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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머나먼 곳의 웅성거림, 살금거리는 발걸음 소리,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 언제나와 같은, 아니 조금 다르다. 평소처럼 작은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세심한 부분까지 똑똑히 들리는 듯한.
멍한 머리를 억지로 일깨웠다. 간신히 눈꺼풀이 떨어졌다. 몇 번 깜빡이면 시야가 선명해진다. 사라는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위화감이 습격한다.
‘……내 방이 이렇게 컸나?“
천장이 높았다. 문도 멀리 떨어져 있다. 작진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았던 침대가 지금은 널찍하게 펼쳐졌다. 넘실대는 흰색은 그야말로 시트의 바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잠결 때문에 환상이라도 보고 있나 싶었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봐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진짜 이게 뭐지? 머리는 의문에 빠져있었지만 몸은 착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침대에서 내려가서 옷을 갈아입고…… 응? 사뿐, 이라는 의성어가 들릴 것처럼 가볍게 침대에서 내려가 졌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뛰어내렸다.
‘으응?’
시선을 조금 내리자 푸른색 카펫과 자신의 손이 보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이다. 앞발.
‘으으응??’
손을 움직인다는 감각으로 오른쪽 앞발을 움직였다. 천천히 들어 올려 발바닥을 보았다. 짙은 색 털에 둘러싸인 둥근 발과 그 한가운데 있는 말랑말랑한 핑크색 육구. 어딜 봐도 짐승의 발이다. 사라는 무심코 손, 아니 앞발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툭 튀어나온다.
‘엥?!!’
“컁?!!”
사라의 절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완벽하게 치환되었다.
불의의 사태에 습격당한 사라는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끝.
……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그래도 사라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있을 수 있었다. 전부 주변에 있는 비정상적인 인물들 덕분이다. 코스모니 뭐니 하면서 바위는 부수는 것 정도는 기본이고 광속으로 움직이거나 초능력을 사용하거나 하는 심지어는 산채로 지옥에 갔다 오거나 하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데 어쩌다 고양이가 된 게 무슨 대수라고. 게다가 원인도 대충 짐작이 가고 말이지.
문제는 그다음이다. 원인은 그렇다 치고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몰랐다. 가만히 있다고 돌아가는 건 아니겠고, 무슨 방법을 찾긴 찾아야겠는데…… 역시 이 몸으론 무리겠지?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곤 해도 말도 안 통할테고. 그냥 만나자마자 자신인 걸 알아봐 주는 일이 있……을 것도 같은데. 코스모인지 뭔지로. 그러나 사라는 이 모든 게 낙관적인 전망임을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스모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더라도 다들 둔하고 멍청해서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대놓고 깐 것 같지만 넘어가자.
거기까지 생각하던 사라는 귀찮아져서 사고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역시 답이 안 나올 때는 그냥 움직이는 게 최고지. 성역에 와서 배운 건 포기와 체념과 화내는 법과 기타 등등 부정적인 것들뿐이었지만 그중에서 딱 하나 긍정적인 게 있다. 바로 안 될 때는 일단 부딪혀보고자 하는 용기! 사실 이것도 부정적인 것 같지만 지금은 긍정적이라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배움에 따라 사라는 일단 닥치고 문으로 돌진했다. 다행히 문을 닫고 자진 않아서 바로 밖으로 쏙 빠져나왔다. 왠지 프리덤!을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
사라의 방은 교황의 거처 한구석에 있다. 그런 만큼 평소에도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사람이 더 없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사용인 한둘 정도는 지나다니는데. 이래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걸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봤자 어쩔 도리도 없었기에 사라는 일단 십이궁 쪽으로 뛰어갔다. 처음에는 집무실에 가려고 했는데 문이 열려있을 것 같지 않아 바로 포기했다. 인간일 때도 열기 힘들었던 문이 고양이일 때 열 수 있을 리가. 차라리 뻥 뚫려있는 십이궁이 낫지. 다행히 고양이의 몸은 반강제적으로 히키코모리였던 인간의 몸보다 훨씬 쌩쌩했기에 사라는 금방 쌍어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쌍어궁의 주인인 아프로디테와 사라의 사이는 조금 미묘했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왜인지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가 그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라에겐 이유가 있다. 바로 이름에 걸맞은 외모와는 달리 시커먼 아프로디테의 속내 때문이다. 아니, 시커멓다는 말은 조금 틀리다. 성격이 좀 나쁘긴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의외로 주변과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봐서 알아챈 결점을 배려도 없이, 때로는 악의도 담아 상대에게 날카롭게 찌른다는 점이지. 아직까지 그 칼날이 자신에게 닿은 적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 표적이라도 된다면 정말 상처 입을 것 같다. 보기보다 소심한 사라에게는 조금 어색한 유형이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악의 없는 네 말이 더 아팠다고 했겠지만 사라는 모르므로 그냥 침묵하도록 하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약 고양이가 된 자신을 만난다면 아프로디테는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란 걸 알아채 주는 게 베스트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 같고, 동물 따윈 싫다면서 무시할까 아니면 좋다며 귀여워해 줄까. 어느 쪽이든 아프로디테에겐 가능할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생각해봤자 소용없겠지. 여기서도 정면돌파를……, 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몸이 덜렁 들렸다.
“고양이?”
바로 눈앞에 미인의 얼굴이 있다. 다른 종류지만 일 때문에 매일 비슷할 정도의 미인(사가)을 보는 사라조차도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을 정도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남자 진짜 사기적인 외모네. 아니, 이게 아니라! 목덜미가 잡혔다는 걸 깨닫고 사라는 무심코 버둥거렸다. 그래 봤자 골드 세인트 앞의 새끼 고양이었지만.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로디테가 지그시 시선을 보낸다. 뭔가 흥미로움이 가득한 시선이다. 떠올려보면 왠지 인간이었을 때도 이런 시선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 모양 좋은 입술이 예쁘게 호를 그렸다.
“왠지 익숙한 느낌인걸?”
“냐아?”
에? 설마 혹시 단번에 알아봐 주시는 건가요. 할렐루야. 사라는 무심코 소리를 내지르며 찬양했다. 하필 대상이 그리스 신들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이었던지라 별 효과가 없었지만.
“착각이겠지.”
카뮤보다 쿨하게 부정하곤 그대로 아프로디테가 쌍어궁으로 들어간다. 물론 손에는 여전히 고양이(사라)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다.
“캬앙?”
아니, 착각이라면서 왜 데리고 들어가는 건가요. 설마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겠죠?! 하나 망상과는 다르게 아프로디테는 그저 방석 위에 사라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손이 다시 다가온다. 잡는 걸까 싶었지만 다르다. 아까와는 달리 상냥하고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질 뿐인 손가락. 냥? 의아해하는 사이 이번에는 턱이다.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아 사라는 무심코 골골대고 말았다.
“흐음. 우유라도 줄까?”
묻는 어조도 평소와 다른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매혹적이다. 아, 귀에 독이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겠네. 살며시 몸에 스며들어서 푹 빠져든다. 몸이 노곤노곤해져서 절로 눈이 감긴다. 지금 이 순간, 사라는 고양이의 삶도 꽤 나쁘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될까. 일도 안 해도 괜찮고, 아프로디테도 귀여워해 줄 것 같은데. 그래도 인간의 우유는 고양이에게 주면 안 돼요.
……여기서 끝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프로디테!”
갑자기 보무도 당당하게 데스마스크가 쳐들어왔다. 사라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튕겨져 굴러갔다. 하필 데스마스크의 앞으로.
“앙? 뭐냐, 이 고양이는.”
몸을 굽힌 데스마스크가 덜렁 사라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아프로디테가 했던 짓과 비슷하지만 훨씬 난폭하고 손아귀의 힘도 강하다. 심지어 얼굴도 바싹 들이대고 있다. 얼핏 보고, 자세히 보고,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야쿠자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을.
“캬악─!”
미리 말해두지만 데스마스크의 얼굴을 발톱으로 긁어버린 것은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
“이 고양이가!!!!”
당연히 데스마스크는 화를 냈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대놓고 살기를 내뿜는다. 본능적으로 사라는 몸을 떨며 털을 세웠다. 이거, 잘못하면 진짜 죽는다.
다행히 구원의 손길이 내려와 주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대놓고 한심하단 티를 팍팍 풍기며 아프로디테가 데스마스크의 손에서 사라를 빼냈다. 솔직히 불쌍한 고양이를 구해주고 싶다기보다는 데스마스크를 타박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도움받았기에 사라는 크게 감동했다. 지금 아프로디테를 향한 내 호감도가 20점은 증가한 것 같아. 여담이지만 샤카를 향한 호감도는 18점 정도다.
“아앙? 그 녀석이 먼저 내 얼굴에 상처를 냈다고!”
“그래 봤자 고작 생채기 한두 개잖아?”
“나에게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정말 유치하긴.”
“하? 뭐라고?”
어느새 자신을 잊어버린 듯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뭔가 쓸쓸해졌어.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사라는 곧 터벅터벅 쌍어궁을 나왔다. 방금 했던 말 취소. 고양이의 삶도 그리 멋지지만은 않았다.
쌍어궁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다음 궁인 보병궁에 도착했다. 여기는 안전지대. 낯설게도 느껴지는 청록색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사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병궁의 주인인 카뮤와는 미로와 효가밖에 접점이라곤 없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부분에서만은 영구동토도 녹아버릴 정도로 코스모를 뜨겁게 불태우며 대화할 수 있는 사이다. 특히 효가에 관해서는. 제자 바보와 브라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리 끈끈한 우정─그러나 남들에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을 쌓았던 만큼 사라는 조금 기대하고 말았다. 같은 덕질 동지이니 혹시나 영혼의 공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라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흐음. 효가에게 줄까.”
카뮤가 사라를 보자마자 한 말이 이거다. 꽤나 엉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올곧은 남자다. 그러니 저 말이 진실이라는 데 세이야가 준 과자 한 조각을 걸 수 있다. 거기까지 콤마 삼 초 만에 깨달은 사라는 죽기 살기로 달아났다. 아무리 동생이 좋다지만 동생 손에 길러지는 건 사양이다.
바로 아래 두 궁에는 주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오늘 사가와 함께 좀비가 될 운명이었더랬다. 사라는 마갈궁과 인마궁을 지나가며 두 남자의 명복을 빌었다.
천갈궁에는 주인이 있었지만 사라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최대한 발소리를 줄였다. 미로에겐 기대도 안 하고 바라는 것도 없다. 그냥 가만히 있어 주면 참 고맙겠다. 호인(好人)이란 것도 알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곰곰이 따져보면 의외로 사고 치는 일도 없다는 걸 알지만 이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로가 하는 짓은 이상하게 사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 같았으니까. 상성이 안 좋다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여차하면 카뮤에게 부탁해서 다시 얼리면 되니까. 미로가 들었다면 카논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을 만한 일을 생각하며 사라는 무사히 천갈궁을 빠져나갔다. 미로에게도 다행히.
다음 천칭궁은 주인이 항상 없었으므로 프리패스.
이리하여 사라는 결국 처녀궁에 도착하고 말았다.
처녀궁 앞에서 사라는 잠시 망설였다. 저에 관한 일이 아닌한 샤카는 굳이 처녀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도 저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건 사라가 샤카의 눈을 피하는 게 불가능하단 소리와 일맥상통했다.
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샤카가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할 확률은 적다고 본다. 안 그래도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것 같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튀는 남자다. 그러니 어떨 수를 써서든,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채겠지. 문제는 그다음이다.
첫 만남의 납치부터 지금까지 샤카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상관하려고 애썼다. 미로의 어쩌다 보니, 라는 식의 실수와는 달랐다. 베베꼬여 알기 어렵지만 남자의 행동에는 분명한 의도가 깃들어 있었었다. 자신으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샤카인데 과연 자신이 고양이가 되었다고 해서 얌전히 인간으로 되돌아가도록 협력해줄까? 대답은 노일 확률이 99.9%다. 물론 샤카는 악당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나쁜 것과 성격이 나쁜 건 다르다. 궁극적으로야 자신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짓궂은 장난을 해오겠지. 그건 사양이다. 정말 사양이다.
아아, 므우나 알데바란이나 둘 중 아무나 좋으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이 위쪽까지 올라와 주지 않을래요? 그렇다면 자신도 무사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샤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니 완벽한 해피엔딩인데. 사라는 고양이 주제에 한숨까지 푹푹 내쉬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 신은 사라의 소망을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 지옥에까지 손수 처박아주었다.
“호?”
인기척도 없이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때 사라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건 자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몸이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라의 마음속에서 혼돈의 카오스가 벌어지든 어쨌든 간에 샤카는 태연했다. 너무 태연해서 자연스럽게 사라를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얼결에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게 된 사라는 꽥 비명을 질렀다. 물론 속으로만.
“후후.”
엥? 뜬금없이 샤카가 웃었다. 그것도 꽤 기분 좋은 듯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샤카가 사라를 고쳐 안았다. 꽤나 능숙하다고 해야 할까, 뭔가 굉장히 편하다. 왠지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 이번에는 턱을 쓰다듬어졌다. 아프로디테처럼 섬세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부드러운 손길이다. 이리 해준다면 골골거려주는 게 묘지상정(猫之常情). 인간으로서의 이성보다 고양이로서의 본능이 커지고 있던 사라는 얌전히 목을 울렸다. 샤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 안도, 혹은 실망하며.
“귀엽구나.”
달콤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린다. 사라는 흘긋 샤카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유리구슬처럼 예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행이라 어지간해서 눈 뜨는 일이 없다더니 고작 고양이 한 마리에. 참 값싼 눈동자일세. 이 남자 생각 외로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사라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사라는 반사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어째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샤카!”
아니나 다를까,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다가오는 소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동생들이었다.
개중 제일 먼저 샤카 앞에 도착한 세이야가 헥헥거리며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평소의 소년답지 않은 다급함이 절실히 드러난다. 자세히 보면 커다란 눈망울에도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있다. 어, 잠깐. 어떤 녀석이 내 동생 울렸어!!
“캬아앙!”
그러나 나오는 건 고양이 소리뿐이니. 물론 정신없는 세이야의 귀에도 고양이의 울부짖음 따윈 닿지 않았다.
“샤카! 누나 못 봤어?! 갑자기 누나가 사라졌어!!”
아니, 나 지금 네 앞에 있잖니. 라며 사라는 야옹거렸다. 매우 절실하게.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슬퍼하는 동생을 어떻게라도 안심시키고 싶었다. 다행히 세이야 대신 그 말을 알아 들어준 것처럼 샤카가 불쑥 사라를 세이야의 코앞으로 들이댔다.
“사라라면 여기 있지 않느냐.”
그래, 나 여기 있…… 아니, 잠깐. 뭐라고요?
“……뭐?”
“……냥?”
동생과 누나의 목소리가 완벽하게 이중주를 이루었다.
“저게 사라라고?”
샤카의 품에서 버둥거리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미로가 경악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의문과 경악과 불신과 웃음이 적나라하게 버무려졌다. 그야말로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효율 좋은 질문이라 하겠다.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겠는 의문에 고갤 끄덕여 답한 건 샤카였다. 처녀좌의 남자는 도대체 왜 모르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최근 들어 가장 진지하게 수긍했다.
“그래. 어딜 봐도 사라이지 않느냐.”
아니, 어딜 봐도 고양이인데. 라고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제각각 시선을 피했다. 이래 봬도 거짓말은 안 하는(추측) 샤카니 저 고양이가 사라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리 착각할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은 맞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람이 고양이가 된다는 게 불가능 하는 걸 아는 탓이다. 제아무리 가까이서 신을 모시는 세인트들이라도 사고에 한계는 있었다.
그때 샤카의 품에서 난리를 치던 고양이가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아. 삽시간에 시선이 쏠린다. 이대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모두의 걱정관 달리 고양이는 줄행랑치는 대신 세이야와 슌에게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샤카에게 했던 것과는 반대로 사람을 꺼리는 기색은 없다.
“야옹─”
심지어 귀엽게 울며 몸을 소년들의 다리에 비비기까지 한다.
“…….”
그 모습을 보고 모두 납득했다. 사라 맞구나.
“누나…….”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세이야가 사라를 안아 올렸다. 옆에 있던 슌은 조심히 사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이를 대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애완동물을 대하는 태도였으나 사라는 오히려 기분 좋은 듯 골골거렸다. 보고 있던 미로는 자존심은 어디다 갖다버렸냐며 따지려다 관뒀다. 자존심은 무슨. 저 녀석이 동생과 관련된 일에서 저러지 않은 적이 있기나 하던가.
“그나저나 사라는 갑자기 왜 고양이가 된 걸까요?”
어색함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냉정했던, 혹은 척하고 있던 므우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리에스의 말을 듣고 다들 그제야 그러고 보니, 하는 얼굴이 돼버렸다. 아니, 고양이가 된 본인도 다른 녀석들도 워낙 태연해야 말이지.
“미야옹.”
므우에게 응답하듯 사라가 길게 운다. 당연히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짚이는 곳이 있는 건가.”
딱 한 사람만 빼고.
“냐─”
“흠, 흠. 그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라와 샤카를 보고 모두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당연한 듯 대화가 통하느냔 어리석은 물음은 하지 않는다. 샤카니까 그렇겠지, 뭐.
각설하고, 시간을 돌려 전날 늦은 오후.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온 사라는 서고에 딸린 창고에서 오래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별달리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뭐가 있나 새삼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여기 있는 것까지 알아야 나중에 이 인간들이 찾을 때 빨리 가져다줄 수 있으리란 생각도 조금은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댔단 소리다.
성역의 유구한 역사를 방증하듯 고서 더미에는 용케 형태가 남아있다 싶을 정도로 오래된 책도 많았다. 암호인지 고대어인지로 쓰여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꽤 중요하고 위험해 보이는 책도 간간히 나왔다. 덕분에 사라는 중간부터 무슨 보물을 발굴하는 기분으로 책더미를 뒤졌었다.
와중, 그 책을 발견한 건 그야말로 운명의 여신들의 장난이었다.
다른 책들보다 훨씬 낡아 보이면서도 묘하게 광택이 나던, 표지고 책등이고 어디에도 제목이 적혀있지 않던 검은 책. 다만 여는 부분을 봉인하듯 작은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사라는 종이에 쓰인 글씨를 확실히 읽었다. 아테나Αθηνά.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보고, 가장 먼저 익숙해진 단어.
‘중요한 걸까?’
그래서 내용을 확인하려고 사라는 책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다만 괴상한 생물체가 하나 튀어나왔을 뿐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무표정으로 경악하는 사라 앞에서 뱀의 꼬리를 가진 악마는 선언했다.
「너에게 저주를 내린다. 너에게 축복을 내린다. 너는 네가 아니게 될 것이다. 너는 좋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사라는 쌈박하게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라는 것으로.”
태연히 샤카가 말을 마쳤다. 정적. 삼 초 후, 아이오리아와 미로가 동시에 절규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말 하라고!!!!!!”
“냐옹.”
“까먹었었다는군.”
“까먹을만한 일이냐!!!!!!”
타당한 지적이었으나 상대가 사라다. 당연히 씨알만큼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 귀찮다는 몸짓을 보인다. 어째 인간일 때보다 고양이일 때 감정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게 괜히 얄밉다. 아오, 므우랑 아이오로스(형)가 있어서 한 대 때리지도 못하겠고.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사자와 전갈과는 달리 동생인 세이야와 슌은 태평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자연히 울먹거림이 새어 나온다.
“그럼 누나는 어떡해?”
“설마 계속 이대로인 건 아니죠?!”
“아, 그거라면 괜찮아.”
의외로 태평하게, 잔잔한 목소리로 사가가 소년들을 다독였다.
“사라가 말한 책이라면 기억에 있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대충 알겠군. 그 저주는 하루 정도만 지속되는 거니 내일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퍽 신뢰감 있는 사가─그러나 한때는 최악의 사기꾼─의 미소에 세이야와 슌은 안심했다. 서고를 뒤집어엎어서라도 방법을 찾아내려 했던 아이오로스와 므우도 안심했다. 아닌척해도 내심 초조해하던 아이오리아와 미로도 안심했다. 샤카는 원래부터 안심하고 있었다.
“어이, 그런데 아까부터 한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멋모르고 사라에게 손을 댔다 얼굴이 긁혔던 데스마스크가 돌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상처는 남아있지만 그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로.
“저 녀석 왜 저렇게 샤카에게 화났냐?”
모두의 시선이 재빠르게 사라에게로 향했다. 과연. 데스마스크의 말대로 사라는 계속 샤카의 손길을 피하며 하악대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물론 사라가 샤카를 피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어쩌다 저리됐는지는 몰라도 꼬일 대로 꼬인 두 사람의 관계라 그다지 평탄하게 지나간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저게 정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대놓고 싫어한다는 티를 내긴 했다. 원래라면 영혼이 나간 태도로 적당히 상대해주고 있었을 텐데.
“캬악─!”
“고양이가 되었기에 쓰다듬었을 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다행히 므우가 이해할 수 없는 고양이와 사람의 대화에서 답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본인인 걸 알면서도 고양이 취급했던 게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네요.”
기분 탓인지 굉장히 잘됐단 태도로 므우가 은은하게 웃는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미소였으나 눈치 빠른 몇몇은 알아차렸다. 이 기회에 차라리 사라가 샤카에게 정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구만, 저거. 하나 모르는 게 부처려니. 이미 단련된 성역 사람들에게는 애써 저 망할 남매들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용자는 있나니. 항상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아프로디테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평소보다 배로 화사한 미소가 장미처럼 탐스럽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장미는 무조건 독장미다.
“저 고양이가 사라라는 건 나도 처음부터 알았는데?”
뜻밖의 말에 사라는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 가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세이야의 품에 푹 안겨들었다. 이번에는 샤카 대신 슌이 사라의 행동을 해석했다.
“……아프로디테는 괜찮다는 것 같네요.”
샤카는 괜찮지 않아졌다.
덤 1.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이 턱 놓였다. 응? 갑작스러운 온기에 얼이 빠져있는 사이 이번에는 쓱쓱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밑도 끝도 없는 행위에 사라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손의 주인, 카논을 쳐다보았다. 물론 뻔뻔한 남자는 이 정도의 시선엔 간지러워하지도 않았지만.
물론 카논이 머리를 쓰다듬은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이런 짓이라니. 혹시 어디 머리라도 다친 건가.
“……갑자기 뭔가요.”
애써 안쓰러움을 참으며 묻자 카논이 입귀만 끌어올려 웃었다. 의도야 어떻든 간에 얼굴만큼은 참 그림이 되는 남자다.
“내가 없는 사이 재밌는 일이 있었다지?”
머리에 있던 손이 이젠 뺨, 아니 턱으로 옮겨간다. 검지를 세워 살살 턱밑을 긁는 손짓이 어딘가 야하면서도 짜증 난다.
“그 기회를 놓친 게 아까워서.”
과연. 아까부터 계속 고양이 취급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 남자가 진짜. 사라는 착 가라앉은 눈길로 카논을 쳐다보았다. 고양이 취급을 하는 건 둘째치고 아까부터 은근하게 만지는 손이 진짜 거슬린다. 이거 성추행으로 신고해버릴까. 아테나라면 두 조각을 내줄 것 같은데.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 의미로 말이다. 변태에게는 매가 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마 그간의 정이 있어, 라기보다는 서류를 처리할 사람이 줄어들므로 곧바로 신고하지 못하고 있던 사라에게는 다행히도 카논은 5분 뒤에 사가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덤 2.
“누나는 고양이 좋아해?”
느닷없이 세이야가 그렇게 물었던 건 사라에게 저주를 내렸던 악마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사라가 기억하고 샤카가 옮긴 게 정확하다면 악마는 사라가 ‘좋아하는 것’이 될 거라 말했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 자신들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호불호가 심하지 않은 누이에게 좋아하는 것이라니.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로도 세이야가 의문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뭔지 모를 동생에 질문에 사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좋아해. 귀여운걸.”
기분 탓인지 묘하게 귀엽다는 말에 강세가 들어간 것 같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옆에서 자신들을 조용히 모른 척하고 있던 미로도 한심하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귀여우면 다냐?”
“다는 아니지만 인간은 정보의 70% 이상을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생물이니 외견에 영향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긴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미묘하다. 말하는 대상이 대상이니 더더욱. 세이야 조차 침묵을 지켰다. 애초에 외견에 휘둘리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누이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사라가 귀엽다고 하는 건………. 물론 당사자는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몰랐으므로 허술한 의견에 뭐라 반박하면 좋을까 미로가 고심하든 말든 직격탄을 날릴 뿐이었다.
“세이야. 너희도 귀여워서 사랑받는 거잖니?”
“……아니, 그건 좀.”
다른 아이들이야 어떻든 간에 저 ‘너희들’에 잇키도 포함되었다는 걸 아는 모두는 차마 사라에게 너의 심미안은 어딘가 잘못되어있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다음 에피소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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