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텐마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건물 로비에 눈에 익은 뒷모습이 서 있다.
‘어라? 저건 분명…….’
타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 등을 덮는 푸른 머리카락. 그와 꼭 닮은 자가 한 명 더 있어도 절대 착각할 리 없는 기척. 친하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친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남자, 데프테로스다.
데프테로스가 어째서 여기에? 원래라면 응당 그것 먼저 생각해야 했으리라. 허나 그와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던 터라 의문보다는 반가움이 먼저 샘솟았다. 무엇을 떠올릴 새도 없이 다리가 움직여, 정신을 차렸을 때 텐마는 이미 남자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데프테로스! 여긴 무슨 일…로…….”
기세 좋게 외치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반가움에 눈이 가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을 알아차린 덕분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무섭다. 텐마는 열심히 뛰던 다리를 멈추고 슬금슬금 움직여 데프테로스 쪽으로 다가갔다. 본심을 말하자면 여기서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일단 참았다.
답지 않은 행동에 데프테로스가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무시. 텐마는 온 신경을 데프테로스와 함께 있던 남자, 아스프로스에게 집중했다. 설마 있을 줄은 몰랐던 남자가 가볍게 웃는다.
“호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보지?”
누구에게라도 할 것 없이 아스프로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턱을 매만진다. 그 행동에 등 뒤로 소름이 오싹 돋아, 텐마는 데프테로스의 등에 찰싹 붙어 몸을 숨겼다. 텐마? 데프테로스가 다시 불러왔지만 이것도 당연히 무시.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은 아스프로스에게 정신이 팔려 데프테로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텐마와 아스프로스의 악연이 시작된 건 시지포스가 계기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당초 만날 당시에는 서로 인사를 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인연을 이어갈 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서로에게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아스프로스도 처음에는 텐마에게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바뀌기 시작한 건 시지포스 때문에 둘이 몇 번 더 마주치고 난 시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스프로스는 텐마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뿐이라면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어째서인지 흥미와 함께 따라붙은 건 가벼운 놀림과 짓궂은 장난이다.
당연히 텐마는 반발했다. 하지만 말로서는 아스프로스를 당해낼 수 없었고, 그렇다고 폭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그게 과연 먹혀들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게다가 아스프로스가 아예 없는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텐마조차 꺾여, 아스프로스를 피하고 있다는 게 지금이다. 안타깝게도 마주치면 이때까지 당했던 것도 잊고 다시 바락바락 대드는 상황을 반복하고는 있지만.
아스프로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저것이 신호라는 걸 알고 있던 텐마는 더더욱 데프테로스에게 몸을 붙였다. 참고로 데프테로스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시지포스 다음은 데프테로스인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스프로스의 말에 텐마가 결국 울컥했다. 이제는 친구도 모자라 자기 동생까지 이상한 녀석으로 만들고 있다. 뭐 저런 게 있냐, 까지는 차마 말 못하고 텐마는 데프테로스 뒤에서 얼굴만 내밀어 소리쳤다.
“듣기 이상한 말 하지 마!!! 꼭 내가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것 같잖아!!”
“아닌가? 훗, 설마 둘 다란 소리는 아니겠지.”
“어느 쪽에도 붙은 적 없어!!!”
“그나저나 이렇게 차례차례 잘도 홀리다니. 시지포스가 걱정할 만하군.”
“홀리는 건 또 뭐냐고……. 아니!! 그보다 내 말 안 듣고 있지!!!!!!!”
이래서야 대화가 되지 않는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대화를 듣고 있던 데프테로스가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적당히 해라, 아스프로스.”
“흠?”
아스프로스가 미묘하게 데프테로스를 쳐다본다. 그 반응에 텐마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라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다행히도 아스프로스는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았다.
“뭐, 좋아. 어차피 바쁘기도 했으니까.”
조금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은 아스프로스가 대충 손을 내젓고 그 자리를 떴다. 바쁘면 애초에 트집을 잡지 말라고!!!! 라고는 역시 말 못하고, 텐마는 사라지는 아스프로스의 뒤로 혀만 날름 내밀었다.
문득 데프테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쉰다. 찔끔한 텐마는 슬쩍 데프테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남자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막혀하는 걸까, 화를 내는 걸까. 눈치를 살피는 사이 데프테로스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또 어쩌다 아스프로스의 맘에 든 거냐.”
느닷없이 폭탄이 떨어졌다.
“……맘에 들었다고? 도대체 어딜 어떻게 보면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데!!”
“아니, 방금 그건 어딜 봐도 아스프로스가 맘에 든 녀석에게 하는 행동이었다만.”
“……진짜냐.”
거짓말!! 속으로 절규하며 텐마는 뭔지 모르겠는 무언가에 좌절했다. 평소에도 사람이 삐딱하다 싶더니 설마 호감을 표현하는 방법마저 이렇게 삐딱할 줄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허나 그런 텐마의 심정도 모르고 데프테로스는 폭탄을 하나 더 떨어트렸다.
“뭐, 맘에 들었다고 해도 장난감으로 서겠지만.”
“…………………….”
텐마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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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는 분명 사디 기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혼남)< 그런 의미에서 찌르면 바로 반응하는 텐마가 재밌지 않을까. 데프는 별 반응이 없어서 재미 없어합니다.
본래 쓰는 시점에서 2, 3년 전쯤입니다
수업이라도 하나 끝난 건지 건물에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우르르 쏟아져 갔다. 그 속에 섞이지 못하고 외따로 서 있던 시온은 멍하니 인파를 바라보다 다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표시된 시각은 1시 37분. 약속 시각으로부터 벌써 30분은 넘게 지난 현재, 마니골도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상태다. 빠직.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기가 억지로 불러냈으면서!!’
그런 주제에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없다. 원래 설렁설렁한 부분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대로 5분만 더 있다가 그래도 안 나오면 그냥 가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그때, 시온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실랑이 같은 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떤 남자와 대단한 미인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헌팅하다 열심히 차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별 이상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미인 쪽도 남자라는 점이었다. 얼굴은 어지간한 여자 뺨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골격과 목소리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므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워낙 개방적이고 털털한 조부 밑에서 자란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시온은 계속 그들을 살폈다. 성별이야 아무래도 좋은데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안 좋은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다.
“어지간히 튕기라고…!!”
예상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소리를 외치며 남자가 주먹을 치켜든다. 위험해!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뭣……!”
“……….”
뺨이 화끈하다. 한 박자 늦게야 자신이 얻어맞은 것을 알았다. 원래는 팔을 잡으려던 건데, 역시 드라마나 소설처럼은 쉽게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코에게 호신술이든 뭐든 배워놓을걸. 지금 와서야 전부 사후 약방문이지만.
맞은 충격으로 저절로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를 억누르며 시온은 멍청한 표정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한심한 행태 때문인지 저절로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적당히 하시지요. 싫어하지 않습니까.”
“………뭐? 이 꼬맹이가!”
그제야 상황이 파악했는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꼴이 추악하고 질릴 정도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하는 걸까.
허나 속으로 남자를 욕하는 것과는 반대로 시온은 한 대 더 얻어맞을 준비를 했다. 완력에 기대고 싶진 않았을뿐더러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으로서는 남자의 주먹을 요령 좋게 피하거나 막을 능력이 없었다. 잠깐, 하고 등 뒤에서 피해자가 어깨를 잡으며 만류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의외로 얻어맞은 건 시온이 아니라 남자 쪽이었다.
가볍게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의 몸이 나동그라진다. 어안이 벙벙해진 시온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은 무심코 원망과 감사를 담아 상대의 이름을 외쳤다.
“마니골도!”
여─ 라며 태평하게 마니골도가 손을 흔든다. 그 와중에도 발로는 남자를 열심히 밟고 있다.
“일단은 이 녀석부터 밟고 얘기하자고.”
아주 신나 보이는 모습이다.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어진 시온이 고민하는 데, 문득 뺨에 무언가 닿았다.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얼굴이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상처는 괜찮은가?”
누군가 했더니 불운한 피해자다.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와 시온은 무심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맞은 데가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얼굴을 가까이서 직격으로 봐서 그렇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착각했는지 피해자가 황급하게 마니골도를 불렀다.
“마니골도! 그쪽은 나중이다. 일단은 이쪽부터.”
다급한 저지에 마니골도가 하던 짓을 멈추고 휘적휘적 다가온다. 그리고는 시온의 턱을 잡아 상처를 살피고 가볍게 혀를 찼다.
“아, 이거 틀림없이 멍들겠군. 그러게 왜 끼어들어서는.”
괜한 짓을 했다는 말투에 시온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옆에서 피해자까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더 그랬다. 하지만 제가 멍청하게 얻어맞은 것은 사실이라, 안타깝게도 딱히 반박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밟히고 있던 남자가 간신히 부활해 삼류악당 같은 대사를 던졌다.
“마니골도, 네 녀석……! 선배를 때리고도 무사할 줄 아냐!!”
허나 훌륭한 일류악당인 마니골도는 코웃음 한 번으로 상대의 협박을 넘겨버렸다.
“웃기고 있네. 먼저 남의 동생을 때린 쪽이 누군데.”
정론이었지만 원래 찔리는 데가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말에 반발하는 법이다. 그건 남자도 다르지 않아서 마니골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발작하듯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무시할 수 없는 기세에 한 번 맞은 전적이 있는 시온은 무심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와 달리 가련하다고 착각했던 피해자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물론 마니골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심드렁하니 남자의 꼴을 지켜보는 중이다.
다음 순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어?”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타격음이 울리고 남자의 얼굴에 시원시원한 스트레이트가 꽂혀 든다. 그 후, 마치 영화처럼 남자의 몸이 쓰러지며 피해자라고 착각하고 있던 사람이 몸을 돌리며 손을 털었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잠깐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걸 뇌가 거부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가녀려 보이는 몸으로 사람을 때려눕혔다고?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는데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라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는 시온의 곁에서 마니골도가 조용히 속삭였다.
“왜 괜히 끼어들었냐고 말했는지 알겠냐.”
“…………응.”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심코 어깨를 움칠거리자 상대가 어설프게 웃는다.
“마니골도랑…… 마니골도의 동생? 도와줘서 고마웠다.”
“아, 아니.”
별 도움도 되지 못했는걸, 하고 시온은 고개를 내저었다. 겸양이 아니라 필시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꼭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지 보다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아…….”
사고가 멈춘다. 왜냐하면 그 미소가, 그 얼굴이, 방금 남자를 때려눕힌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럼.”
마니골도가 정신 차리라며 어깨를 한 대 때릴 때까지 시온은 사라지는 상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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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데까지 썼는 데 맘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