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부드러운 조명, 온화한 공기,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냄새. 이전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저녁의 풍경. 무심코 넋을 놓고 있는데, 곧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지금 상황을 만든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 데프테로스!”
“아. 그, 래……?”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데프테로스는 텐마의 모습을 확인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입이 얼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이. 그건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묻자 텐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새하얀 레이스가 나풀나풀 춤춘다.
“에이프런이잖아?”
“그걸 물은 게 아니라!! 갑자기 웬 에이프런이냔 소리다!!”
“아스프로스가 줬어.”
모처럼 선물 받았으니까 안 쓰면 아까워서 입었어. 라며 텐마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다. 뭘 의기양양해 하는 거냐고 생각하면서도 데프테로스는 현재 상황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이건 분명 놀리고 있는 거다. 텐마가 아니라 자신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저런 에이프런이라니. 귀여운 캐릭터에 리본에 레이스까지 달린 에이프런은 아무리 봐도 남자에게 줄 만한 물건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곧 서른 줄에 접어들 남자가 살만한 물건 자체가 아니었다. 저걸 살 때 주변에서 도대체 어떤 시선으로 봤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아스프로스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남자이니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라고 할까, 애당초 주위 시선을 신경 쓰는 남자도 아니지만.
굳이 이런 데서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지 않냐고 생각하며 데프테로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모습에 텐마가 슬쩍 눈썹을 모은다.
“괜찮아?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그럼 목욕 먼저 할래?”
“………………아니, 됐다.”
“그래? 그럼 곧 저녁 다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고하고 텐마가 부엌으로 들어간다. 소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데프테로스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더는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신혼부부 같은 플레이. 고작 에이프런이 하나 추가됐을 뿐인데!!! 더 열 받는 건 마냥 싫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도저히 말로는 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을 안고, 어쨌든 나중에 아스프로스에게 반드시 한마디 해주겠다고 데프테로스는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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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869자, 에이프런 귀엽죠, 에이프런
붉은 달이라는 만화책에서 여주인공이 여차저차한 이유로 남주인공이랑 밤을 보내면 머리카락이랑 손톱이 자라는 데, 그 설정으로 써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사실 여주인공이라지만 중성에 가까운데... 에라 모르겠다
아침에 잠에서 깨서 보이는 풍경은 대개 같았다. 창문 틈새로 희미하게 흘러드는 햇살, 눈에 익은 천장, 거의 외워버린 가구의 무늬, 옆에서 잠들어 있는 조그만 몸과─ 새하얀 시트 위로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
‘……또 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데프테로스는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색색 조그만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텐마의 얼굴과 기다란 머리카락이 또렷이 보였다. 소년을 가만히 내려 보다 데프테로스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간지러운 감촉이 남았다.
허리까지 늘어진 이 머리카락은 십 년은 족히 기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부 하룻밤 새에 자란 것이다. 원인은 모른다. 딱히 짐작이 가는 곳도 없다. 막을 방법도 모르고, 아무리 잘라도 끝없이 계속 자라났다. 텐마가 데프테로스와 같이 밤을 보낸 날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변화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는 것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딱히 몸이 안 좋아지거나 하는 일도 없으니 별문제는 아니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머리카락을 길렀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문득 텐마가 눈을 떴다. 시선이 주위를 방황하더니 곧 붉은색 눈동자가 데프테로스를 잡고 가늘어진다. 부드러운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좋은 아침.”
“아, 그래.”
자그맣게 하품을 하며 텐마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소년의 몸에 엉켰다. 동시에 설핏 굳어버리는 어깨를 보고 데프테로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나올 말이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또, 자랐어…….”
‘역시나.’
내심 탄식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텐마가 제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내버려 뒀다간 그대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 같은 모습이다. 허나 워낙 익숙하기에 데프테로스는 그대로 텐마의 행동을 모른 척해버렸다.
어째서인지 텐마는 제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게 특이한 일도 아닌데 그랬다. 뭐, 과민하게 반응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본인의 기질을 생각해 보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왜 맨날 자라는 거냐고!!”
한참을 굳어 있더니 이제는 뭐가 분한지 베개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한다. 그런 텐마를 곁눈질하던 데프테로스는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슬슬 포기하고 기르는 게 나을 텐데.”
“그렇지만 귀찮다고!!”
그럼 그렇지. 즉답이 되돌아와 데프테로스는 이제 말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 매번 자르는 게 더 귀찮지 않겠냐는 말은 텐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하지 않는다.
아침 햇살이 침대 위로 미끄러진다. 의외로 새하얀 피부는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였다. 군살 없이 쭉 뻗은 팔다리. 짙은 색 머리카락이 아직 어림이 남은 나신에 수초처럼 휘감겼다. 그에 넋을 놓고 있으면 느닷없이 뇌리에 신화 속의 생물─ 인어가 떠올랐다. 허나 데프테로스는 바로 제 생각을 부정했다.
이 소년에게는 어둡고 축축한 바다 밑보다는 밝은 태양 아래가 훨씬 어울린다. 빛과 같은 미소도, 제멋대로라고 느껴질 정도의 자유분방함도. 텐마의 존재, 그 자체가. 모든 것이.
돌연 데프테로스는 떠드는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텐마가 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 이어 나오는 목소리도 퉁명스럽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머리카락 자르는 거나 도와달라고.”
“……아아, 알았다.”
데프테로스는 선선히 대답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한, 저 기다란 머리카락을 이 손에 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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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361자, 사실 텐마에게 긴 머리가 어울릴지 안 어울릴지 나도 모르겠다. 여체화라면 무조건 긴 머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