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아테나의 곁에 있던 집사가 아니라 훨씬 젊은 청년이다. 낯설었지만 기억을 더듬으면 두어 번 정도 만났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직접적으로 대면한 게 아니라 어깨너머로 본 것이었기에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가 님.”
청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가 긴장하고 있다는 건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별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줄줄이 말을 쏟아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가씨께서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셔서 현재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기다려 달라고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전언 내용은 부탁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애초에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긍정에 어딘지 안심한 얼굴로 청년이 퇴장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응접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들었다. 시선의 주인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제일 위쪽에 소년이 앉아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씩씩해 보이는 소년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다리는 아무렇게나 늘어트리고 있고, 항상 생명력으로 반짝이던 붉은 눈동자도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의아해하며 그는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야.”
그제야 얼음이 깨지듯 소년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 카논.”
정확하게 이름이 불려, 카논은 괜히 너스레를 떨며 계단을 올라갔다.
“뭐야, 눈치채고 있었는지.”
세이야가 이름을 부르는 데 조금도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기에 어쩐지 맥이 빠져버렸다. 형으로 착각 당하는 일은 이미 일상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어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소년이 째릿 이쪽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속이는 건 나빠!”
“아니, 딱히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어. 부정할 틈이 없었던 것뿐이다. 너무 당연하게 사가라고 불러서 말이지.”
말하면서도 카논은 거기에 시기나 자조가 섞여있지 않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예전이었다면 착각 당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참을 수 없었을 텐데. 단순히 생각이 하나 바뀐 것으로 이런 것까지 바뀌는 걸까. 카논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심경을 세이야가 알아챌 리가 없다. 때문에 소년은 단순하게 하나의 사실만을 고했다.
“그야 다들 원래 사가가 온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도 그렇군. 이미 약속된 방문자와 똑같은 얼굴이 왔다면 보통 본인이라 생각하지 쌍둥이가 왔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단번에 자신을 알아본 세이야가 특이한 거겠지. 거기까지 떠올리던 카논은 불현듯 세이야가 풀이 죽어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과연. 사가가 오지 않아서 실망했나 보지?”
“에?! 아니, 그건…….”
놀림조로 얘기하면 단번에 세이야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참 순진한 반응이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카논은 굳이 그것까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다.
한참을 허둥거리던 소년이 곧 이쪽을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핀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다. 카논은 치미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별로 카논이 싫은 건 아니야.”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가 이 소년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친하게 지내는 형 같은 존재보다 사랑하는 연인이 더 그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른 좋은 녀석들도 많은데 굳이 사가를 고른 심정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낼 순 없었다. 때문에 카논은 그저 온갖 감정을 담아 소년의 머리카락만 쑤석였다. 손바닥 아래에서 경쾌한 웃음이 터졌다. 그를 따라 카논은 한쪽 입귀를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뭐, 오늘은 나로 참아라.”
“응! 나 카논도 좋아!”
그리 고하며 무구한 표정을 짓는 소년은 역시 우형愚兄에겐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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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491자, 카논은 이미 거의 아버지(?)의 마음
달려오면서 세이야는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다고 사가는 생각했다. 그래, 익숙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저 소년을 웃게 하는 것보다 울게 하는 데 능숙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사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 앞에 놓인 길은 한정적이었고,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더욱 적었다. 때문에 자신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설령 그 결과 소년이 울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가는 이 역시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를 후회하는 일은 쉬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나은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 후회가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라는 걸 깨닫는 것조차 쉬웠다.
과거는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더 좋게 바꾸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럼에도 사가는 때때로 과거를 뒤바꾸는 상상을 했다.
첫 만남은 어땠던가.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희미하게 경탄했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마주침은 적었다. 아주 드물게, 잊을만하면, 그것도 먼발치에서야 겨우 조그만 소년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던 그때에도 사가는 어렴풋한 예감을 느꼈다. 확신이라 불러도 좋았다. 소년은 틀림없이 희망이었다.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소년의 성장을 지켜봤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선은 단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바랐을 뿐이다. 네가 머지않은 미래에 빛이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소년이 크로스를 수여받던 날, 사가는 기쁨과 참담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소년이 그만큼이나 성장했음은 기뻤으나 마스크 뒤에 숨어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다. 좀 더, 좀 더 제대로 된 위치에서, 제대로 얼굴을 밝히고 소년을 축하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나. 그러나 누구도 과거는 바꿀 수 없었기에, 사가는 그저 의례적인 충고만을 남길 수 있었을 뿐이다.
그 모든 것도 이젠 과거가 되었다.
마침내 소년이 자신과 대등하게 마주했을 때, 사가는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기쁨과,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기쁨과, 다시 소년을 만났다는 기쁨에.
그러나 마지막까지 괴롭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역시 슬픔으로 남았다.
하지만 최후의 끝에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이것은 기쁨일까.
세이야가 자신에게로 뛰어온다. 조그만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자아낸다. 뺨이 눈물로 젖어있다.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그러나 무엇보다 든든한 손이 뻗어온다.
해서 사가는 웃었다. 분명 제대로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정도는 웃어주고 싶었다. 최소한 깊은 후회는 남기기 싫었으니, 자신은 괜찮다고. 그리고 욕심을 부려, 네가 웃어주길 바란다는 소망을 담아. 모든 후회와 슬픔을 버리고 오직 소년의 미래만을 기원하며.
그리하여 사가는 세이야의 손을 잡지 못하고 빛으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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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160자, 하데스 성에서, 최후의 인사를.
“좋아해.”
함께 걷던 도중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데프테로스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조금 멍청하게 깜빡거렸다. 대답은 몇 초 후에나 떨어져 내렸다.
“그런가.”
무성의한 대답에 텐마는 화를 내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화가 날 리가 없다. 중요한 것조차 제대로 말하지 않는 무뚝뚝한 남자다. 그랬기에 로맨틱한 대답은커녕 “나도.”라는 짧은 반응조차도 돌아오지 않을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타박 당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
딱히 말이 없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라고 생각한 다음 순간 데프테로스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호쾌하게 넘어졌다.
“데프테로스?!”
텐마는 깜짝 놀라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그사이에 일어서려던 데프테로스가 다시 한 번 삐끗했다.
“괜찮아?”
대답은 없었다. 더불어 다시 일어나려는 시도도 없었다. 데프테로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데프테로스를 보고 텐마는 가벼운 패닉에 빠졌다. 솔직히 넘어진 것부터 시작해서 이상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아니, 도대체 왜. 걸릴만한 것도 없는 데 갑자기 왜 넘어진 거야. 게다가 왜 안 움직여. 넘어지면서 어디 다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안 움직일 리가 없는데.
초조해진 텐마는 억지로라도 데프테로스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 소년의 눈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잠깐 사고가 멈춘다. 어, 이거 설마─
“……당신 혹시 부끄러워하는 거야?”
“…………시끄러워.”
그제야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렇게 말해서야 긍정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순간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저히 들끓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때문에 텐마는 참으려는 노력조차 없이 마음을 따라 남자를 강하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