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에서 쪽빛이 아름답게 춤춘다. 그게 머리카락이란 걸 인식하는 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세이야?”
가까이서 낮은 목소리로 이름이 불려 세이야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곧 시야에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가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남자의 등 뒤로 보이는 것은 청명한 하늘과─ 한 쌍의 커다란 날개.
“우왓?!”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세이야는 허겁지겁 사가에게 매달렸다. 귓전에서 사가의 웃음소리가 터진다.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세이야에겐 사가에게 화를 낼 여유 따윈 없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나부낀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온몸이 기묘한 부유감에 휩싸였다. 고소공포증 같은 건 없었지만 자연스레 날개가 없는 생물로서 추락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감돌았다. 등골이 오싹하다. 세이야는 무심코 두 눈을 질끈 감고 남자의 몸에 더욱 신체를 밀착시켰다.
“괜찮아, 세이야. 저쪽을 봐.”
정신을 못 차리는 세이야에게 사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촉구했다.
이전에 말에는 힘이 있다고 사가가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세이야는 지금이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사가의 말에는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괜찮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이야는 남자의 말에 이끌려 천천히 눈을 떴다.
“……우와.”
눈앞의 풍경에 아까완 다른 의미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발밑에 도시가 있다. 도시 옆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강이 흐르고, 강 끝에는 산맥이 펼쳐져 있다. 그 모든 게 조그맣게 변해 한눈에 다 들어왔다. 평소와 전혀 다른 앵글과 크기로 세상을 보고 있자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용이, 사가가 보는 세계─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라는 건 무리였다. 그저 속삭임처럼 원시적인 감탄만이 자아졌다.
“……굉장해.”
“마음에 드는가?”
“응!!”
사가의 물음에 세이야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의 그 솔직한 반응에 사가가 그제야 안심한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더니 계속 이렇게 있으니 날고 있는 것도 그다지 무섭지 않아졌다. 아까보다 더 여유가 생겨 세이야는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았다. 넓고 푸름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 곧 있으면 내려가야 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문득 부러움이 치밀어 올라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투정부리듯 중얼거렸다.
“……사가는 언제나 이런 풍경을 보는 걸까.”
“원한다면 너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자연스러운 대답을 듣고 세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이야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그러기 위한 힘도 없다. 그런데 사가는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걸까.
의아해서 사가를 보면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이해 못 하겠다고 세이야가 미간을 찌푸리자 이마에 짧게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겠다고 서약했으니까.”
그 말을 이해하고 세이야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용에게 있어 서약이란 자신의 생명까지도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고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사가는 서약으로써 자신의 평생을 세이야에게 바쳤다.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그것은 매우 무섭고 귀중한 것이었다. 때문에 서약의 의미를 알고 난 뒤로 세이야는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사가가 더없이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존재가 자신을 위해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세이야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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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374자
“사가는 어째서 나한테 서약한 거야?”
조금 불만스럽게 말하면 사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멍청한 표정에 세이야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잖아. 나랑 있어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세이야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셋. 어딜 가든 한 사람 몫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다. 물론 또래에 비해서는 제법 월등한 정도로 살아가는 법과 힘을 몸에 익히고 있지만 용인 사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정도는 보잘것없기만 할 터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것은 이전부터 세이야를 계속 좀먹어 온 질문이었다.
실제로 세이야와 함께 있음으로써 사가가 무엇을 얻은 적은 없다. 오히려 세이야 쪽에서 사가에게 의지하는 일이 많으므로 잃고 있는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이야는 때때로 답답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이제 와서 사가와 헤어지는 건 싫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사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사실이 안타까웠다.
세이야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이마에 사가의 손가락이 닿았다. 살짝 고개를 들면 사가는 어째서인지 조금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이야. 나는 무언가를 바라서 네 곁에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말을 자르듯 사가가 강하지만 조심스러운 힘으로 세이야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품에 안긴 세이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저 곁에 있고 싶어서 곁에 있을 뿐이다.”
실로 담담한 토로. 하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세이야는 약한 모습을 감추려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사가 바보.”
용이란 생물은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을까.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어─ 격렬하고 올곧게 온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일까. 그 어리석음에 인간들에게 죽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한결같이.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인간도 용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도 역시 좋아해.”
조그맣게 중얼거린 그 말이 용을 죽이는 최강의 주문이란 걸 세이야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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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834자
나도 세이야가 좋아해라고 말해주면 죽을지도 몰라
원래 글 하나를 쓰기 시작하면 시간이야 어쨌든 그것만 붙잡고 완성해 바로 올리는 편인데 폴더를 뒤져보니 의외로 쓰다 만 것이 몇 개 있었다. 전부 장편이란 게 미묘하군. 어쨌든 이건 조각글로 쓸 수 있어서 써놨던 거에 덧붙여서 완성.
그러고 보니 시리즈도 잔뜩 벌여놓기만 했구나....◐◐ 다, 다음은 어떤 시리즈를 쓰는 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