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목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야토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지 익숙한 얼굴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하얗게 빛나는 하복 셔츠, 생기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 거의 몇 달만인 것 같은 그리움. 울컥, 이유도 없이 눈물이 솟으려 한다. 꼴사납긴. 울음을 참기 위해 야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즈리하.”
오랜만. 많은 말은 못하고 살랑살랑 대충 손을 흔들자 유즈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쉼표. 그래서? 맥락도 없이 질문이 가볍게 던져졌다.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토는 이내 아까의 질문을 떠올렸다. 아, 그거라면. 야토는 대답 대신 운동장 쪽을 가리켰다. 유즈리하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그쪽을 향한다.
원래 운동장엔 남는 시간─혹은 넘치는 혈기─을 주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곧잘 모여들곤 했지만 한여름에 가까워지는 지금은 사람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얼마 없는 학생들도 운동자 가장자리 나무 그늘에 앉아서 별 소용도 없는 뜨거운 바람이나 맞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 와중에 땡볕과 관계없이 운동장 한가운데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자가 둘. 입 아프게 말해서 무얼 할까, 텐마랑 레굴루스다. 즉, 야토는 둘에게 억지로 끌려와 여기 앉아있게 됐던 것이다.
아, 과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유즈리하가 관람 모드로 들어간다. 야토도 억지로 말을 잇지 않고 다시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처음엔 평범한 축구로 시작했던 것 같은 두 사람의 결투─이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잠깐 사이에 무술대결로 변해있었다. 아직도 공은 차고 있으니까 축구는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움직임이 모 절의 제자들이 축구를 하는 어떤 중국 영화랑 비슷한 수준이다. 아니, 그쪽은 CG기라도 했지 너넨 뭐냐. 팔팔하기가 횟감 수준이구만.
“저 녀석들은 여전하군.”
비슷한 심정인지 유즈리하의 목소리에도 감탄이 반, 어처구니없음이 반이었다. 어쩌면 질렸을지도 모른다. 하긴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야토는 자신 옆에 앉은 유즈리하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몇 달 전과 그다지 변한 게 없는 얼굴엔 목소리와 달리 어쩐지 즐거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흐뭇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떠올리면 원래 유즈리하는 어린 친구들의 활기참을 좋아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찰칵, 갑자기 시선이 맞았다. 야토는 놀라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뭐, 뭐야?! 제멋대로 내뱉어진 목소리가 튀어 오른다. 대조적으로 유즈리하는 어디까지나 차분했다.
“해서, 둘 다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열을 올리는 거지?”
“………………아, 저거. 아이스크림 내기거든.”
그래, 분명 처음은 더워 죽겠다는 텐마의 불평 하나로 시작된 가벼운 내기였다. 그게 지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성격과 맞물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래서야 본말전도가 아닌가 싶지만 두 사람과 어울리면서 거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야토는 그냥 내버려 뒀던 것이고. 물론 자신까지 끌어들여 귀찮게 한 보복은 별도의 이야기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꼭 저 녀석들은 사람을 귀찮게 한다니까. 이쪽이 얼마나 참아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금방 상황을 잊고 구시렁대자 옆에서 가벼운 웃음이 흩어졌다. 그 소리에 야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초승달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너희들은 여전하군.”
아까 한 말과 같지만 전혀 달랐다. 목소리에 배여 있는 깊은 즐거움과 기쁨.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 야토는 멍하니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가끔 여름의 바람이 불 때마다 빛 알갱이가 피부 위에서 춤춘다. 궤적이 반짝이는 잔상을 남기며 스러진다. 비현실적인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그립고, 굉장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유즈리하는 이따금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자신들을 동생으로 취급하곤 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들보다 2살 연상이고 어른스러운 데다 친남동생도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야토는 견딜 수 없는 감각에 습격당했다. 자신은 그녀의 남동생이 아닌데. 남동생의 대신도 아닌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결코 그럴 수가 없는데. 남동생 대신 따위가 좋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은─
“야토!”
커다란 부름이 상념을 깼다. 어느새 승부를 낸 건지 텐마가 즐겁게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레굴루스는 퍽 불만 어린 얼굴이었다. 어느 쪽이 이겼는지는 그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결과 따윈 별 관심 없었던 야토는 건성으로 둘을 맞아주었다. 아랑곳 않고 텐마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내가 이겼지롱. 그러냐. 시큰둥하게 대답해도 헤헤헤 커다란 웃음이 돌아온다. 아무래도 의외의 부분을 제외하곤 둔하기 그지없는 이 친구는 야토의 상념을 전혀 눈치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의미 없는 공방에 유즈리하가 산뜻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 유즈리하.”
한창 승리를 만끽하던 텐마가 그제야 의외의 내방자를 알아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진짜? 열심히 투덜대던 레굴루스도 합류한다. 오랜만이다, 둘 다. 여상한 대꾸에 어느 쪽에서라고 할 것 없이 즐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신나게 떠드는 모습을 보니 평소의 배 이상으로 텐션이 오른 모양이다. 대화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공기를 뒤흔든다. 사이좋기는.
잠시 셋의 상호작용을 지켜보고 있던 야토는 이내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셋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무언으로 전해지는 질문에 야토는 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래서, 매점에 갈 거냐?”
“오, 오우?”
텐마가 어정쩡하게 대답한다. 그를 반쯤 흘려 넘긴 채 야토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힐끔 눈동자만 움직였다.
“……유즈리하, 너는?”
그리도 뜻밖의 말이었는지 유즈리하가 드물게도 멍청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맺혔다.
“아니, 나는 됐어. 다음은 이동 수업이라.”
그럼 또 보자. 일어선 유즈리하가 별것 아닌 것처럼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그래. 다음에 봐! 천진한 답 사이로 살며시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고마워. 필시 자신의 귀에만 닿았을 말. 깨달은 순간 무심코 숨이 한 박자 멈췄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아득하다. 아, 젠장. 아득바득 이를 악물었지만 손이 닿았던 어깨가 홧홧했다. 전신에서 제멋대로 열이 오른다. 이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야토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매점으로 달려가려는 친구의 등 뒤로 고함쳤다.
“레굴루스! 내 몫도 사!!”
“엑?! 내가 왜!!”
“응원 값!!”
사실은 응원 따윈 전혀 안 했고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여기선 뻔뻔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별로 상관없긴 한데. 떨떠름하게 레굴루스가 수긍한다. 옆에서 텐마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그럼 빨리 가자. 재촉에 따라 세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목덜미에 땀이 엉겨 붙어 있었다. 멀리서 약하게 바람이 불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후덥지근한지라 숨만 더 콱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야토는 대충 땀을 훔쳤다. 몸 여기저기가 아직도 뜨끈뜨끈했다.
어느 오후, 여름 햇살이 그리도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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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699자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야토와 유즈리하. 인 것 같습니다. 아니, 근데, 이 카테고리 거의 1년 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