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피카가 시지포스에게 연락을 받은 건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무슨 일인가 했지만 실제 연락 내용 자체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이전에 알바피카의 양부인 루고니스에게 빌린 책을 우연히 찾았는데 바빠서 전해주러 갈 시간이 없으니 언제 알바피카가 찾아와주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알바피카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이를 승낙했다.
원래 시지포스와 인연이 있는 것은 알바피카가 아니라 루고니스 쪽이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루고니스의 수많은 제자 중 하나였던 시지포스가 루고니스와 알바피카의 집에 서책을 빌리러 드나들게 된 것이다. 알바피카가 시지포스를 소개받은 것은 그렇게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으니 두 사람이 무엇을 계기로 친해졌는지는 알바피카도 몰랐다. 본디 호기심 많은 성격이 아니라 묻지도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사이가 좋았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알바피카와 시지포스의 관계는 고작 그 정도였다. 루고니스를 사이에 둬야만 성립하는 관계. 루고니스와 사별한 후에는 이따금 안부만 묻는 고작 그뿐인 관계. 그럼에도 알바피카가 소포로 부쳐도 되는 물건을 굳이 가지러 가겠다고 승낙한 것은 혼자 남겨진 자신을 염려하는 시지포스의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본인이 찾아오지 않은 건 정말 바빠서겠지만─ 교제는 깊지 않았지만 잘 알고 있다. 시지포스는 본래 그런 남자다. 지나치게 무르고 상냥한.
어차피 학교도 방학 중이었고, 미루면 미룰수록 가지 않을 자신을 알았기에 알바피카는 연락을 받은 그 주 주말에 시지포스의 집을 방문했다. 이전에 두세 번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가볍게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잠시만! 하는 쾌활한 목소리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지포스가 조카와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므로 알바피카는 자연스럽게 레굴루스인가, 하고 생각했다. 허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레굴루스가 아니라 전혀 안면이 없는 다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존재의 등장에 당황한 알바피카는 일순 행동을 멈췄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놀란 얼굴을 하고 가만히 알바피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묘한 침묵이 떨어졌다. 소년이 한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알바피카는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이곳은 시지포스의 집이 아닌가?”
“아, 맞아. 시지포스, 손님이야!!”
마지막 말은 알바피카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소년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다. 방금 놀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경쾌한 움직임을 알바피카는 황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드러난 등과 활짝 열린 문이 너무나 무방비하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알바피카는 일단 얌전히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어서 와, 알바피카.”
실내로 들어서자 시지포스가 웃으며 맞아준다. 그에 가볍게 응답하면서도 알바피카는 시종 낯선 소년을 곁눈질로 쫓았다. 이미 방문자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소년은 낄낄대며 레굴루스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퍽 친밀하다.
“왜 그러지?”
엉뚱한 곳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시지포스가 물어온다. 알바피카는 그제야 남자에게로 의식을 돌렸다.
“아니…….”
망설임은 있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소년은 누구지?”
처음에는 또 다른 조카이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지포스와 그다지 닮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지포스에겐 죽은 일리아스 외에는 어떤 형제도 없다는 사실을 알바피카는 알고 있었다.
아아, 하고 시지포스가 무언가 알아차린 얼굴을 했다. 온화한 얼굴 위로 미소가 어린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 부드러운 미소와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을 띄운 얼굴은 쉽게 말하자면 그냥 팔불출이었다.
“레굴루스의 친구다. 이름은 텐마.”
그런가. 알바피카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그 대답이 제일 먼저 떠올렸어야 할 가정이었지만 소년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던 데다가 이 집에 익숙해 보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년의 천성 탓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어쨌든 너무 참견하는 것도 실례가 될 거라고 알바피카는 이후 소년에 대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 후, 책만 받고 돌아가려고 했던 알바피카는 이왕 왔으니 저녁이라도 먹고 가란 시지포스에 말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할 명분이 몇 가지나 떠올랐지만 어차피 명분에 불과한지라 이전과 같은 이유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지포스도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던 거겠지.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시지포스는 문자 그대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으므로 계속 알바피카만 신경 써줄 수는 없었다. 손님을 불러놓고는 상당히 무례한 태도지만 알바피카는 그를 이해했고, 덕분에 저녁 식사까지 몇 시간 동안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게 되었다.
물론 레굴루스와 텐마의 존재 또한 있었지만 소년들 역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거는 것조차 저어됐다. 물론 둘이 그냥 시시덕거리고 놀고 있었더라도 알바피카의 성격상 낯선 소년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결국 알바피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거실 소파 한쪽에 얌전히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별다른 할 일도 없었기에 알바피카는 무료함을 때우려 양부의 책을 펼쳤다. 반쯤은 무의식으로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을 눈으로 좇는다. 귓가에는 소년들의 대화와 거기에 간간이 섞인 웃음소리가 닿고 있다. 그 사실이 어쩐지 알바피카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공기에 잠겨 신체가 이완된다. 좀처럼 느끼지 못하던 일상의 평화로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자신에 집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이런 감각을 어째서 타인의 집에서야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에 입술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멍하니 문장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그늘이 졌다. 무언가, 하고 고개를 들고 보니 어느새 다가온 텐마가 멋쩍은 모습으로 바로 앞에 서 있다. 허를 찔린 알바피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지?”
그래도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여 묻자 소년답지 않은, 수줍음을 가장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저기, 음, 대학생? 어쨌든 중학교는 나왔지?”
“……? 당연히 나왔지만…….”
도무지 질문의 의미를 알지 못해 알바피카는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의무교육인 이상 어지간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누구든 중학교까지는 다니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굳이 물어볼 것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어째서 그런 실없는 것을 물어보는 지, 알바피카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본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는지 어중간한 대답에도 소년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잘됐다! 저기, 공부 좀 가르쳐줘!”
“하?”
텐마가 고개를 숙여 부탁한다. 어이가 없어 소년의 뒤편을 보자 레굴루스도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다. 그 순간 알바피카는 지금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아마 공부하다 막힌 부분이 있는 데, 평소라면 시지포스에게 물어볼 것을 지금은 시지포스가 바쁘니 상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한가한 알바피카가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대충 그런 얘기일 터다.
잠시 고민하던 알바피카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데다 한가한 것도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소년들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적어도 시지포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리고 알바피카가 이를 후회하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이 공식을 사용해서…….”
“왜?”
“왜라니 아까 설명했잖아…….”
“알바피카! 가르쳐준 대로 했는데 답이 없어!”
“……다시 풀어.”
글렀다. 정말로 답이 없다. 있는 것은 그저 학생으로서 낙제점인 두 소년과 절망뿐.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한 알바피카는 좌절했다.
아까부터 알바피카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지만 소년들의 실력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천재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던데 어째 이 둘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모른다. 선생님이 문제인가, 학생이 문제인가. 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그래도 천성이 성실한 알바피카는 어떻게든 소년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남보다 배는 서투르다면 이쪽도 두 배로 노력해서 가르치면 될 뿐이다. 비록 노력이 보상받을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한숨을 삼킨 알바피카는 곁눈질로 텐마의 모습을 살폈다. 끙끙대며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다. 다만 머뭇거리며 여백을 채워나가는 연필은 정답과는 전혀 다른 답을 적고 있었다.
“텐마. 그 문제에는 그 공식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
사실을 지적하자 텐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연필 끝을 깨문다. 아무래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모습만은 칭찬할 만 했다. 알바피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격려의 뜻으로 텐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기, 알바피카. 이거 전혀 모르겠어.”
동시에 옆에서 레굴루스가 소매를 잡아끈다. 알바피카는 그 요청에 따라 다시 한 번 끈기 있게 설명을 반복했다. 하지만 역시나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레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귀엽게만 느껴졌을 애교 섞인 몸짓이 지금은 고소만을 유발했다.
그래도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면 알바피카가 이 소년들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능력 부재에 대한 골치가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압도한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과 어울리는 게 서툰 알바피카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소년들의 밝은 천성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일을 마치고 나온 시지포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의외의 상황에 조금 놀란 듯하던 남자가 이내 빙긋 웃어 보인다.
“셋이서 잘 놀고 있었구나.”
지금 이 순간, 알바피카는 저 남자의 얼굴을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끝났다!!”
“……끝났다.”
소년들과 전혀 다른 탄성을 내뱉으며 알바피카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다. 움직인 것은 팔뿐인데 이상하게 전신이 탈력 상태다. 두뇌노동이 너무 지나친 탓이다.
달성감조차 전혀 못 느끼고 있는 알바피카의 귀로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전혀 도와주지 않았던 시지포스의 얄미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텐마도 저녁 먹고 갈 거지? 물론! 소년과 남자가 대화하는 소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소란스럽고 정겨운 대화에 어쩐지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알바피카.”
“응?”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레굴루스가 말을 걸어 알바피카는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소년들이 가까이서 알바피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다.
“숙제 도와줘서 땡큐!”
“덕분에 살았어!”
감사를 표하며 밝게 웃는 얼굴이 무구하다. 그대로 달려들 것 같은 고양이, 혹은 강아지가 두 마리. 알바피카는 무심코 미소 지으며 소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와아─! 하고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울린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텐마와 레굴루스가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가까워진 체온이 어딘가 그리웠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온기를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분명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터인데도 한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 사실에 알바피카는 쓴웃음을 삼켰다.
가슴 속에서 그리움과 원망과 애정이 흘러넘친다. 말로는 탄생되지 않을 마음은 아직도 많이 있었다. 이를 토해내지 못하는 건 자신이 말재주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은 단지 담아두기만 해도 괜찮으니까.
떠도는 상념을 가라앉히며 알바피카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소년들과 함께한 시간은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을 삼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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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404자 왜 최근엔 글을 쓰면 가볍게 삼천자는 나오는 것인가
페렐럴 설정이라면 독혈은 존재하지 않을테니 알바피카도 조금 더 편하게 타인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해도 여전히 서툴지만(웃음) .....이라기보단 본심을 말하자면 그저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복작복작 모여있는 게 좋았으므로^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