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조용했다. 이따금 시곗바늘 소리가 울리고 그 사이로 타자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들렸다. 숨이 막힐 듯한 깊은 정적. 그런 침묵 속에서 마니골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시드.”
“뭐냐.”
“지금 몇 시냐?”
“6시 57분.”
“우리 퇴근 시간은?”
“6시 20분.”
“근데 우리가 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일이 남았으니까.”
따지는 듯한 질문에도 엘시드는 미동하지 않았다. 언제나 날카로운 검처럼 약간의 휘어짐도 없는 녀석이다. 원래라면 존경해야 할 부분이지만 가끔은 얄미워지기도 한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는. 조금 망설이긴 해도 담담하게 사실만을 고하는 동료의 대답에 마니골도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러니까 왜 또 야근이냐고!!!!”
자그만 공간에 마니골도의 목소리가 시원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타박도 없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일일이 반응하기보단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다 끝마치고 일찍 퇴근하는 편이 낫다는 걸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형식적으로라도 대꾸해주던 엘시드도 말이 없자 마니골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자신도 이럴 바에는 손을 움직이는 게 낫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리 성실한 성격이 아니다 보니. 당장 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미루고 싶어지니 문제다.
결국 마니골도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대로 책상 위로 엎드렸다. 이대로 5분만, 아니 10분만. 조금만 쉬다 다시 일해야지.
하지만 하늘은 마니골도의 노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나 보다. 이때껏 가만히 있던 아스프로스가 갑자기 일어나 마니골도와 엘시드 쪽으로 걸어왔다. 마니골도는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
“엘시드. 보고서는?”
대답에 앞서 엘시드는 흘끗 마니골도를 곁눈질했다. 누가 오든 말든 나 몰라라, 하고 누워있는 꼴이 한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주저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을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광속. 엘시드는 깔끔하게 동료를 배신했다.
“마니골도가 이 모양이라.”
“야 임마!!”
느닷없는 고자질에 마니골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엘시드에게 항의하는 것보다 아스프로스가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할 수 있지?”
아스프로스가 웃는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클립보드로 세게 책상을 내려친 주제에 미소만은 일품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이건 뭐 웃는 얼굴에 압사당할 판이다. 순간 반항심이 솟아오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리 행동했을 후 어떻게 될지 계산은 빨랐다. 지위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달렸던 마니골도는 얌전히 아스프로스에게 굴복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좋아.”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어 보이자 아스프로스가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입속말로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저 녀석 갈수록 성격이 나빠지고 있다는 말은 목숨이 아까우니 차마 말할 수 없었다. 25년은 생을 즐기기엔 너무 짧은 나이가 아니냐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마니골도는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헌데 그러자니 이번엔 배가 문제다.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으로 울리기 시작하는 배에 마니골도는 두 번째로 좌절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시간이었지.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일찍 퇴근하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다. 너무 열심인 나머지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스프로스의 기색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핀 뒤 마니골도는 다시 엘시드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저녁이라도 먹으면 안 되나?”
“그럴 시간에 일을 해라.”
“뭐라도 주문하면?”
“말이 되는 소릴 해.”
단호한 거절에 마니골도는 혀를 찼다. 아니 밥 먹는 게 죄냐. 몰래 빠져나갔다 올까. 그 순간, 뭔가가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클립보드다. 그것도 내용물이 꽉 찬 두툼한 클립보드. 잘못 맞으면 기절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마니골도는 차마 불만을 터트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네 녀석들. 빨리 손을 움직여라.”
저걸 던진 아스프로스의 모습이 무시무시했으니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웬만한 미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사한 주제에 등 뒤로 보이는 어두운 오라는 그야말로 살의 맥스다. 조금만 수틀렸다가는 살인도 불사할 것 같은 모습에 마니골도와 엘시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우와. 아스프로스 녀석 새카매졌잖아.”
“…………일하지.”
마니골도는 동료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지포스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야근 확정이다. 레굴루스에게 전화해야겠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뺨을 때렸다. 차가운 감촉이 멍한 머리에 좋은 자극이 된다. 시지포스는 의미 없는 숨을 한번 내뱉고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신호가 가고, 짧게 벨 소리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에 익은, 명랑한 조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시지포스?」
“아, 레굴루스. 아무 일 없니?”
「응! 물론!」
전화기 너머로 짧은 웃음이 흘렀다. 그에 시지포스는 조금 안도하고, 미안해하며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저, 레굴루스.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늦을 것 같다.”
「어? 야근이야?」
“그래. 저녁 챙겨 먹을 수 있겠니?”
「당연하지!」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하지만 시지포스는 역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레굴루스도 이제 15살이니 혼자 밥 한 끼 못 챙겨 먹겠느냐 하겠지만 시지포스의 걱정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레굴루스는 가사(家事)에 서툴렀다. 아니, 그냥 서투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절망적이다.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음식을 데우는 것뿐인데도 냄비가 타고 접시가 깨졌다. 본인이 정신을 딴 데 놓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이쯤 되니 전자레인지를 돌리게 된다면 혹시 전자레인지가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심하란 말인가.
“정말로 괜찮아?”
여차하면 집에 다녀 올 각오로 조심스럽게 묻자 실로 상쾌한 답이 돌아왔다.
「응! 텐마가 있으니까!!」
“………….”
동문서답 같은 말에 시지포스는 침묵했다.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아서이다. 나중에 텐마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주지 않으면. 시지포스는 동정을 가득 담아 조카의 친우를 떠올리며 저녁은 꼭 챙겨 먹으란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텐마!!”
“응?”
전화 받는다고 거실로 나갔던 레굴루스가 쪼르르 달려와 텐마는 수학책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 걸 보고 있던 덕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대체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는지. 그냥 나중에 알바피카에게 전화해야지.
자꾸 딴 데로 새려는 생각을 막으며 텐마는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이유 없이 오한이 들었다. 숙제나 할 것이지 갑자기 또 왜.
“오늘 시지포스 야근인가 봐. 같이 저녁 먹자!”
잔뜩 뭉그러트린 애매한 말이었지만 텐마는 금방 속뜻을 알아챘다.
“……그거 저녁 해달란 소리지?”
정답이었는지 레굴루스가 헤헤 웃었다. 능청스러운 모습에 텐마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내가 숙제하러 왔지 밥해주러 왔냐고. 하지만 내버려두자니 굉장히 찝찝했다.
집적 겪어본 바가 있기에 텐마는 레굴루스가 부엌에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초토화가 되겠지, 단지 초토화라고 표현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되면 굉장히 미안하다. 레굴루스가 아니라 시지포스에게.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겠다, 텐마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단한 건 못 해줘.”
“괜찮아!”
“……그래, 너는 괜찮겠지.”
요리를 해야 하는 건 이쪽이라고. 이유 있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텐마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자기 집처럼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슬프다.
일단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뒤에서 계속 레굴루스가 알짱거린다. 얜 또 호기심은 많아서. 또 뭘 건드렸다가 사고라도 칠까 싶어 텐마는 일부러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휙 돌렸다.
“얌전히 앉아있어!”
“……쳇.”
혀를 차면서도 레굴루스는 별말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하긴 바보도 아니고, 제가 부엌에 들어설 때마다 무슨 난리가 벌어졌는지 다 봐왔으니 얌전히 앉아있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기만 알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서 문제지.
레굴루스가 가만히 있는 걸 확인하고 텐마는 다시 냉장고를 뒤졌다. 시지포스가 해 놓은 밑반찬이 있으니까 딱히 이것저것 할 필요는 없겠다. 그냥 달걀말이나 하나 할까. 대충대충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꺼내 조리대로 가던 텐마는 문득 의문을 하나 떠올렸다.
“저기, 레굴루스.”
“응?”
야채를 잘게 썰고 달걀을 풀어 간을 하고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까지 올린 텐마는 팬이 달궈지길 기다리며 레굴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시지포스는 저녁 어떻게 해결해?”
으음~하고 레굴루스가 앓는 소리를 낸다. 대답이 미뤄지는 사이 텐마는 팬 위로 야채를 넣은 달걀을 투척했다. 얇게 편 탓인지 금방 기포가 올라오며 달걀이 익는다. 달걀은 참 좋단 말이지. 요리하기도 간편하고 여러 가지를 만들 수도 있고. 멍하게 아무거나 떠올리며 달걀을 착착 접는데 그제야 레굴루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밖에서 사 먹지 않을까?”
“그래?”
그것밖에는 답이 없겠으나 텐마는 조금 걱정됐다. 일부러 퇴근 시간까지 미뤄서 일을 한다는 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쌓여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밥 먹을 짬이라도 있을까. 설령 먹긴 먹더라도 급하게 대충 때우는 건 아닐지.
따지고 보면 남이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는 텐마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친구의 삼촌이고, 그동안 나름대로 친해진 사이다 보니 밥도 굶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기분이 영 그랬다. 게다가 시지포스가 최근 들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 챙겨주고 있으니 더욱더. 괜히 빚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찜찜함이 두 배가 됐다.
다 익은 달걀말이를 꺼내 조금 식길 기다렸다가 작게 썰고 다른 반찬들도 꺼내 식탁에 올렸다. 수저는 레굴루스가 챙겼다. 암, 그 정도는 해야지. 마지막으로 밥을 한가득 푸면 저녁 완성이다. 레굴루스가 환호성을 질렀다.
“나 시지포스 요리 다음으로 텐마 요리가 좋아!”
“네에, 네에.”
상대가 여성이었으면 가슴에 꽂힐 말이었을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텐마는 평범한 남자애였다. 거기에 레굴루스를 친구 이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때문에 대충 대답하자 레굴루스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일순이었고 곧 정신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면서도 텐마는 레굴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 보이는 표정과 분위기가 달라 곧잘 잊곤 하지만 시지포스와 레굴루스는 똑 닮았다. 덕분에 어느 한쪽을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아마도) 굶고 있을 시지포스가.
텐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솔직히 제가 왜 이런 거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을 무시할만한 성격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텐마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레굴루스.”
“왜?”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땅을 파고 들어가다 못해 코큐토스에 도달하기 직전인 부서 상황을 보며 시지포스는 탄식을 삼켰다. 아스프로스에게 압박받은 이후로 다들 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공기가 너무 가라앉아 음울하게 보일 지경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우울한 분위기에 감화돼 오히려 느긋하게 일할 때보다 손이 느려지는 것 같다.
뭔가 분위기를 풀만 한 게 필요하다. 사실 해결할 사람은 자신이나 알데바란정도 밖에 없지만 저런 상태의 아스프로스는 상대하기 꺼려졌다. 예전부터 엄청 엄격하고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운 건 여전하단 말이지. 그래도 애들 밥은 먹일 것이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데 옆에서 알데바란이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말없이 슬쩍 눈짓만 하자 알데바란이 오묘한 표정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저녁이고 밖에 나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환기를 시킬 겸 문은 활짝 열려있는 채였다. 도려내진 것 같은 네모난 공간으로 어둑한 복도가 보였다. 그리고 이 근처를 배회하는 조그만 두 인영 또한.
“……?”
누구지? 왠지 낯이 익어 시지포스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복도에 불이 꺼져 있어 상대적으로 어두웠기에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익숙해져 금세 세부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체를 파악한 순간, 시지포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굴루스?! 텐마?!”
갑작스러운 외침에 사방에서 시선이 집중된다. 하지만 시지포스는 신경 쓰지 않고 밖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레굴루스와 텐마도 쪼르르 다가왔다.
“시지포스!!”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이다. 평소라면 그런 모습이 귀여웠겠지만 지금은 너무 얼이 빠져 시지포스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여긴, 어떻게?”
간신히 그것만 묻자 텐마가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빛냈다.
“나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니까 출입증 있거든. 뭐 놓고 왔다고 말하니까 들여보내 주던데?”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도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끙끙거리는 사이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드는 중이다. 그래, 이 상황에서 뭘 어쩌겠어. 시지포스는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허탈해하는 시지포스를 무시하고 다들 레굴루스와 텐마를 둘러쌌다. 뭔가 청문회 같은 모양새다. 상대가 아직 어린 소년들이라 영 멋없는 모양새였지만. 아이들은 성격이 성격인지라 당연하게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건 뭐야? 하는 얼굴이다.
기묘한 대치 속에서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개중 성격이 온화하고 어린아이들에게 익숙한 알데바란이었다.
“음, 그래서. 너희들은 여긴 무슨 일로?”
그 말에 왜인지 소년들이 반색한다. 시지포스를 비추는 눈동자가 심히 반짝였다.
“그래! 시지포스! 저녁 먹었어?”
“도시락 싸왔거든!!”
도시락이란 소리에 모두의 안색이 바뀌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다들 배고프고 불쌍한 자들이다. 특히 마니골도가.
도대체 얼마나 배고팠던 건지 마니골도의 눈빛이 사나웠다. 여차하면 상사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강탈해 갈 것 같은 몰골이다. 그를 알아채고 텐마가 황당하단 표정을 짓는다.
“저기, 많이 만들어 왔거든……?”
그리곤 다들 나눠 먹을 수 있을 거라며 도시락을 보여줬다. 텐마의 말대로 시지포스 혼자 먹기에는 심히 많아 보이는 양이다.
슬쩍 아스프로스의 눈치를 살피자 뜻밖에 심드렁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모양새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건가 보다. 시지포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제대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고맙다, 두 사람 다.”
라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도시락 파티가 벌어졌다. 메뉴는 주먹밥과 간단한 밑반찬 몇 가지였지만 주린 속에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중간 중간에 모양이 엉성한 주먹밥은 틀림없이 레굴루스의 작품이겠지. 소년들이 엉성한 솜씨로 도시락을 만들었을 걸 생각하면 흐뭇해진다.
“자, 여기.”
뭘 이렇게 준비해 왔는지 텐마가 보온병에 넣어왔던 국을 따라주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했지만 텐마는 어느새 엘시드에게 다가가 국을 따라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소년의 호의에 엘시드가 어색한 몸짓으로 그릇을 받는다. 알데바란은 잘 알고 있는 레굴루스와 얘기를 하고 있고 아스프로스는 홀로 여유가 넘친다. 마니골도로 말할 것 같으면 말도 없이 혼자 주먹밥 하나를 홀라당 집어 먹고 텐마에게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어이, 꼬마. 요리 못하는 거 아냐? 이거 싱거운데?”
“그럼 먹지 마!!”
울컥했는지 텐마가 제법 매섭게 쏘아봤다. 하지만 마니골도는 그 정도야 가소롭다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어른의 표본이지만 저게 마니골도 나름의 호의 표시라는 걸 알고 있는 시지포스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일일이 간섭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는 사이 레굴루스도 도시락에 손을 뻗는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단 한 명, 깜짝 놀란 텐마가 황급히 레굴루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넌 아까 저녁 먹었잖아!”
“에~”
충격받은 얼굴로 레굴루스가 텐마를 바라본다. 저 아이도 어리광이 많이 늘었구나, 하는 생각이 멍하니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중에 야식 만들어 줄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텐마를 보고 시지포스는 마음속으로 사죄했다. 역시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반드시. 때마침 시지포스의 속을 읽은 것처럼 아스프로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부인이 아니라 며느리였나?”
“……그런 말 하지 마.”
“아니면 조카의 주인인가? 목줄을 단단히 채운 것 같은데.”
“…………………….”
시지포스는 아무런 부정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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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6218자, 다같이 떠들썩한게 쓰고 싶었습니다
아르바이트가 없을 때 텐마는 종종 레굴루스의 집에 놀러갑니다. 야토도 같이 가는 일이 많습니다. 일단 목적은 숙제인데 그러다 노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게 함정. 놀러갈 날에는 보통 저녁도 같이 먹습니다. 요리는 대개 시지포스가, 텐마와 야토는 조금 도와주는 정도. 레굴루스는 상기의 이유로 다들 말려요(웃음)
잠깐 요리 얘기를 하자면 제 설정에서 시지포스는 능숙한 편, 텐마는 그렇게까지 잘하는 건 아니고 소박한 집밥 정도. 그렇지만 한 가지 재료로 여러 요리를 만드는 건 텐마가 더 잘합니다. 생활밀착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