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평소처럼 혼자 수업을 듣고 평소처럼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알바피카는 도중에 동기를 만났다. 물론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얼굴만 알고 있는 정도의 사이로, 적어도 알바피카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별달리 볼 일도 없었던 알바피카는 상대에게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왜인지 갑자기 동기가 자신을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같았는데 고백하자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었다. 뭐라 질문하기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정신 차려보니 주변에 얼굴만 아는 같은 과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는 게 지금이다.
동기고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다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걸어왔다. 그것뿐이라면 낫지만 개중에는 은근슬쩍 몸을 만져오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평범한 반응이 수줍어하면서도 티가 나게 주변을 알짱거리는 정도일까. 심지어 중간 중간에 적게나마 남자도 섞여 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인기 있는 남자의 모습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솔직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굳이 심정을 비유하자면 발 한 번 잘못 디뎌 이상한 세계로 굴러떨어진 것도 모자라 적응할 시간도 없이 ─무섭다기보다는 징그러운─괴생명체에게 습격당한 기분이라고 할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건만 알바피카는 매번 그런 기분을 느꼈다.
기실, 알바피카는 대다수의 여성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남성이 편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니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들이대니 기분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딱 잘라 말해 고역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이렇게 들이대는 원인도 문제다. 모두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알바피카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의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싫어하지 않는 알바피카가 좀처럼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외모가 뛰어난지 아닌지, 그딴 건 관심도 없지만 역시 고작 외모만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는 불쾌했다.
하지만 동시에 매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 알바피카는 매번 사람들에게 억지로 붙들려 있어야 했다. 그나마 모 선배처럼 유들유들하게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큰 괴리가 있는 법이다.
알바피카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알바피카의 속도 모르고 옆에 있던 동기 중 하나가 지나치게 몸을 붙여왔다.
“알바피카는 정말 미인이네.”
“누가 아니래. 우리보다 더 예쁜 것 같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반대로 알바피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도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짜증이 턱턱 밀려온다. 이러다 오늘 생애 처음으로 여자를 때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일을 막기 위에 알바피카는 애써 그들의 말을 흘려 넘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그런데 자신은 이런 상태고.
‘……진짜 누가 좀 구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나 기적은 일어난다.
“어라? 알바피카?”
제 이름을 불려 알바피카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시야에 자신에 비하면 작은 인영이 잡혔다. 갈색 머리카락의 낯익은 소년. 텐마. 뜻밖의 등장에 순간 반응이 늦었다. 그리고 알바피카가 반응하기보다 먼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반응했다.
“어머, 귀여워라.”
“너 이름이 뭐니? 알바피카랑 아는 사이야?”
“혹시 동생이니? 별로 안 닮았다~”
왁자지껄. 텐마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그 심정을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던 알바피카는 시선을 피하며 속으로 텐마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말려들게 해서 미안.
모두가 제멋대로 떠들어댄다. 뭐라 할 말이 없는지 텐마가 애매하게 대답하는 게 들렸다. 그러던 도중, 문득 뺨에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텐마가 오묘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뭐지? 구해달라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알바피카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자신과는 달리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텐마가 다가왔다. 그 걸음이 바로 앞에서 멈춘다. 알바피카는 자신 앞에 선 텐마를 내려다보았다. 텐마는 기억과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한, 경계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 여전히 선명한 저녁놀 색 눈동자가 지독히 아름답다.
돌연 텐마가 싱긋 웃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허를 찔려 알바피카는 넋을 놓았다. 곧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텐마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미안. 형이랑 약속이 있어서 데려갈게.”
느닷없는 상황이다.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바피카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부 무시. 탈출을 위해 알바피카는 자그만 등만 보고 걸어갔다.
한참을 걷다가 공원쯤에 다다라서야 텐마가 걸음을 멈췄다. 알바피카도 따라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과 시선을 맞췄다. 소년의 성격에 대해 그다지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울리지 않게 텐마는 조금 우물쭈물 거리는 모양새였다.
“곤란해 보여서 일단 끌고 왔는데 괜찮아……?”
“아…… 그래, 덕분에 살았다. 고마워.”
빈말이 아니라 절절한 진심이었다. 텐마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안심한 듯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다행이네. 그런데 그 녀석들 뭣 때문에 들러붙어 있었던 거야?”
“얼굴…… 아니, 나도 잘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알바피카는 중간에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이 예뻐서 그랬다고 말하기엔 심히 걸렸다. 인정하니 못하니 라든지, 자의식 과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니 하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하기엔 심각하게 부끄럽고 괴상한 이유였다. 알바피카 자신의 성격상 더욱더.
하지만 텐마는 눈치도 빠르게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곧 큰 웃음이 터졌다.
“아, 알 것 같아. 알바피카 엄청 미인이니까.”
익숙한 대사에 딱히 대꾸할 말도 없어 알바피카는 침묵으로 응대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평소처럼 불쾌감은 일어나지 않는다. 막연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텐마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없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사실을 말하면서도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담담함.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는 것에 가깝겠지. 추측이지만 이 소년에게 외모는 단지 개인을 구별하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 가치판단을 내릴만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리라. 사실 이쪽이 편해서 좋긴 하다.
“미인이면 좋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구나~”
“……좋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그런 것 같네.”
다시금 텐마가 웃는다. 이윽고 나무열매 같은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였다.
“엄청 고생하는 것 같은데 혹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불러. 이번처럼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노을은 굉장히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다정함. 그에 알바피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텐마의 말이 거진 농담임은 안다. 아직 중학생이라 상대적으로 시간에 제약이 있는 텐마가 자신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긴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알바피카가 진지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던 것은 말의 저변에 깔린 호의 때문에. 나는 언제든 당신을 돕겠다고, 그 상냥함에.
솔직히 텐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만남이다. 우연히 마주친다면야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말하는 것처럼 일부러 달려올 이유까진 없을 텐데. 하지만 소년은 어디까지나 천연덕스러웠다.
“뭐, 어때. 선생님인데.”
선생님. 그 울림. 흔하고도 그리운 호칭에 울컥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힘들다. 말로 할 수 없는 향수가 일어난다.
이제는 오랜 옛날의 일이다. 과거, 알바피카는 자신의 양부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자신을 길러주었음에도 아버지라 부르기엔 쑥스러워서, 그래도 당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자. 자신에겐 무엇보다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 호칭.
“알바피카?”
자신의 모습이 이상했던 걸까. 텐마가 의아한 듯 이름을 부른다. 알바피카는 쓴웃음으로 소년에게 대답했다.
텐마가 자신의 일을 알고 그렇게 불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번에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선생님이란 호칭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선생님 같은 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런 식으로 호의를 가져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져서. 알바피카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텐마, 보답으로 케이크라도 사줄 테니 먹겠어?”
“오! 먹을래, 먹을래!! 나 맛있는 곳 알아!!”
함박웃음이 터졌다. 기뻐하며 제대로 된 말도 없이 텐마가 뛰기 시작한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그를 보며 이번엔 쓴웃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알바피카는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늘어진 그림자가 슬며시 이어진다. 앞으로 이어져갈 이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다고 알바피카는 진심으로 바랐다.
-
공미포 3389자
피곤해서 퇴고가 하기 싫으므로 나중에 책으로 만든다면 그때 모아서 한꺼번에 퇴고를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죽어도 퇴고를 하지 않겠다.)
본편에서는 알바피카가 주변 사람들을 잘 쳐내고 하긴 했지만 그건 독혈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한 거고 실제로 독혈이 없으면 이리저리 휘둘린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시온에게도 그랬고^ㅂ^ 그래서 나온 게 이것. 이라기 보다는 그냥 텐마랑 알바피카를 엮고 싶었다. 딱히 커플링으로 미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 편안한 존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담인데 알바피카는 자기 미모에 별 관심이 없고 자각이 없을 듯. 다들 예쁘다니까 그런가;;;; 하는 정도? 반대로 아프로디테는 미모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지가 예쁜 건 참 잘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써먹으려면 얼마든지 무기로 써먹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