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정당한 이유로 야토가 분노했다. 옆에서 그런 야토를 말리고 있는 유즈리하도 말은 안 하지만 심적으로는 절절히 동의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결에 둘의 분노와 한심하단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레굴루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내심 찔리는 게 있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멍청한 짓을 하긴 했었다.
현재 세 사람이 있는 곳은 항상 점심을 같이 먹던 학교 옥상이다. 다만 점심시간이 아니라 수업 중에 몰래 모였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다. 나름대로 모범생이라 할 수 있는 야토와 유즈리하지만, 레굴루스가 텐마를 만났다는 단 한마디에 두말하지 않고 수업을 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고작 이거다.
야토는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텐마를 만난 것도, 텐마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정보를 물어온 것도 좋다. 훌륭하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본인을 놓쳐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물론 전적으로 레굴루스의 탓이라 보긴 어려웠지만 간절한 만큼 원망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야토는 그를 억누르며 레굴루스에게 들은 정보를 다시 되새겨 보았다.
텐마는 전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함. 알고 보니 근처에 사는 것 같음(추정)
……의미가 있는 거냐, 이거. 전부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이다. 고작 이 정도의 정보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경찰은 고생도 안 하겠지. 밑도 끝도 없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라 야토는 무심코 현실도피를 했다.
“애당초 그 녀석 정말로 텐마가 맞았던 거야?”
“내가 텐마를 잘못 볼 리가 없잖아!!”
확실히 그건 그렇다. 레굴루스의 즉답에 야토는 무안해져 시선을 돌렸다. 평소 레굴루스가 텐마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 탓이다. 설령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아도 마음의 깊이는 야토나 유즈리하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욱 깊게.
하지만 그래 봤자 현실은 시궁창이지. 마음이야 어쨌든 만나고 싶어도 전혀 만날 수 없으니까. 다시금 깨달은 잔혹함에 야토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때, 둘의 다툼 아닌 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유즈리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어쨌든 확인을 위해서라도 텐마와 다시 만나야 할 것 같긴 하군.”
“하지만 어떻게? 아는 것도 하나 없잖아.”
“교복을 알면 학교 정도는 특정 가능하다. 레굴루스, 그때 텐마가 뭘 입고 있었는지 기억하나?”
설마, 하면서도 야토는 레굴루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기대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시선이 레굴루스에게 쏟아진다. 그에 조금 놀란 것 같던 레굴루스가 잠깐 끙끙대더니 이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혀 기억 안 나!”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예상 범위 내의 일이라 야토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어깨를 떨어트렸다. 이제는 지쳐서 화낼 힘조차 나지 않는다.
조금 전 정리했던 정보에 한 줄이 덧붙여진다. 추가정보 없음. 어쩌면 좋냐. 해답을 구하듯 야토는 유즈리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유즈리하가 옅게 웃는다. 상황에 맞지 않게 어딘가 시원시원하게도 느껴지는 미소였다.
“결국 근처 학교를 전부 뒤질 수밖에 없겠군.”
“……진짜냐. 아니, 그 녀석이 잠깐 이 도시에 들린 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상큼함이 반짝반짝.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말에 야토는 좌절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반할 정도로 예쁘게 웃지 말라고!!! 옆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레굴루스가 괜히 밉게 느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셋은 텐마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레굴루스의 빈약한 기억력 덕분이 아니라 무식할 정도의 노가다와 범법에 가까웠던 어른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이 마치 지옥도 같았다고 훗날 누군가는 서술했더랬다.
낯선 교문 앞에서 야토는 유즈리하와 레굴루스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다른 교복을 입고 있기 때문인지 많은 시선이 세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야토는 지금 거기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비슷한 생각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이곳에 텐마가 있다. 자신들의 학교에서 고작 30분 거리. 도무지 멀다고 할 수 없는, 지나치게 가까운 이곳에. 어떻게 자신들은 이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그 녀석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그 녀석을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걸까. 수많은 상념과 괴로움,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호흡조차 괴로울 지경이다.
야토가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건 하교하는 인파 속에서 한 소년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멀리서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보일 리 없을 텐데도 유난히 선명한 노을 색 눈동자. 마치 영화 속에서 배경을 전부 흑백으로 만들고 배우에게만 색을 입힌 효과와 같은 광경. 가슴이 뛰었다. 향수가 일었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그 모습.
“거봐! 잘못 본 거 아니지?”
“……그렇군.”
레굴루스와 유즈리하의 대화가 아득하게 들린다. 그리움이 지나치면 원망이 될 수도 있단 사실을 야토는 그때 처음 알았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화내고 싶은 감정. 그럼에도 반갑게 끌어안고 싶어서.
“텐마!!!”
야토가 걸음을 옮기기보다 먼저, 레굴루스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텐마가 이쪽을 쳐다본다. 곧 소년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과거에 자신들을 보며 웃던 것과는 정반대로.
순간적으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야토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텐마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급작스럽게 신체에 제동이 걸린다. 삽시간에 엉망으로 엉켜버린 머리는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텐마는 착실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다.
“넌 저번의…….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수상쩍다고 텐마가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여전히 변명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제일 곤란한 것은 레굴루스가 도저히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떻게든 찾았어!”
“찾아? 왜?”
“텐마를 만나려고.”
“그러니까 그게 왜냐고……. 정말 어디서 만난 적이라도 있어?”
위험!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걸 느낀 야토와 유즈리하는 강제로 레굴루스의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대화를 끊으려고 했다. 허나 썩어도 준치, 과거의 골드 세인트는 입을 터는 것도 빨랐다.
“응! 전생에서!”
“……………………하?”
이게 뭔 헛소리야. 라는 속마음이 텐마의 얼굴에 똑똑히 떠오른다. 여전히 읽기 쉬운 녀석이었지만─ 마치 사기꾼을 보는 듯한 시선에 야토는 수치로 죽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미안. 역시 사람 잘못 본 것 같네. 그럼 이만.”
“잠깐 잠깐 잠깐.”
바로 몸을 돌리는 텐마를 유즈리하가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질 순 없다는 심정이 절절히 전해질 정도다. 그 뒤에서 야토는 모든 일의 원흉을 남몰래 한 대 쥐어박았다. 당연히 레굴루스가 짧게 항의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텐마. 마음은 이해하지만 잠깐 이야기를 들어라.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어!! 이상한 거짓말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네 녀석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밖엔 없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 했겠지. 아니, 애초에 너에게 거짓말을 해봤자 이익도 없고.”
“그건……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뭐어, 역시 그렇지. 얼굴까지 붉혀가며 소리를 지르는 옛 친우를 보고 야토의 시선이 잠깐 허공으로 향했다. 확실히 저게 정상적인 반응일 테지만 이럴 때만 경계를 세우는 텐마가 조금 미워졌다. 예전에는 그렇게 둔하고 멍청해서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들였으면서!! 물론 이런 상황만 아니면 조금은 똑똑해졌다고 칭찬이라도 해주겠지만!!
어쨌든 내버려둘 수는 없어 야토는 유즈리하에게 가세하기 위해 한 발짝 내디뎠다. 동시에 텐마가 거친 몸짓으로 자신을 잡고 있던 유즈리하의 팔을 떼어 낸다.
“그리고 설령 너희 말이 사실이라도 지금의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
아─
가슴 속으로 무거운 돌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야토!!”
유즈리하가 강하게 어깨를 부여잡았다. 야토는 그제야 방금 소리를 지른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야토는 심호흡을 내쉬며 텐마를 보았다. 텐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입가를 일그러트리고, 불만과 화로 점철된 표정.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은 자신들인데, 여전히 가슴은 화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허나 잘못은 자신이 했음을 알아서.
텐마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텐마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말은 터무니없는 얘기뿐이고, 신용할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 터이다. 제아무리 간절하게, 절실하게 외친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은 그런 텐마의 반응에 안타까워만 할 뿐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므로. 그 누가 이런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불합리한 분노가 끓었다. 네가 왜, 너만은 그래선 안 되는데, 우리가 사랑한 너만은. 네가 모든 걸 부정해버리면─
“그러네.”
갑자기 순수한 긍정이 떨어졌다. 야토는 깜짝 놀라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가장 분노할 거라 생각했던 녀석이 의외로 가장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얼마나 의외였는지 텐마조차 놀라워하고 있다.
평소처럼 철없는 것이 아니라 어른스럽고 깨끗한 레굴루스의 얼굴. 기묘한 감각에 야토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레굴루스가 희미하게 웃는다. 넋을 잃을만한 미소였다.
“하지만 우리도 거짓말하는 건 아니니까.”
“……라는 건?”
“응. 텐마가 알아줄 때까지 쫓아다녀도 되지?”
이번에야말로 텐마가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 * *
텐마는 선반 위에 있는 상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저걸 꺼내야 하는 데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 있는 힘껏 발꿈치를 들어도 겨우 손끝이 닿는 정도다. 도대체 저걸 왜 저기에 둔 거람. 속으로 이전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을 퍼부으며 다시 발돋움을 하자 상자에 손가락이 걸렸다. 그에 안심하며 텐마는 팔에 힘을 줬다. 이대로 꺼낼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무게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머리 위로 상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텐마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 위험해. 텐마.”
예상했던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발랄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동시에 허리에 감긴 팔과 지나치게 밀착된 체온도 느껴졌다. 텐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뜨곤 뒤를 돌아보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레굴루스의 얼굴이 보인다. 그 모습이 참으로 천진해 텐마는 한숨을 삼켰다.
이전, 알아줄 때까지 쫓아다닌다고 선언했던 레굴루스는 정말로 텐마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분명 같은 나이라고 들었는데 항상 자기보다 먼저 수업을 마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나, 아르바이트하는 데까지 따라오질 않나. 정말 할 일도 없나 싶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매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솔직히 그랬다면 무섭다.
“……고마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어쨌든 도와준 건 분명한지라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자 레굴루스가 예쁘게 눈꼬리를 접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정상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잘난 편인데 어쩌다.
내심 한탄하는 사이 레굴루스가 상자를 받아들고 나간다. 텐마는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찮게 따라다닌다고는 하지만 레굴루스가 무언가를 하는 일은 적었다. 평소에 하는 말이라곤 설득은커녕 가벼운 잡담뿐이고 오히려 ─아르바이트 장소에 멋대로 들락거리는 건 둘째 치고─텐마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기도 한다. 단순히 말재주가 떨어지는 것뿐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그때 같이 왔던 녀석들과 비교해 보면 지나치게 잠잠한 반응이다. 그동안은 자신과 연관 없는 일이라 생각해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텐마는 레굴루스를 따라 창고를 나갔다. 레굴루스는 상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충 내려놓으라고 손을 휘젓자 그제야 레굴루스가 상자를 내려놓는다. 원래대로라면 물품을 정리했겠지만 그 대신 텐마는 레굴루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하고 묻는 것처럼 푸른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쳐 온다.
“……너, 왜 그 전생인지 뭔지에 대해 말 안 하는 거야?”
“어? 이제 들어줄 마음이 생겼어?”
“틀려!!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에, 뭐야~ 실망한 듯 레굴루스가 입술을 삐죽인다. 하지만 그 표정 역시 금방 바뀌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표정으로.
“그렇지만 기억이 없어도 텐마는 텐마잖아? 그러니까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난 이전에 텐마랑 제대로 얘기도 해본 적 없으니까 이렇게 알아가는 것도 좋고. 만날 수 없다고, 곁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나은걸.”
레굴루스의 말이 가슴 속으로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다. 잠깐이지만 숨이 막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은 평소에는 철없이 보일 정도로 순진하면서 가끔 이렇게 어른스러운 표정을 보인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먹먹해지는 기분이다.
텐마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어떤 설득보다 지금의 말이 유효했다. 저 그리움과 간절함은 단순히 꾸며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진지하고 농밀했으므로. 무심코 손해 보는 것도 없는 데 믿어도 될지도,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자각하기보다 먼저, 중얼거림이 떨어져 내렸다.
“……왜 그렇게 나한테 신경 쓰는 거야.”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면서, 제대로 얘기도 해본 적 없다면서. 그런데 너는 어째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질문에 레굴루스가 이때까지 봤던 것 중 가장 예쁘게 웃었다.
“그야 좋아하니까.”
“…………………………네?”
순간 텐마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레굴루스의 얼굴을 보자면 순도 100%의 진심인 모양이다. 갑자기 무슨 무서운 말을. 결국 텐마는 현실도피를 했다. 아니, 그냥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 그래, 그거다. 괜히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실례라고, 실례.
결국 그 뒤로 둘 사이에는 침묵의 향연만이 펼쳐졌다. 텐마는 또 무슨 말을 들을까 두려워 아무런 질문도 하지 못했고, 레굴루스는 스스로 말한 대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텐마는 그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레굴루스와 말없이 있던 적은 처음이 아니지만 그동안 텐마는 레굴루스를 조형물, 혹은 공기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있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번 상대를 인식하자 레굴루스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신경 쓰였다. 까딱하다간 숨 막혀 죽을 지경이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가 다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타임의 아르바이트생이 오는 걸 보고 텐마는 누구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대를 마치고 텐마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당연한 듯 레굴루스도 같이 움직인다. 자신의 옆에 있는 존재. 조금만 더 가까우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자칫 숨결이 느껴질 듯한 거리에. 이렇게 나란히 걷는 상황이 이제는 전혀 놀랍지 않다.
자박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텐마는 조심스럽게 레굴루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이목구비, 금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카락, 녹색이 섞인 푸른 눈동자. 그에 끓어오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정.
사실 텐마는 레굴루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레굴루스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있을 답.
레굴루스와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가을의 어느 날. 길을 가던 도중 갑자기 붙잡혀 세워졌다. 몸이 돌려지고, 곧 시야에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울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일순 머리를 스쳤다. 허나 그 얼굴은 금방 사라졌고 자신이 소년의 품에 강하게 끌어안겼다는 걸 깨달았다.
텐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년을 떨쳐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년의 힘이 너무 세서,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어깨에 닿아오는 눈물이 너무 애달파서 그러지 못했다. 안타깝고 그럼에도 따뜻하고,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이 흘러넘쳤다.
떨리는 팔, 커다란 온기, 숨죽인 울음소리.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는, 당시 레굴루스의 얼굴을 보았을 때 스쳐 지나간 묘한 느낌. 흔히들 기시감이라 부르는 그 헛됨. 나는 어디서 이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어쩌면 모두가 말하는 전생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말하는 게 거짓이 아니라 진실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텐마는 모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갈림길에 다다랐다. 마치 일상처럼, 둘이서 같이 돌아가는 날에는 항상 여기서 갈라지곤 했다. 편의점을 나서고, 함께 길을 걷다가, 텐마는 왼쪽으로, 레굴루스는 오른쪽으로, 자신들이 가야 할 곳으로. 이곳이 두 사람의 분기점.
언제나처럼 레굴루스가 짧게 인사하고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텐마는 왼쪽으로 들어서는 대신 그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레굴루스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졌다. 희미하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결국 텐마는 입을 열었다.
“레굴루스.”
조그만 부름에도 레굴루스는 금방 돌아보았다. 드물게도 놀란 소년의 얼굴. 겨울의 추위에 뺨이 벌겋게 얼어있다. 지금 자신의 뺨도 저렇게 되어있을 것이다.
“난 여전히 전생이란 거 믿지 않지만 그래도 진짜 전생이 있다면 말이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나도 널 꽤 좋아했던 것 같아.”
물론 친구로서 말이야, 친구로서. 라고 퉁명스럽게 덧붙이며 텐마는 시선을 피했다. 아까처럼 쑥스러웠기에 레굴루스와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나지막한 신음만이 들릴 뿐이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텐마는 내심 실망하며 슬쩍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무심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레굴루스가 울상 짓고 있다.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불태워,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얼굴이 볼만하다.
다음 순간, 텐마의 품으로 레굴루스가 뛰어들었다. 떨리는 팔이 자신을 강하게 껴안는다. 곧 어깨가 눈물로 젖어들었다. 마치 재회했던 그 날처럼. 여전히 안타까움과 따스함을 지니고. 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텐마는 미소 지으며 레굴루스의 등을 꽉 껴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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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6968자
어찌됐든 벌여놓은 짓부터 마무리하자!! 라는 생각에 나름 급히 썼습니다. 아니, 이거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에요.
사실 환생 설정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생각하는 게 많았던지라. 그렇지만 여기서 다 풀어낼 수도 없고 저도 제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니 쓰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기억을 되찾든 못찾든 전생을 신경쓰든 안 쓰든 텐마와 레굴루스라면 뭐든 잘 해결하리라 믿어요(급 훈훈한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