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스쿨 벨이 울려 야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심코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지 수업 중간의 기억이 없다. 노트를 내려다보자 필기도 흘러가는 글씨로 엉망진창이다. 글자라기보다는 완전 상형문자다. 아니, 한자는 상형문자가 맞긴 하지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증거다. 실없는 생각을 끊어내듯 야토는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때마침 선생님이 짤막한 인사를 마치고 교실을 나선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그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순식간에 교실 안이 소란으로 가득 찬다. 야토도 조금 긴장하고 있던 몸을 책상 위로 무너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등 뒤로 강한 충격이 덮쳐 야토는 비명을 내질렀다.
“악!!!”
“아,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어조로 텐마가 사과한다. 야토는 상당한 분노를 담아 텐마를 찌릿 노려보았다. 허나 이 태평한 친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헤헤헤 실없이 웃어 보이는 텐마를 보고 야토는 한숨을 내쉬고는 노려보는 걸 포기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노려본들 제 힘만 빠질 뿐이다.
텐마가 주인이 없는 의자를 가까이 끌어다 앉는다. 그러더니 이내 들고 있던 봉지에서 빵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크림빵에 단팥빵에 카스텔라인 모양이다. 참으로 클래식한 취향, 이라기보다는 매점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저 정도밖에 없었던 거겠지.
빵을 조금 질린 듯 바라보던 야토도 곧 가방에서 자신의 도시락을 꺼냈다. 오늘 아침 누나가 직접 싸준 도시락이다. 자신과는 양도 질도 다른 도시락을 보고 텐마가 부러운 듯 눈을 빛냈다.
“오늘은 뭐 싸왔어?”
“……너한텐 안 줘.”
“치사하긴.”
반사적으로 도시락을 끌어안는 야토를 보고 텐마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토는 철벽 방어태세를 풀지 않았다. 배고픈 텐마에게 도시락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덕분이다.
좀생이, 그러고도 친구냐, 라며 텐마가 한참을 툴툴댄다. 그러나 야토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포기했는지 이내 빵 봉지를 뜯어 우적우적 입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경계를 풀던 야토는 문득 한사람 분의 투덜거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레굴루스는?”
“웅? 우어엉 으왕.”
“……삼키고 말해, 멍청아.”
아기 수준의 옹알이를 하는 텐마에 야토는 짜진 눈을 했다. 곧 죽어도 성장 안 하는 녀석, 하고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야토에 타박에 텐마는 몇 번 씹지도 않고 입에 들어있던 빵조각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연다.
“응? 그러고 보니, 라고 말했어.”
결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네. 한숨을 내쉬며 야토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레굴루스가 둘에게로 다가왔다. 다만 어째서인지 상태가 이상하다. 평소에는 텐마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실없는 웃음을 뿌리고 다녔는데 지금은 먹구름이라도 낀 듯 한껏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분 탓인지 반짝거리던 금발도 빛을 잃은 듯한 느낌이다.
예상 밖의 상황에 야토와 텐마는 무심코 시선을 마주쳤다. 뭐야, 쟤 왜 저래? 내가 알겠냐? 친구들 사이에 빠른 눈짓이 오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굴루스는 텐마와 야토가 격렬한 무언의 토론을 벌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져 클래스메이트들의 시선이 일순 집중됐다가 흩어진다.
“레굴루스?”
우와 아프겠다, 라고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텐마를 무시하고 야토는 일단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의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호명에 레굴루스의 어깨가 움찔 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굴루스는 눈동자에 눈물을 한껏 매단 채 야토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으앙~ 어떡해, 야토~”
“뭐, 뭐야?!”
갑작스러운 친구의 행동에 야토는 심히 당황했다. 레굴루스가 우는 건 지난번에 자전거를 타다 굴러서 팔이 골절되었을 때도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야토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레굴루스의 행동이 좀 더 대담해진다.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야토의 교복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우와아아아, 하고 야토는 가벼운 패닉에 빠졌다.
뿌리치면 좋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겠다. 제 단호하지 못함을 저주하며 야토는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텐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간절한 눈길에 마음이 움직인 것일까, 조금 귀찮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텐마가 몸을 움직여 둘에게로 다가왔다.
“진정해, 레굴루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텐마가 등을 쓰다듬어주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자 그제야 레굴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코끝도 눈가도 완전히 새빨갛다. 그래, 좀 말해봐라, 하고 재촉하자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레굴루스가 입을 연다.
“……도시락 놔두고 왔어.”
야토는 그대로 굳었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뇌가 제멋대로 연산을 거부한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텐마를 바라보자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텐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난리를 친 게 고작 도시락 때문이라고?
상황을 이해하고 야토는 완전히 폭발했다.
“……이 멍청이가!! 고작 도시락 가지고 난리 치지 말라고!!!!”
“고작 도시락이 아니야! 시지포스가 열심히 만들어 준거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자 레굴루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쳐 왔다. 아까까지는 울려고 했던 주제에 지금은 침까지 튀겨가며 화내는 꼴이 웃기기도 하다. 물론 야토도 레굴루스가 시지포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도시락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고작 두고 온 것 가지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씨근덕댄다. 서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탓에 주변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때, 부지불식간에 텐마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좋은데 일단 좀 먹고 하자.”
텐마의 말에 노린 것처럼 누구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자각하자 견딜 수 없는 허기가 강하게 밀려들었다. 무심코 어깨에서 힘을 뺀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배고파~”
칭얼거리며 레굴루스가 책상 위로 엎드린다.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더니 텐마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 먹던 빵을 다시 집어 들었다. 별다른 수가 없어 결국 야토도 자기 자리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음식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무엇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누나의 도시락은 언제나 밀어 터질 정도로 속이 꽉꽉 차있다. 그뿐만 아니라 야토가 좋아하는 반찬도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아, 생각해보면 계란말이는 텐마가 좋아하는 거고 소시지는 레굴루스가 좋아하는 거네. 무의식중에 도시락과 제 앞에 앉은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그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야토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반 줄게.”
“응? 아, 땡큐. 야토.”
“레굴루스, 단팥이 좋아 크림이 좋아?”
“단팥!!”
야토는 도시락 뚜껑에 밥과 반찬을 덜어 레굴루스 쪽으로 밀어주었다. 텐마도 제 몫으로 사온 빵과 우유를 내민다. 자연스레 건네진 도시락의 반과 단팥빵을 받고 레굴루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친구를 보고 텐마도 웃고 야토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