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 시간이 됨과 동시에 수많은 학생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괴로운 시간이 끝났단 해방감 때문인지 다들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얼굴로 잡담을 떠들며 하교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텐마는 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통은 동아리에 들지 않은 야토나 레굴루스와 함께 하교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혼자 하교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귀찮을 정도로 셋이 함께 붙어 다녔기 때문인지 묘하게 옆자리가 허전했다. 주변이 떠들썩했기에 그 허전함은 배가 됐다.
고아였지만 텐마는 자신이 외롭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였고 고아원에 들어가서도 소꿉친구들이 있었다. 고아원을 나와 독립했을 때조차 곁에는 야토와 레굴루스가 있었다. 스스로도 인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이럴 때는 쓸쓸함을 너무 민감하게 느껴버려 곤란하다. 텐마는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이다.
정말이지. 텐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할 뻔했다. 이제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금지! 라고 텐마는 기합을 넣었다.
그 순간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텐마.”
나지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텐마는 화색을 지었다.
“유즈리하!”
말을 건 상대는 두 살 연상의 유즈리하였다. 지금은 그녀가 고등부로 진학한 덕분에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예전엔 야토나 레굴루스 못지않게 친밀히 어울렸던 사이다. 오랜만에 만난만큼 더욱 반가움이 들었다.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텐마에게 유즈리하도 희미한 웃음을 되돌린다.
“지금 하교하는 건가? 웬일로 혼자군.”
신기해하는 어조에 텐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까지 셋이 붙어 다녔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확실히 형제 이상으로 붙어 다니긴 했으니까. 서로 사이좋다는 방증이니까 나쁜 기분은 일절 들지 않는다.
“오늘부터 새 아르바이트가 있거든.”
쑥스러운 기분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내뱉은 말에 유즈리하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다. 어라? 하고 텐마는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포커페이스인 유즈리하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일은 좀처럼 없다.
놀람과 걱정을 담고 있는 텐마에게 유즈리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뭐, 열심인 것은 좋지만 무리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유즈리하가 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텐마는 순간적으로 왁!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얌전히 유즈리하에게 머리를 맡겼다.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은 어쩐지 어린아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실제로 다른 상황이었다면 뭐하는 거냐고 퉁명스럽게 손을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감정 표현이 드문 유즈리하가, 그것도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까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텐마는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몇 분 뒤 유즈리하가 교실로 되돌아갈 때까지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머리에 닿아왔던 손가락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텐마는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기실 텐마는 고아원에 살았을 적에도 아이들 중 최연장자였다. 학교에서도 동아리 활동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기에 친하게 지내는 선배도 없었다. 즉, 연상의 어른이라면 몰라도 유즈리하 같은 연상의 또래는 텐마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유즈리하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가끔 이번처럼 자신을 걱정해주면 없던 누나의 존재가 생긴 것 같아 괜히 가슴이 간지러워져 버린다. 심장에서 피어나가는 온기에 텐마는 걸음을 멈추고 가슴께를 꼭 쥐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가족과 마찬가지였던 소꿉친구들과도 헤어져 버리고 난 뒤로는 이런 감정이 더욱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생각되었다.
한참을 감정에 취해있던 텐마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도중이었는데 멍청히 서 있고 말았다. 당황해서 허겁지겁 시계를 보자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지각이 확정이라 텐마는 허둥지둥 댔다.
“큰일 났다!!”
첫날부터 지각 위기다. 당황한 텐마는 일단 뛰기 시작했다. 평소엔 쓰지도 않는 머리를 풀가동해서 최단거리를 산출, 대로를 열심히 뛰던 와중 급히 공원으로 들어간다. 얼핏 보면 돌아가는 것 같아도 길이 아니라 수풀을 헤치며 출구로 나간다면 아슬아슬하게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텐마는 필사적이었다.
평일이기에 공원에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래도 수풀을 헤치며 뛰어가는 텐마의 모습은 이질적이라 싫어도 시선이 따끔할 정도로 박혀왔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두 번 다시 이러나 봐라! 더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텐마는 열심히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 순간 머리부터 가벼운 충격이 내달렸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텐마는 자연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픔보다는 당혹함이 먼저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 멍청히 있는 데, 문득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담담하지만 짜증이 상당수 억눌려 있는 목소리,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남자의 모습. 그를 보고 제가 남자와 부딪혔단 걸 깨달은 텐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 미안. 괜찮아?!”
황급히 일어나 손을 내밀자 남자가 저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얼굴에 닿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텐마는 눈을 커다랗게 깜빡였다. 갈색 피부, 약간 사나워 보이는 인상, 깨끗한 푸른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텐마가 멍하니 있는 사이 남자가 자력으로 일어섰다. 곧이어 퉁명스러운 말투가 귓가로 미끄러진다.
“…조심해라, 애송이.”
애송이란 말에 텐마는 발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남자의 뒤쪽에 있던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타임 리미트까지 앞으로 5분. 지각 확정이다.
“느, 늦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뭐라 말을 거는 것 같았지만 무시, 텐마는 남자를 제치고 전심전력으로 뛰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남자의 얼빠진 얼굴은 역시 낯익었다.
텐마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나, 분명 다시는 안 이러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얼마 전에 했던 맹세를 떠올리며 텐마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슬프지만 맹세가 헛되게도 텐마는 오늘도 또다시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 번째 경험인지라 좀 더 뻔뻔하고 대담하게.
얼마 전에는 유즈리하가 원인이었지만 오늘은 레굴루스가 원인이다. 요즈음 아르바이트를 늘려 같이 노는 시간이 줄었다고 투정부리는 걸 달래다 보니 이 꼴이다. 생각하니 또다시 레굴루스에 대한 원망이 불끈 샘솟아 텐마는 주먹을 꼭 쥐었다. 역시 한 대 때려주고 올 걸 그랬다.
골치 아픈 친구 덕분에 주변에 신경을 못 쓰던 텐마는 또다시 무언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짤막한 비명이 제멋대로 튀어나오고 몸이 균형을 잃는다. 완벽한 데자뷔. 이런 것까지 똑같지 않아도 괜찮잖아. 텐마는 다가올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넘어지기 전에 누군가 강하게 팔을 잡아준다. 머리 위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너냐, 애송이.”
살짝 눈을 뜨자, 이전에 같은 상황에서 만났던 남자의 모습이 다시 보여 텐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착각이 아니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푸름, 심지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마저 똑같다. 무엇보다 그 익숙함, 낯익음이.
도대체 어디서 만났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텐마는 무심코 남자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허나 텐마는 그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의 답답함만을 토로했다.
“저기! 혹시 우리 만난 적 있어?!”
“……이전에 성대하게 부딪혔잖아.”
“아니, 그거 말고! 그보다 더 전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텐마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남자의 표정이 정말 어이없다는 듯 변해간다. 기실 텐마도 실제로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에 인상적인 남자다. 어디에 있든 눈에 띄고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남자. 그런 고로 제아무리 텐마라도 이런 남자와의 만남을 잊어버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계속 만난 적이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건 그것 말고는 이 익숙함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텐마의 태도가 절박했기 때문일까, 남자도 이내 생각하는 것처럼 침묵에 잠긴다. 그 진지함에 텐마는 조금 두근대며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부정이었다.
“……너 같은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제 생각과 비슷한 답에 텐마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충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감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텐마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자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투가 난폭하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빠 보이는 남자의 의외의 상냥함이다. 그 때문에 텐마는 더더욱 이 기시감의 원인을 밝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궁금증 때문이라기보다는 숫제 오기에 가깝다.
남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모를 하고 있다. 큰 키가 그렇고, 갈색 피부가 그렇고, 푸른색 머리카락이 그렇다. 그 순간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가는 게 있어 텐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푸른색. 그래, 자신이 기시감을 느낀 것은 그 색에 부분한 바가 컸다. 분명 이전에 이 깨끗한 색을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른 누군가의 모습.
「뭘 하고 있지?」
분명히 이 남자와 닮았지만 인상이 전혀 달랐던, 오로지 그 존재감만이 같았던 그 사람. 텐마는 그를 알고 있었다. 물론 소개를 받았던 것도 인사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뇌가 제멋대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 그 이름은─
“……그렇구나. 당신 아스프로스인가 하는 사람이랑 닮았네.”
수수께끼가 풀리자 홀가분한 심정이 되어 텐마는 무심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본인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갑작스럽게 남자의 커다란 손이 세게 텐마의 어깨를 잡는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아프게 어깨를 죄어와 텐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평정을 갖추지 못하고 무척이나 놀란 듯 보였다.
“……너, 아스프로스랑 아는 사이냐?”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텐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자신은 그 남자랑 아는 사이일까. 서로 상대방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긍정일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서로 얼굴밖에 모른다는 소리가 된다. 고작 그 정도의 관계를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지 텐마로서는 알지 못했다.
글쎄, 하고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자 남자가 무언으로 족친다.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어 텐마는 일단 자신이 어떻게 그를 알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르바이트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뛰었던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 시각은 출근 시간에서 십분 가량 지난 시점. 뜻밖의 기량인가 생존에 대한 갈급인가. 사실을 자각한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텐마는 용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이?!”
“미안!! 다음에 설명해 줄게!!”
당황해 하는 남자에게 소리 높여 대답해주며 텐마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게 얼빠진 남자의 얼굴이 있다. 이상하게도 지각하고 있는 상황인데, 텐마는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척이나 즐거워졌다.
“……다음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고 데프테로스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간도, 장소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연락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이 두 번 반복 되었을 뿐인 덧없는 관계. 그런데도 소년은 너무나 당연한 듯 다음을 말했다. 생각이 없던 건지 무슨 방도가 있던 건지, 데프테로스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할지 생각하던 데프테로스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이 자신 있게 말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스프로스와의 관계가 궁금하다면 아스프로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애당초 조금 놀랐던 것뿐이지 절실하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데프테로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어쩐지 ‘다음’이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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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543자
쓰는 데 너무 질질 그니까 힘들어서 퇴고 안함. 그나저나 요새 글이 이상하게 계속 길어진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