자를 잊고 있었다니 자신이 어떻게 되었던 걸까.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게 이번에는 샤카가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은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확실히 이상하네요. 지금쯤이면 장난을 한 번 걸어올 만도 한데.”
“…………장난인가.”
아이오리아의 중얼거림엔 어처구니없다는 심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생각에 골몰해 있던 사라는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샤카로 말하자면 그날 이후 계속 처녀궁에 칩거 중이었다. 문자 그대로 두문불출. 누가 찾아가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걸어도 아무 대답도 안 한다. 완전히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얼핏 보면 상당히 침울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프로디테는 그런 샤카의 모습을 보고 딱 한 마디로 평했다.
“7살짜리 남자애가 좋아하던 여자애를 잔뜩 괴롭히기만 하다 정작 타이밍을 놓치고 다른 애한테 빼앗긴 거랑 똑같은 거지. 어리석기는”
본인의 우아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설이다. 심지어 말하면서 싱긋 상쾌하게 웃기까지 한다. 그런 아프로디테를 보며 데스마스크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겁도 없나, 아무리 본인이 없다지만 잘도 말하네. 물론 새삼스러운 감상이긴 했다.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르지 않을까.”
역시나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던 슈라는 일단 소심하게 반박해 봤다. 하지만 어쩌면 이 셋 중에서 제일 터프할지도 모르는 아프로디테는 그 반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하긴 그러네. 7살이면 어리다고 변명이나 할 수 있지 샤카는 그러지도 못하겠지. 어차피 그것도 자업자득이니까 역시 동정은 하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
좀 그만해라!! 샤카라면 어디서 듣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슈라와 데스마스크는 절규했다. 물론 이 말도 아프로디테 앞에선 꺼낼 수 없어 속으로만 외쳤을 뿐이다. 조금만 심기를 거슬렀다간 바로 블러디 로즈가 날아올 건 눈에 보듯 선했다. 때문이 그들이 할 수 있던 건 그저 아무것도 모른 척 악우惡友의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당번이 돌아온지라 잠깐 므우와 타협을 하고 이번에는 서류와 싸우고 있던 아이오로스는 고개를 들었다. 문 너머에 있는 기척은 익숙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들어와.”
짧게 대답을 하면 문이 빼꼼 열리고 그 사이로 사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품었다.
“잠깐 괜찮을까요, 아이오로스?”
그렇게 말하며 사라가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직후, 아이오리아가 그 뒤를 쭈뼛쭈뼛 따른다. 저 둘이 같이 오다니. 기척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기에 아이오로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둘이 데이트를 한 것과 거기에 대해 므우가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건 성역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두 사람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최근 며칠간은 같이 붙어 있는 것은 피했는데─사실 생각해 보면 원래도 딱히 붙어 다니지는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심지어 여기엔 므우도 있는데.
슬쩍 곁눈질을 하자 평소의 미소는 어디 갔는지 대놓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은 므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기세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다. 사라는 둘째치고서라도 뛰어난 전사인 아이오리아가 저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증거로 아이오리아는 땀을 삐질거리며 어떻게든 므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언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이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텐데.
‘……설마.’
두 사람이 그저 자신에게 볼일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허나 우연히 동시에 볼일이 생긴 거라고 해도 둘이 꼭 같이 와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행적을 보건대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따로 찾아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번 동행은 일부러 그랬다는 소리인데─
여태껏 사라와 아이오리아가 함께 있는 걸 피한 이유는 므우를 섣불리 자극하지 않기 위한 소극적 회피였을 것이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둘의 동행은 더는 피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이며 굳은 의지의 표출이 된다. 그렇다는 건 설마 이대로 결혼 발표?!
“안 해요.”
“……다른 건 오해할만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 얘기가 결혼까지 진행된 거야, 형.”
아, 아니구나. 동생들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가감 없이 보내온다. 얼결에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버린 아이오로스는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폭주한 면이 없잖아 있다.
옆에서 므우도 타박하듯 장미 가시 같은 시선을 보냈다. 아이오로스는 그를 모른 척하며 사라와 아이오리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래서, 둘 다 무슨 일이야?”
그에 사라와 아이오리아가 조금 전까지의 당당하던 태도를 버리고 우물쭈물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오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 발표도 아니라면서 왜 부끄러워하는 거지?
아이오로스의 궁금증이 커져 폭발할 때가 될 때쯤, 사라가 겨우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푸른색 포장지에 은색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였다. 뒤를 따르듯 아이오리아도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쪽은 흰색 포장지에 검정 리본이 달린 심플한 상자다. 아이오로스는 무심코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건?”
아이오로스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포장까지 한 것을 보니 자신에게 주는 선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갑자기 선물을 주는 이유는 뭘까. 딱히 축하받을만한 일은 없는데.
영문을 몰라 하고 있으니 아이오리아가 작게 웃었다. 겨우 긴장이 풀린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저 일상적이고 부드러운 가족의 미소.
“뭐야, 잊어버린 거야. 형?”
“응?”
반문하자 같이 있던 사라가 조그만 미소를 더했다. 어쩐지 눈이 부시다.
“오늘 생일이라면서요.”
“별것 아니지만 선물이야.”
아이오로스는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 생일이라니. 굉장히 아득하게 느껴지는 단어다. 설마 이제 와 생일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됐다. 어쩐지 별별 소문이 다 도는데도 아무 변명도 안 하더라니. 왠지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좋기도 했다. 결국 모든 일이 자신을 위함이었으니까. 참지 못하고 아이오로스는 낮게 웃었다. 나지막한 소리가 퍼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옆에서 허탈해하는 므우의 한숨 소리가 울렸다.
“……이런 거면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므우의 중얼거림엔 원망이 잔뜩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폭주하면서 이래저래 별꼴을 다 보인 게 창피한 모양이다. 덕분에 있는 대로 죄책감이 찔린 사라와 아이오리아가 제각각 시선을 피했다. 이어지는 말도 해명이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깝다.
“……아니, 뭐, 중간에 타이밍을 놓쳐버려서요.”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
그 일이 커지게 된 원인 중 하나인 아이오로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므우의 어깨를 호쾌하게 두드렸다. 사실 여기서 잘못하면 긁어 부스럼이라 내심 초조하긴 했다.
“너무 그러지 마, 므우. 어쨌든 걱정했던 일이 없어서 다행이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떨떠름한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므우는 합리적이었다. 더 파고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인정했는지─그도 아니면 그냥 포기했는지─ 곧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이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에 아이오리아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아이오로스는 못 본 척했다.
겨우 분위기가 진정될 때쯤, 느닷없이 사라가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아이오로스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마주친 다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걸 잊었는데요.”
“응?”
“변태 같으니까 앞으로 미행은 하지 말아 주세요.”
“………….”
거기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샤카는 문득 처녀궁 안으로 들어온 기척을 느꼈다. 매우 그립고, 사랑스럽고, 그럼에도 지금만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기척이다. 사라. 그 이름을 떠올리며 샤카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과는 반대로 사라는 자신이 있는 곳까지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냥 몰래 도망칠까? 불현듯 충동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샤카가 할 수 있던 건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있던 것뿐이었다.
“샤카?”
곧 사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있었네요. 므우가 샤카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던데요.”
평온한 사라의 목소리에 입안이 꺼끌꺼끌해진다. 무엇 하나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허나 모른 척 무시하는 건 더 힘들었다. 샤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어딜 말이냐.”
“아이오로스랑 세이야의 생일 파티요.”
“……응?”
너무 뜻밖의 화제라 샤카는 무심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확실히 아이오로스의 생일이 이맘때였던 것 같기도 했지만……, 갑자기 왜 그 얘기가?
그런 자신의 심정도 모르고 사라가 계속 주절주절 떠들었다. 어딘가 들떠있는 것 같은 건 형제들의 생일인 탓일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라가 세이야는 물론이고 아이오로스도 소중히 여기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원래는 형제들끼리만 조촐하게 축하하려고 했는데 므우가 어차피 생일이 연일이니 같이 축하를 하자고 해서요. 그러다 보니 다들 모이게 돼서 결국 대대적으로 파티가 열리게 생겼어요.”
“…….”
“아직은 준비 중이지만 잇키도 왔고, 결국은 골드 세인트들은 다 모이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이왕이면 샤카도 데려오라고 므우가…….”
중간에 부자연스럽게 말이 끊겼다. 아무래도 자신이 대답이 없는 걸 거부라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은 사라가 빤히 시선을 보낸다. 날카롭지도 않은 시선이 샤카를 꿰뚫었다.
샤카는 그제야 어떤 변명이라도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라가 한숨을 섞어 타박해 왔다.
“……파티가 싫어도 동료니까 축하의 말 정도는 해주세요. 아이오리아가 형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이 며칠간 그 고생을 했는 걸요. 아, 물론 그건 파티랑은 별 상관이 없지만요.”
“……음?”
샤카는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에두른 말이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어설프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의 추측이 뇌리에서 구체화된다. 사실 이건 올바른 경로를 통한 가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희망에 가까웠다.
“그럼 아이오리아와 데이트라는 게…….”
조심스럽게 묻자 즉답이 돌아왔다.
“생일선물을 사러 간 거죠. 벌써 여러 번 얘기하는 것 같은 데 아이오리아랑 사귀는 건 아니에요.”
순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화가 토막 난다. 침묵 사이에 약간의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그럼에도 사라가 다시금 힘주어 말한다.
“……아이오리아랑 사귀는 건 절대 아니에요.”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자신이 바보 같았다. 뭘 이런 사소한 일에, 뭘 이런 사소한 오해로. 동시에 샤카는 환희했다. 스스로가 한심하다 싶었지만 넘치는 감정을 막진 못했다. 아무래도 좋다. 이 감정 앞에서는 모든 것이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느슨히 풀어지는 입가를 막지 않은 채로 샤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라의 시선이 자신을 뒤따라온다.
“가자.”
“네?”
“파티에 가자고 하지 않았느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곧 희미한 웃음이 답으로 돌아왔다. 사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워지는 온기. 순간 아프로디테의 충고─라기보다는 험담─이 머리를 스쳤지만 샤카는 그를 떨쳐버렸다. 어쨌건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둘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덤 1.
“그런데 그때 무슨 대화를 했습니까?”
“아, 그거요? 실은…….”
나란히 걷고 있던 아이오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사라는 의아함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이오리아?”
조그맣게 이름을 부르면 남자가 몸을 살짝 숙였다. 귓가에 닿는 숨이 간지럽다. 사라는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쨌건 이 남자가 괜히 이러진 않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말이 속삭여졌다.
“형이랑 므우랑 샤카가 미행하고 있다.”
“………….”
어쩐지 뒤가 너무 시끄럽더라니. 사실 다들 얌전히 있었다면 그게 더 신기하긴 했겠다. 사라는 들릴락 말락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단순히 체념하는 것도 지쳐버렸다.
어떻게 할까? 하고 아이오리아가 시선으로 물어온다. 잠깐 고민하던 사라는 단호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모른 척하죠.”
“그래도 괜찮을까?”
“괜히 아는 척했다가 동행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미행하려면 거리를 둬야 할 테니 자세한 건 모르겠죠.”
“그건 그렇다만…….”
돌아오는 대답이 어정쩡하다. 아이오리아는 수긍하면서도 어딘가 떨떠름해 하는 모습이었다. 슬쩍 곁눈으로 살피면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오리아?”
다시 이름을 부르자 이번엔 남자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놀래주고 싶었다지만 굳이 데이트라고 변명할 건 없었잖아.”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지난 13년간 편견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덕분인지 아이오리아는 자신에 관한 불합리한 일이라면 곧잘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불평하는 건 거의 처음 보는지라 사라는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혹시,
“마린 때문에 그래요?”
“뭐, 뭣?!”
삽시간에 남자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토마토와 경쟁하기 딱 좋은 모습이 된 아이오리아를 보고 사라는 호호호 즐겁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제대로 설명할 테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마린 얘긴 누구에게 들은 거야!”
“그야 세이야한테죠.”
“세이야……!”
아이오리아가 세이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사라는 못 들은 척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라는 것으로.”
“호오.”
“과연, 마린이란 말이지.”
예상 밖의 정보에 므우와 아이오로스가 반짝 눈을 빛낸다. 사정 봐주지 않고 삽시간에 비밀이 까발려진 아이오리아는 사라를 원망하며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물론 아이오리아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덤 2.
파티 도중,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아이오로스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세이야를 발견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흥분한 것인지 소년의 뺨이 붉다. 아무리 지상을 구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이럴 때는 영락없는 그 나잇대의 소년으로 보인다. 아이오로스는 가까워진 세이야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주역이 빠져나와도 괜찮은 건가?”
조금 장난을 섞자 소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는 아이오로스야 말로 여기 있잖아.”
퉁명스럽게 대답한 세이야가 옆에 나란히 섰다. 인종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세이야와 아이오로스는 거의 머리 하나 가까이 차이가 났다. 턱밑에서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문득 아이오로스는 자신과 세이야가 친형제 같다는 아이오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어쩐지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오리아라는 친동생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같은 성좌를 가진 자신들은 또 다른 의미의 형제이니까.
반쯤은 무의식으로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 데 느닷없이 세이야가 고개를 들었다. 불빛에 비치면 강하게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본다.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 아이오로스.”
“아, 너도. 생일 축하해.”
두 주역主役은 빙그레 마주 웃고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잠시 기분 좋은 침묵이 흘렀다. 자신들이 빠진 걸 모르는지 다들 깔깔 웃으면서 파티를 즐기고 있다. 이걸 보면 정말로 자신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모인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냥 놀고먹을 핑계가 필요했던 거 아닌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떠들썩함은 좋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세이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소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렇게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래?”
하긴 돌이켜 보면 자신도 이런 식으로 생일 파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다. 이전까지는 생일이라고 해봤자 동생인 아이오리아와 주변의 몇몇이 축하의 말을 해주는 게 다였다. 세이야도 고아라고 했으니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슌들이 있다지만 그들이 형제라고 알게 된 것은 최근이라고 했고.
생각하면 안쓰러운 기분이 들어 아이오로스는 세이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소년은 뜻밖에도 웃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러운 것처럼.
“이전에는 세이카 누나나 마린 씨가 축하해 주는 게 다였거든.”
“……그런가.”
아이오로스는 상념을 떨쳤다.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데 동정하는 건 굉장한 실례다. 그래서 그는 그저 따스한 미소만을 세이야에게 보냈다.
“그래서, 세이야. 그 마린이란 세인트는 어떤…….”
“형!!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어느새 눈치채고 달려온 동생의 말은 당연히 아이오로스에게 닿지 않았다.
리아마린 좋아해요<
'Kurumada > Under your na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i.14 머나먼 시공 속에서 (2) | 2017.02.17 |
---|---|
Epi.13 어느 밤의 선물 (2) | 2016.12.10 |
Epi.11 오늘은 내가 요리사 (2) | 2016.10.25 |
Epi.10 뭐라도 좋으니 아무도 울지 않는 세계를 원해 (2) | 2016.10.05 |
Epi.9 오해와 질투 (2) | 2016.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