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아궁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세찬 비다. 흔한 표현으로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아까만 해도 화창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사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소나기일 확률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맞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기실 세인트로서 단련한 게 있는 데 비 좀 맞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테니 평소라면 그냥 뛰었을 거다. 문제는 제가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서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품에 꽁꽁 싸매고 간다고 한들 이 빗속에서 종이가 젖지 않기는 어렵겠지. 만약 글자 몇 개라도 번진다면 저와 동료들의 3일 철야가 헛수고가 된다. 사가는 잔업에 찌들어 힘든 나날 속에서 동료들의 원망까지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연락해서 우산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사가는 그 안을 바로 포기했다. 성역엔 쓸데없이 체력만 넘치고, 잔뜩 피를 뽑아내도 멀쩡할 정도로 혈기왕성한 녀석들밖에 없는 곳이다. 태풍이라도 불지 않는 이상─어쩌면 태풍이 불어도─ 그냥 맞고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에게 우산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인도어파이거나, 상식인이 아니거나, 혹은 둘 다에 해당했고. …성역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곤란하군.”
중얼거려봐도 빗줄기는 약해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몇 시간은 계속 이런 상태일 것 같다.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어나더 디멘션을 사용해 공간을 구부리기라도……, 하고 사가가 결심한 찰나,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우중충한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볍고 경쾌한 걸음 소리.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사가!”
“……세이야?”
익숙한 소년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그리스에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만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탓이다. 원래 한군데 붙어있는 성미가 못 되는 소년은 첫날 얼굴만 불쑥 내밀고는 계속 이리저리 쏘다녔던 것이다. 형제도, 전우도, 스승도 전부 내버려 둔 채. 그야말로 변덕스럽게. 그러기에 다시 변덕을 부려 찾아오는 게 아니라면 우연히라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이것도 소년 나름대로 변덕을 부린 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묘한 사가의 속내도 알아채지 못하고 하얀 우산 아래서 세이야가 해사하게 웃는다. 비가 내려 평소보다 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덕분에 그 모습이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처럼 보였다. 포메라니안이라든가 푸들 같은 종류의. 어리긴 하지만 평균과 비교하면 제법 크고, 전투 시에는 그리 귀염성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겉보기에는 그랬단 소리다. 저도 모르게 웃으니 좋다고 달려오는 꼴만 봐도 그렇다.
“쌍아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
“그럼 왜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거야, 라고 말하려던 세이야가 멈칫한다. 아마 제 품에 있는 서류 뭉텅이를 보고 상황을 알아차렸으리라. 멍청한 쌍둥이 동생이 가끔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애정 섞인 악담을 하곤 했지만 기본적으로 세이야는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빨랐다. 다른 건 몰라도 타인의 곤란함은 금방 알아챈다. 천성이 상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수 없다는 듯 어정쩡한 표정을 짓자 세이야가 우산을 높게 들었다. 행동에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씌워줄게.”
음? 사가는 어울리지 않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아랑곳 않고 세이야가 재촉한다. 자, 빨리 들어와.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오히려 반응이 늦었다. 뭐해? 아니……. 한 번 더 재촉을 받고 나서야 사가는 움직였다. 머쓱히 우산 아래로 들어서자 그제야 세이야가 히죽거린다.
가자. 세이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가도 옆에서 보조를 맞췄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 아래서 물이 찰박거린다. 빗방울이 우산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독특하게 울렸다. 비슷한 박자로 세이야가 어설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따금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생소한 이국의 언어. 사가는 말없이 하모니에 귀를 기울였다. 서툴러도 따뜻하고 어딘가 안심이 되는 음색이다. 안 그래도 기나긴 계단이 더욱 길어진 것 같았다. 느긋한 분위기 때문인지 시간이 감속한다. 신장 차 탓에 세이야는 불편하게 우산을 치들어야 했고, 자신은 몸을 웅크려야 했지만 사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열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반절,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반절이었다.
그렇게 반쯤 내려왔을 때, 위태롭게 이어지던 노래가 뚝 끊겼다. 세이야?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소년이 인상을 찡그린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게 영 기분 나쁜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조심스레 쳐다보자 세이야가 험하게 발을 굴렀다. 얼핏 보면 토라진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뒤에야 잔뜩 젖어버린 신발을 찝찝해할 뿐이란 걸 깨달았다. 사가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별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건네자 세이야가 다시 입술을 내민다. 나도 알지만.
“우산 주제에 쓸모가 없잖아.”
우산은 내리는 비를 막아주는 물건이지 발밑의 웅덩이를 막아주는 물건이 아니니 그 말은 조금 아니지 않을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지만, 말해봤자 소년을 더 화나게 만들 뿐이라 사가는 현명하게 입을 닫았다. 사가에게 있어 세이야는 아테나 다음으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와서지만 문득, 사가는 위화감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는 세이야는 비가 온다고 해서 새삼 우산을 쓰고 다닐만한 소년이 아니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행 시절 아이오리아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탓이다. 스승인 마린도 제자에게는 묘하게 터프한 구석이 있었으니 더욱더. 게다가 이 비는 너무 갑작스러웠으니 미리 준비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세이야의 누나나 다른 형제들이 챙겨줬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세이야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우산이…….”
“우산?”
세이야가 괴상하단 얼굴을 한다. 뭐, 그야 그렇겠지.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아니, 네가 우산을 가지고 다니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절로 변명이 나왔다. 흐응. 사가의 답에는 별 흥미가 없는지 세이야가 눈을 가늘게 뜬다. 내뱉는 말에도 영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므우가 줬어.”
므우가? 성역에도 우산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는지. 거기서 사가는 바로 제 생각을 부정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므우가 우산을 쓰고 다닌 적은 없다─보지 않았을 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니 므우가 우산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어린 제자를 위해서, 혹은 제 앞의 소년을 위해서. 어느 쪽 가설이 맞든 간에 세이야가 사랑받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므우 외의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새삼스럽게.
물론 그게 어떻다는 소리는 아니다. 회한을 가지기에는 이제껏 일이 너무 많았다. 복잡한 심경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고작 그 정도다. 이제 와서 자기 혐오와 반성과 자학을 반복한다면 당장 눈앞에 있는 소년부터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인가.’
아무래도 자신은 불행에 탐닉하기 쉬운 성격인가보다. 알고야 있었지만. 빨리 고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군. 동시에 불가능이란 단어도 떠올랐다. 왜냐하면 제가 지은 죄가 너무 커다랗기에. 잘못을 깨닫고 있기에. 무얼 하든 자신을 긍정할 수는 없으리라.
사가. 단호한 부름이 들렸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면 세이야가 뚱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이야? 얼빠진 목소리가 나온다. 어울리지 않게 소년이 커다란 한숨을 내쉰다.
“또 이상한 생각 했지?”
부정할 수 없었기에 어깨만 으쓱였다. 그를 보고 세이야가 툴툴 불만을 내뱉는다. 적당히 하라고, 바보. 중간중간 욕설도 섞여 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으랴. 사가는 입을 꽉 다물었다. 언젠가 전우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입을 열면 세이야에 한정해 더욱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 차라리 닥치라고.
다행히 충고가 유효했는지 세이야는 곧 잠잠해졌다. 사용할만한 어휘가 다 떨어졌을지도 모르고, 제풀에 지쳐버렸을 수도 있다.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했지만. 올려다보는 둥근 눈동자엔 어딘지 원망이 어려 있다. 미안하다. 싫어할 걸 알면서도 사과를 했다. 이쯤 되면 짜증 나서 세이야가 머리를 쥐어뜯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세이야가 척 검지를 내밀었다. 제 나이의 반도 되지 않으면서 어른인 것처럼 설교라도 할 모양새다.
“사가는 좀 건설적인 생각을 하라고! 음울한 생각만 하지 말고! 안 그래도 우울한 얼굴인데!!”
우울한 얼굴. 악의 없는 소년의 말에 사가는 크리티컬을 먹었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과 세이야에게 듣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크다. 우울한 얼굴. 그래,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생각보다 충격을 더 받았는지 헛소리가 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말해도 건설적인 생각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아니, 난 또 뭘 묻고 있는 거야.
하나 예상외로 세이야는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그러게. 뭐지? 신음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본인도 별생각 없이 한 말인 것 같다. 하긴, 건설적인 단어를 쓴 것만 해도 용하다.
“음……, 그래!”
용케 정당한 예시가 떠올랐는지 한참을 끙끙대던 세이야가 파앗 얼굴을 빛냈다. 그래 봤자 퍽 대단한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시하는 게 아니다. 세이야 본인이 원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이라 새삼 그러한 것을 떠올리는 게 힘드리라 여긴 것이다. 좋은 생각이라도? 그래도 호응해주려 묻자, 세이야가 손짓을 한다. 사가는 의아해하면서도 충실히 소년의 말을 따랐다.
몸을 숙이자 얼굴이 가까워진다. 우산이 내려왔다. 상반신은 거의 가려졌다. 밖에서 보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바보 같군. 헛웃음이 터지려던 찰나였다. 예쁜 붉은색 눈동자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무슨. 목소리를 꺼내기도 전에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아주 잠깐. 스쳤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후두둑, 갑자기 빗소리가 세차진다. 멍한 얼굴을 들었다. 장난에 성공한 소년이 히죽거린다. 어, 그러니까, 지금……. 멍청한 반응의 반복이다. 세이야의 웃음이 깊다래진다.
“이런 거?”
쐐기를 박는 세이야의 말에 사가는 결국 몸을 옹송그렸다. 심장 소리와 함께 불평이 커진다. 이게 어디가 건설적인 생각이야! 물론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무구한 미소가 원망스럽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