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행복한 느낌의 아론텐마....인데 어쩐지 사샤만 잔뜩 나오고 있습니다.......◐◐
좋은 날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던 흐린 하늘도 모처럼 맑게 갰고 다가오던 여름 더위도 누그러져 있던 그런 날. 특별하진 않더라도 평화롭고 행복한 한때로 기억되기에 충분한 하루. 홍차를 마시며 느긋한 오후를 보내고 있던 사샤도 오늘이 그런 날이 되기를 바랐고, 그리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운명의 여신은 무심하여 소녀의 소박한 바람은 갑작스러운 방문객 덕분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사샤!! 도와줘!!!”
그렇게 외치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텐마다. 거의 구르듯 방으로 들어온 소년을 보고 사샤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동으로 찻잔이 넘어져 마시던 홍차가 테이블 위로 쏟아졌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 정도로 텐마의 모습이 괴상했던 것이다.
곱슬머리는 평소 이상으로 지저분하고 옷자락도 전부 흐트러져 있다. 뛰어온 탓인지 얼굴은 새빨갛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까지. 웬 괴한에게 습격받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개중 가장 압권은 표정이었다. 반쯤은 울상 짓고 반쯤은 화내는 듯한 얼굴은 명랑하고 잘 웃는 평소의 텐마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사샤는 이미 텐마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왜 그래, 텐마? 무슨 일이야?”
솔직히 엄청 놀랐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걸자 텐마의 얼굴이 안도한 것처럼 희미하게 펴진다. 곧 노을 색 눈동자에 글썽거리는 눈물이 옅게 번졌다.
“……도와줘, 사샤.”
텐마가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사샤는 질리는 일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와줄게.”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미소로 묻자 텐마가 살짝 시선을 돌렸다. 이쯤 되자 사샤도 위화감을 느꼈다. 버릇인지 텐마는 어지간한 일로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런 텐마가 눈도 못 마주칠 정도라니 부탁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엄청난 일인 걸까, 그게 아니면─
“텐마?”
살짝 텐마의 뺨에 손끝을 대고 촉구하자 소년이 간신히 이쪽을 봤다. 텐마의 붉은색 눈동자와 사샤의 녹색 눈동자가 맞았다. 그 순간 텐마의 얼굴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 사샤가 놀라는 사이 우물쭈물하며 소년이 입을 연다.
“…읏, 그, 주말에… 아론이랑 데이…, 아니 약속이 있는데……”
아, 난 또 뭐라고. 사샤는 안도 때문인지 어이없음 때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던 텐마와 아론이 사귀기 시작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가까운 관계자로서 둘 모두의 마음을 알고 있던 사샤로서야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겐 아니었던 듯 텐마도 아론도 정식으로 사귈 때까지 제법 마음고생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이젠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일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텐마에게 있어 누군가와 사귄다거나 데이트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이번이 전부 처음이다. 긴장하고 설레고 초조해하고 뭘 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걸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 이리로 달려왔으리란 건 듣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지. 무심코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야토나 유즈리하가 있음에도 굳이 자신을 택한 건 아론과도 가깝고 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데 다른 사람보다 저항감이 없기 때문이란 걸 잘 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쪽도 연애 경험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아주 잠깐이지만 사샤는 텐마를 이해하면서도 원망하고 싶어졌다.
그래도 역시 사샤는 텐마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주변에서 애매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사샤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전력으로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항상 셋이서 함께였기에 따돌려진 것 같아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한 사람은 자신의 오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소꿉친구.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말로 소중하고 좋아하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게 당연하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다.
결심도 실행도 빨랐다. 사샤는 아직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텐마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맞닿은 피부에서 열이 느껴져, 텐마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곧바로 전해진다.
“걱정하지 마, 텐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사샤……!”
감동한 소년이 수줍게 웃는다. 사샤도 그런 소년에게 자애로움과 믿음직함이 적절하게 섞인 얼굴로 화답했다.
“그래서 어디에 갈 건지는 정했어?”
“응……. 일단은 놀이공원.”
“그러면 옷차림 먼저 정할까?”
놀이공원이면 계속 걸어 다녀야 하는 데다 사람도 많을 테니 너무 불편한 옷도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로 귀엽지도 않은 옷을 입을 수도 없다.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귀여운 옷이어야 한다는 어려운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사샤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사실 조금은, 아니 제법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자, 텐마. 어느 게 좋아?”
몇 벌의 코디를 보여주며 묻자 텐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전부 맘에 안 들어?”
“아니……. 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는 텐마의 얼굴에는 너라서 참는다, 라고 똑똑히 적혀 있다. 아마 상대가 야토나 레굴루스였으면 당장 뭐라도 뒤집어엎었을 듯한 모습이다.
뭐가 저렇게 불만인 걸까. 다시금 제가 꺼내놓은 옷을 살피던 사샤는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 탄식을 내뱉었다.
사샤가 내놓은 것은 대부분이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였다. 물론 코디만 보자면 별다른 문제는 없다. 다만 텐마가 남자아이인 것이 문제였지. 반바지라면 몰라도 스커트는 도저히 텐마가 입을만한 옷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사샤의 옷이 텐마에게 맞지도 않겠지만.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했던 사샤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자 위로하듯 텐마의 손이 머리를 토닥여 온다.
“고르려면 적어도 내 옷 중에서 골라주라고.”
“…………응.”
그 뒤로는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 어떻게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라고는 해도 어차피 미경험자 두 사람이라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텐마의 마음은 편해졌다. 적어도 제 머리카락은 쥐어뜯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리하여 데이트 당일, 텐마는 약속장소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샤랑 이것저것 얘기를 하면서 기합이 너무 들어갔는지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별짓을 다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와 버렸다. 평소라면 아슬아슬하거나 조금 늦게 도착하는데.
텐마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참 느리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착실히 흘러 벌써 약속 십 분 전이다. 부지런한 아론이라면 슬슬 도착할 시간이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때마침 저편에서 걸어오는 아론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밀려오는 쑥스러움에 주저하는 사이 아론이 걷는 속도를 높여 다가온다. 텐마는 흘끗 가까워진 아론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나처럼 빛바래는 일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있다. 그것이 새삼 어색해서.
“미안, 텐마. 기다리게 했네.”
“어? 어어. ……별로. 괜찮아.”
텐마는 어색하게 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평소처럼 행동하는 게 어려웠다.
문득 이마에 무언가 닿았다. 아론의 손가락이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앞머리를 쓸었다. 이끌리듯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것만으로도 아론의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변함없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 그렇지만 이제까지와는 색채가 조금 다른. 조용히 아론이 입술을 열었다.
“텐마는 오늘도 귀엽네.”
“………읏!”
얼굴로 열이 화악 모였다. 귓가에 피 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는 건 알 수 있다.
“느닷없이 무슨 이상한 소리야!!”
부끄러움 때문인지 무심코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온다. 덕분에 오히려 더 부끄러워져 텐마는 그를 감추기 위해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뒤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아론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이 따라붙었다. 슬금슬금 걷는 속도를 낮추면 어느새 바로 옆에서 아론이 걷고 있다. 별다른 말은 없다. 그래도 시선을 흘리면 곧바로 눈을 맞추고 가만히 웃어준다. 그 순간, 모든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이때까지 별걸 다 고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왜 몰랐을까. 어딜 가든, 옷차림이 어떻든, 무얼 먹든, 어떤 얘기를 하든, 그런 건 사실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인데. 이렇게 같이 있고, 시선을 마주치고, 서로 웃어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인데. 왜 그걸 진작 알아차리지 못해서. 밀려드는 안도와 후회.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보고는 해야 하니까. 텐마는 아론에게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매만졌다.
날카로운 착신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살펴보니 짧은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귀엽다는 소리 들었어.」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글. 거기에 일견 딱딱해 보이는 말투였지만 그 속내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99%의 확률로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하고 있겠지. 그런 텐마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라 사샤는 굳이 참지 않고 킥킥 소리 높여 웃었다.
“텐마도 정말이지.”
이런 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아론 오빠가 텐마를 귀엽지 않다고 생각할 리가 없는걸.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게 텐마다움이라. 사샤는 그저 다행이네, 라고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소꿉친구와 오빠의 행복한 데이트를 기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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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607자. 저에게는 페럴렐 같은 느낌이네요. 그나저나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ㅂ;ㅂ;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서슴지 말고 바로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