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추위가 도래했다. 입을 열면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뽀얀 입김이 나왔다. 해도 짧다. 늦은 오후인데도 사위가 컴컴하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추워졌네.”
의미 없이 텐마가 말을 흘린다. 말투는 지독히 열없고 얄팍했다. 옆에 있던 야토도 여상히 말을 받았다.
“벌써 12월이니까. 어떤 가게는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도 세웠더라.”
대단할 것 없는 문장이었으나 뚝, 부자연스럽게 텐마의 걸음이 끊어졌다. 덩달아 야토와 유즈리하의 다리도 멈췄다.
“12월?”
세상에 종말,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하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모양새가 기름칠 안 한 고철덩어리 같다. 왜 저래? 야토와 유즈리하는 서로 눈짓했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늘이 28일이니 내일모레면 12월이지. 그게 그렇게 놀랄 인인가.”
“어떻게 넋을 빼놓고 다니면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냐.”
야토 쪽은 명백한 비꼼이었으나 텐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언제 그렇게 지났나 싶어서!”
말끝에 정체모를 다급함이 섞였다. 야토와 유즈리하는 얼굴을 마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텐마에게 무언가 있다는 건 분명했지만 그것을 억지로 파내지 않을 만큼의 아량이 두 사람에겐 있었다.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일상적인 야토의 타박과 쓴웃음 섞인 유즈리하의 동의를 받으며 텐마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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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텐마와 헤어지고 둘은 나란히 걸었다. 불현듯 야토가 말을 꺼낸다.
“저녀석 분명 곧 자기 생일인 거 까먹고 있었지?”
“그런 것 같던데.”
유즈리하는 쉽게 수긍했다. 야토가 알기 쉽게 한숨을 내쉰다. 어처구니없음과 미약한 안도가 담긴.
“바보아냐.”
덧붙인 문장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어떻게 그날을 대처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야토를 아는 유즈리하에게는 적어도.
야토는 텐마를 분명히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있지만 동시에 자격지심 또한 느끼고 있다. 본래의 솔직하지 못한 성격 또한 겹쳐 감사라든가 사죄라든가 하는 종류의 것은 꺼내기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축하는 꼭 해주고 싶은 모양이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의 유즈리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자의 우정은 귀찮군.’
그럼에도 자기모순이 결코 삐딱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즈리하는 꽤 높게 처주고 있지만 당연히 야토는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지?”
유즈리하는 모른척 다음을 촉구했다. 즉각 야토가 입술을 내민다. 어딜봐도 불만스러운 얼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둥근 귀가 붉다. 답이 뻔히 나타나는 터라 유즈리하는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푸슬푸슬 웃었다.
“대충 아무 선물이나 던져주면 되지 뭐가 있어.”
역시나. 너무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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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리하의 편한 생각과는 다르게 야토는 며칠 남지 않은 기간동안 꽤나 골머리를 앓았다. 선물을 해주냐 안해주냐 든가 혹은 어떻게 건네주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야토는 가끔 텐마의 태연함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를 싫어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다. 방법도 마찬가지다. 실컷 부끄러워하며 주든 부러 퉁명을 가장하며 주든 어짜피 자비로울 정도의 둔함으로 텐마는 기쁘게 선물을 받을테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야토가 고민했는가. 바로 무엇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야토와 텐마의 사이는 그리 얄팍하지 않다. 순순히 인정하기엔 짜증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분명 서로 손에 꼽을 정도로 친한 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피상적인 거야 알지만 하나하나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분명 무리다.
물론 텐마라면 쓰레기를 주는 정도만 아니라면 선물이 무엇이든 기뻐할 것임을 안다.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주는 사람의 마음에.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정말 아무 거나 줄 수도 없는게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당연히 고민하게 된다. 덕분에 야토는 복잡한 심정으로 인터넷에 검색해보기도 했다. 나온 게 다 광고라도 되는지 똑같은 내용인데다 대개 연인에게라는 전제가 붙어 곧 질색하며 꺼버렸지만.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취향이란 게 없어서. 생각해보니 취미도 없다. 겨울이니 무난하게 목도리 같은 것도 생각해봤지만 어쩐지 너무 친밀한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진짜 어쩌지…….”
무심코 혼잣말이 새어버렸다. 그에 옆에서 뒹굴뒹굴 놀고 있던 레굴루스가 반응한다.
“뭐가?”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선물을 정했으려나. 분명 안 정했겠지. 야토는 기대도 안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선물 말이다, 선물.”
“선물? 누구한테?”
반응이 미묘하다. 야토는 미심쩍은 눈길로 친우를 쳐다보았다. 레굴루스의 무구한 눈빛이 그대로 돌아온다.
“누구긴 누구야. 텐마지.”
“어? 텐마한테만? 나도 줘!”
“뭐?”
이쯤되니 야토도 뭐가 문제인지 알아챘다. 설마 이 녀석…….
“너, 다음 주에 그 녀석 생일인 거 몰랐냐?!”
침묵. 잠깐의 그로기 상태 후 레굴루스가 드물게 경악했다.
“생일?!!!”
“그래!!”
이 자식! 진짜 몰랐구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어쩌다보니 십년지기처럼 지내고 있지만 레굴루스와 텐마는 서로 알고 지낸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생일따위 직접 물어보거나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알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충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굴루스는 곧 눈을 반짝이며 야토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영 불안하다. 레굴루스가 저렇게 눈을 반짝일 때는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는데. 그래도 야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친구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서있을까. 야토는 주방에 서있는 레굴루스와 유즈리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밀려오는 데자뷔, 조차 아니다. 유즈리하가 텐마로 바뀌면 바로 예전에 있었던 재앙의 재현이다. 역시 지푸라기따윌 잡는 게 아니었어.
쿠키―원래는 케이크였으나 겨우겨우 절충해서 쿠키가 되었다―를 구울 준비를 하는 둘을 바라보며 야토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되었든 구울 수 밖에 없으니 열심히 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전의 참상을 모르는 유즈리하가 퍽 침착하게 있다는 것 정도일까. 유즈리하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레굴루스보단 나을테니 야토가 기댈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아니, 그야 물론 레굴루스보다 못하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겠지만.
“시작하자!”
언제나 기세만은 좋게 레굴루스가 소리높여 선언한다. 옆에서 유즈리하가 미소로 그의 말을 받는다. 야토도 마음을 굳히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기에 과정은 굳이 서술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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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 실행 당일, 야토와 레굴루스는 점심시간을 노려 텐마를 납치했다. 장소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있는 체육관 뒤뜰. 또다른 실행범 유즈리하는 이미 그곳에서 자리를 깔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던 텐마는 자리에 앉혀져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그리 화를 내기보다 먼저 불쑥 꾸러미가 들이밀어진다. 에……. 얼빠진 신음이 흐른다. 포장을 봐서는 선물인 것 같은데 자신에게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게 뭐야. 당연한 의문에 야토가 한심하단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시 까먹고 있었구만, 이 멍청이가.”
정정. 대답한 게 아니라 힐난했다. 다른 사람이면 화냈겠지만 상대가 야토라 텐마는 그냥 넘어갔다. ―누구에게인진 모르겠지만―안타깝게도 친우의 삐딱한 태도엔 적응한 지 오래다.
“오늘 무슨 날이야?”
일단 텐마는 야토를 빼놓고 남은 둘에게 물음을 던졌다. 유즈리하와 레굴루스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걸린다.
“그래, 아주 중요한 날이지.”
“생일 축하해, 텐마!!”
아. 웃긴 말이지만 텐마는 그제야 정말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냈다. 이건 진짜 야토한테 멍청하단 소릴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나마 변명을 해보자면 요새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 없었다는 것 정도일까.
겨우 상황을 파악하자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눈물도 나왔다. 왠지 너무 찡해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다. 자신조차 까먹고 있던 생일을 누군가가 챙겨주다니. 새삼스럽지만 너무 기뻐서.
“고마워!”
텐마는 만면의 미소로 친구들에게 화답했다.
“그런데 텐마. 저녁에 시간 돼?”
“왜? 나 오늘 알바 있는데.”
“취소해! 시지포스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단 말이야!!”
“아니, 그렇게 말해도…….”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레굴루스.”
“그래, 말이 되는 소리 좀 해라! 애초에 꼭 오늘만 날인 건 아니잖아!”
“하지만 시지포스가 오늘 꼭 데려와야 한다고, 납치라도 하라고 했는걸.”
“““뭐?”””
애써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어 넘긴 말이 몇 시간 후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찾아온 시지포스에 의해 현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