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통해 깨끗한 하늘이 보였다.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예쁜 하늘이었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동화책에나 나오는 것 같은 구름이 흐른다. 너무 평화롭고 행복한 광경이라 이대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구름을 따라 사고가 멍하니 흘러갔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머릿속으로 바보 같은 동요가 울려 퍼진다. 이 어처구니없는 흐름의 이유를 세이야는 알고 있었다.
적당히 도피를 끝내고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현실이 들이밀어졌다. 커다란 테이블 위로 흐트러진 필기구와 수많은 책, 책, 책. 소위 교과서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 세이야는 현재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자신의 본분─이라기엔 조금 미묘하지만─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랬단 소리다.
암담함에 포로록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 소리를 듣고 같이 공부하고 있던 시류가 엄격한 시선을 보냈다. 공부 안 하고 뭐하냔 시선이 아니라 공부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단 시선이다. 노사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인지 시류는 대개의 일에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발 물러서는 경향이 강했지만 한번 이거다, 결정한 일에는 타협이 없었다. 세이야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거지만.
“세이야. 공부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너일 텐데?”
자신들의 상호작용을 보고 저편에서 효가가 무심한 듯 푹 찔러 들어왔다. 켁. 무심코 짜부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나 분함과는 대조적으로 세이야는 효가의 말에 조금도 반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세인트가 되기 위해 수행을 시작했던 세이야들은 세간에서 말하는 공부란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물론 수행 시절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세이야들이 익힌 건 기껏해야 최소한의 상식뿐, 나머지는 전부 생존과 전투에 관련된 분야로 편중되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 학습 과정의 기초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단 소리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오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세이야들이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도 책망하지 않았다. 천천히 배워나가면 된다. 그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특히 모든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여신은 공부 따위 못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친히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였지만. 그랬던 모두의 태도가 변한 건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였다. 정확히는 성적표가 날아온 직후였다. 일단은 후견인으로서 세이야들의 성적표를 확인한 사오리는 절망하고, 이윽고 분노했다. 무식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인트에게 지나친 수준의 지식을 바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적어도 최소한의 상식은 알고 있어야지!
그리하여 진노한 여신은 낙제점투성이의 성적표를 구겨 쥐고 외쳤다. 기말에도 낙제점을 받으면 방학 동안 성역엔 얼씬도 못 하게 기숙 학원에 처넣어버릴 줄 알아요! 라고.
거기까지 떠올리고 세이야는 별수 없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부는 정말 싫지만, 죽어도 싫지만, 차라리 하데스랑 한 번 더 싸우는 게 나을 정도로 싫지만, 그보다 성역에 갈 수 없게 되는 게 더 싫었다─사오리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그 귀신같았던 얼굴을 떠올리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래,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사오리의 그런 얼굴을 다시 보는 건 맛없다. 라고 할까, 이제 와서지만 세이야는 자신이 성역에 갈 수 없게 된다면 마린이 자신의 성적을 알게 된단 사실을 눈치챘다. 아, 그건 사오리 씨 이상으로 맛없지. 아니, 맛없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했다. 호시탐탐 이쪽에 수작을 부려오는 포세이돈이나 하데스가 차라리 안전할 정도로.
본디 마린은 시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성격이다. 게다가 뭔지 모를 이유로 자신들에게 져주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잘못을 그냥 넘어가 주는 일이 절대 없었다. 그런 고로 자신의 점수를 마린이 알게 되는 날=자신의 제삿날이란 소리다. 심지어 자신은 마린에게 미약한 반항조차도 하지 못한다. 결론은 단순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나버릴 것이다. 절대 과장이나 비약이 없는 미래를 떠올리고 세이야는 가볍게 감탄했다. 우와, 이거 굉장히 위험하잖아.
그래,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 방금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아까의 다짐이 단순한 선택의 문제였다면 이번엔 생존의 문제였다. 생각 하나로 마음가짐이 이렇게 달라진다.
허나 애당초 공부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라,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은 지 3분 만에 세이야는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심하다 싶긴 하다. 그렇지만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만날 잤는데 혼자 공부한다고 잘 될 리가 있나. 차라리 인생을 포기하는 게 빠를 정도다. 그동안의 정도 있는데, 명계에 가면 하데스가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으려나.
고심하던 세이야는 슬쩍 교과서에서 시선을 떼고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원래 성격이 성실한 만큼 슌과 시류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므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효가도 저 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원래 이런 부분에선 요령이 좋으므로 딱히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스승인 카뮤 덕분에 책에도 제법 익숙한 것 같고. 역시 문제는 자신뿐인가. 무심코 절망에 빠지려던 순간, 세이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뭔가 빼먹은 것 같은…….
아, 알았다. 잇키가 없다. 원래 단체행동을 싫어하는 데다 자신들과 같이 있어도 어울리기보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일이 많아서 알아채는 게 늦었다. 헌데 어떻게 된 걸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학교를 다니고 나서부터는 자신들과 함께 하는 일이 많았는데. 세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잇키는 어디 있어?"
세이야의 말을 듣고 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미소에 깃든 건 애정인가 포기인가. 평소라면 애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포기의 비중이 더 큰 것 같다.
"형은 성역에 못 가게 되어도 별문제가 없으니까."
어정쩡한 대답이 되돌아왔지만 세이야는 납득했다. 하긴 이런저런 이유로 소중한 사람들이 많은 성역과 떨어질 수 없는 자신들과는 달리 잇키는 그다지 성역과는 인연이 없었다. 굳이 인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면 카논과 샤카 정도인데 그 둘을 못 만난다고 해서 서운해할 정도로 귀여운 성격도 아니다. 오히려 카논이나 샤카가 서운해하면 서운해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테나의 명령도 있는데 여기까지 제멋대로라니, 자유로운 영혼 같으니라고. 괜히 입을 삐죽이자 효가가 미로를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이마를 쿡쿡 찔러왔다. 물론 효가가 스칼렛 니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격통은 없고 수수하게 아플 뿐이다. 랄까 그냥 기분이 나쁘다. 째릿, 은근히 성격이 나쁜 형을 째려보자 히죽 짜증을 유발하는 미소가 빛을 발한다.
"잇키를 걱정할 바에야 스스로를 걱정하는 게 좋을걸. 그 녀석, 그래 봬도 꽤 성적 좋으니까."
“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정말? 다른 둘에게 확인을 구하면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시험에서도 아슬아슬 한 건 있어도 낙제점은 하나도 없었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슌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순간 세이야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도 너만은 믿었건만!!
“……왜 위험한 건 나뿐이야!!”
아니, 그건……. 시류가 심히 우물거렸다. 세이야는 어쩐지 그 뒤에 나올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래, 전부 내 탓이지. 공부 안 하는 내 탓. 사오리 씨가 화난 것도 내 탓이고─반쯤은 맞다─, 마린이 화를 내는 것도 내 탓이지─이건 전부 맞다─.
거침없이 땅을 파 내려가던 세이야는 책상 위로 푹 엎드렸다. 안 그래도 의욕이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태클이 들어오고 의욕을 꺾어버리니 더더욱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이게 변명이란 건 세이야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세인트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세상은 의지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이 많은 것이다. 나 지금이라면 마린 씨가 날 죽이려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우우, 반쯤 울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효가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이전에도 수십 번은 들은 목소리이지만 기분 탓인지 여태까지 중에서 제일 차가운 목소리인 것 같았다. 누가 시베리아 출신 아니랄까 봐.
“너, 그래서 수행 시절에 공부는 어떻게 했어. 아예 아무것도 안 배우진 않았을 거 아냐.”
“……매번 졸다가 마린 씨에게 두들겨 깨워져서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었어.”
저런, 하고 누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효가를 포함, 모두의 얼굴에 금방 진한 동정이 어렸다. 두들겨 맞은 건 전부 세이야 본인의 자업자득이었음에도 말이다. 다들 간접적으로나마 마린의 성격과 수행 시절 세이야의 고생을 알고 있는 탓이다. 실버 세인트 한 명이 하데스조차 쓰러트린 브론즈 세인트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이렇게도 컸다.
“히, 힘내서 공부하자! 세이야!!”
“그래! 우리도 도와줄 테니까!”
“정 안 되겠으면 사가라도 생각하면서 힘내고.”
“너희들……!”
순식간에 질책에서 격려─마지막은 조금 미묘했지만─로 태세를 전환한 형제들을 보고 세이야는 눈을 반짝였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반응이다. 잇키가 봤다면 분명 바보냐고 타박했을 게 틀림없다. 허나 그래도 좋다. 응원을 받으면 힘이 나는 게 인지상정! 세이야는 무심코 흘러넘칠 뻔한 감동의 눈물을 닦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힘낼게!!”
그리고 10분 후. 완전히 숙면을 취하고 있는 세이야를 보고 남은 형제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부 (하기 싫음) 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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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519자
세이야는 이래선 안 되겠다싶어 찾아온 사가의 과외 덕분에 간신히 낙제점을 면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