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상념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순수함이 오히려 비틀림이란 걸 알고 있어도 무구하게 오로지 그것만을 추구했다. 원하는 것이 이미 삶이었다. 원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너무도 간절한 그것은 이미 기원이라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래도 계속 바라고 바랐다.
무엇보다 강하고, 깊게, 온 마음을 다하여.
─단지 그것뿐.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졌다. 바닥에서 햇빛이 만든 금빛 물결이 넘실거렸다. 창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인지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아론은 나른한 숨과 함께 어깨에서 힘을 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에 경직된 몸이 조금씩 이완된다.
항시 주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 없는 아론이 이렇게 느슨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드물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을 찢어발기려는 무리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할 때가 많다. 그 때문에 이런 시간은 매우 귀중하다. 그리고 아론은 이런 편안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무엇 때문에 가능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갑자기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머그컵이 불쑥 내밀어 졌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가까이 온 텐마의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 라고 짧게 답한 아론은 자신을 위한 커피를 받아들였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면 손바닥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온기가 전해졌다. 코끝에 인스턴트커피의 향이 맴돈다.
“그래서.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건데?”
털썩, 소파 옆자리에 앉은 텐마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몸을 기울여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들여다봤다. 한껏 가까워진 온기에 아론은 무심코 입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대답 대신 아론은 책장을 가볍게 넘겨 보였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그 움직임을 바삐 따라온다. 예쁜 사진들과 내용을 확인한 텐마가 헤에, 하고 뜻 모를 소리를 냈다.
“여행정보지? 여행 갈 거야?”
“응. 텐마랑.”
갑작스러운 말에 텐마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뺨에 아플 정도로 시선이 박혀 들어왔다. 예상대로, 라고 할까. 아론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명확하게 떠올라 있었다.
“……난 그런 계획 세운 기억이 없는데.”
“지금부터 세우면 되지 않을까?”
“……뭐야 그게.”
황당하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별로 싫지 않은 것인지 텐마는 거절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적으로 변해 잡지를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친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했다. 텐마가 준 것이니 그런 것이다. 텐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아론에겐 특별한 것으로 바뀐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낡은 소파, 싸구려 커피. 별것 아닌 것들이 이렇게나.
때문에 아론은 가끔 두려워졌다. 이렇게 커다란 존재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만약 잃게 된다면, 상실을 배우게 된다면─
아니, 괜찮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일어나지 않게 할 거니까.
상념을 끊듯 눈앞에 잡지가 불쑥 들이밀어 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올리면 텐마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여긴 어때?”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는 텐마의 모습이 참 즐거워 보여 아론은 무심코 미소 지었다. 이럴 때의 텐마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그다지 자신과 동갑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입 밖에 꺼낸다면 화낼 게 분명하므로 말하지는 않지만.
터져 나오려던 말을 미소로 무마한 아론은 얌전히 잡지를 받아들고 페이지를 살폈다. 텐마가 선택한 곳은 산속에 있는 조그만 펜션이었다. 조용하고, 근처에 계곡도 있고, 필요하다면 바비큐도 구워 먹을 수 있는 곳. 선택한 결정적 이유가 바비큐 때문이란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전부 텐마의 선택에 맡길 생각이었기에 아론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텐마가 좋다면 자신도 좋은 게 당연하다.
반사적으로 아론은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텐마가 자신과 단둘이 있는 걸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괴롭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돼버린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변화에 당황한 텐마는 있는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대로 설명하려고 했지만 원래 말로 무언가를 해결하는 데 서투른 소년의 입에서는 그게 아니라, 하는 식의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텐마를 보고 아론은 생각 외로 가느다란 소년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일생일대의 소원이야, 응?”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텐마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당황하던 텐마는 이런 걸 가지고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말하지 마, 라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평소처럼 태연하게, 밝게 웃으며.
아론은 터져 나오려는 쓴웃음을 물어 죽이며 텐마의 어깨 위로 이마를 미끄러트렸다. 이렇게 가깝게 있으면 텐마에게선 언제나 햇볕에 쬔 냄새가 났다. 그 향기는 언제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텐마가 가진 힘이다.
“둘이서만 갔다고 사샤가 토라지면 네가 달래는 거다?”
귓가에서 울리는 장난스러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된 아론은 팔을 뻗어 텐마의 허리를 안았다. 텐마는 몸을 조금 움찔거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등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아 왔다. 품 안에 있는 온기에 마음이 녹아 흐른다.
이따금 텐마는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것은 그다지 틀린 생각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알고, 괴로움을 알고, 추악함을 알고, 비통함을 안다. 알면서도 그 모두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해주고, 마지막에는 깨끗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소년은 그런 존재다. 어떤 부정함도 통하지 않는, 이름 그대로 푸른 하늘을 나는 순백의 천마 Pegasus.
"텐마.“
누군가가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결코 한 사람만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존재. 그래도─
“텐마.”
아론은 마치 매달리는 것처럼 계속 텐마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 안에 있는 회한과 상처를 능숙하게 감추기에 아론은 아직 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웃음으로 감추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도 그것마저 텐마가 받아주니까 괜찮았다.
텐마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목덜미에 닿은 머리카락이 간지러운지 소년이 킥킥 웃음을 흘린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론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상념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순수함이 오히려 비틀림이란 걸 알고 있어도 무구하게 오로지 그것만을 추구했다. 원하는 것이 이미 삶이었다. 원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너무도 간절한 그것은 이미 기원이라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래도 계속 바라고 바랐다.
무엇보다 강하고, 깊게, 온 마음을 다하여.
그러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을 거다.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다. 모두가 바라는 것,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것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