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맣게 입술을 열자 새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렸다. 이젠 겨울이구나.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세이야는 새삼스레 감회를 느꼈다. 벌써 겨울을 맞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들뜨는 자신이 있다. 자각하자 밀려드는 쑥스러움에 세이야는 괜히 발끝에 힘을 줬다. 바닥에 쌓인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깨진다. 어젯밤, 조금 이른 첫눈이 쌓인 거리는 하얗게 벗겨진 것처럼 보였다.
정말 믿기지 않으면서도 들뜨는 기분이다.
세이야는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보다 조금 앞에서 걷고 있는 사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걸을 때마다 그의 등 위로 푸른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그 선명한 색채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세이야는 그냥 웃어버렸다. 설마 이 겨울에 사가와 같이 일본의 거리를 걷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지위상 그리고 입장상 평소 사가는 매우 바빴다. 본인이 워낙 고지식한 만큼 요령을 부려 쉬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때문에 세이야와 사가가 만날 수 있는 건 세이야가 그리스를 방문할 때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사가가 이번에는 자신을 만나러 일본으로 왔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 짧은 시간을 내기 위해 사가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고작 데이트 따위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어 어이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해 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살짝 보폭을 크게 해서 나란히 걸으면 사가가 조용히 내려다본다. 사가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건 세이야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 간단한 사실이 언제나 행복을 가져다준다.
걷고 있는 둘 사이로 부드러운 공기가 흐른다. 대화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둘도 없이 귀중한 이 시간. 흘러가는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져 그것이 아깝다. 문득 지금을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세이야는 생각했다.
의아한 듯 쳐다보는 사가에게 잠깐만, 이라며 짧게 양해를 구한 세이야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깜빡거리는 화면을 확인하자 역시나 문자가 와있다. 드문 일이네, 하고 감탄하는 세이야에게 사가가 조금 신기한 듯 말을 걸었다.
“휴대전화가 있었는가?”
“응. ─그러고 보니 사가는 몰랐구나.”
이 휴대전화는 사오리가 브론즈 세인트 모두에게 사준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필요에 의해 구입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오리의 기호에 따라 지니게 된 물건이란 소리다. 실제로 세이야는 휴대전화를 편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껄끄러웠기에 사용하는 일은 적었다. 거기다 성역에서는 결계 때문인지 몰라도 전파가 불안정하기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리스에 갈 때는 아예 두고 가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가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문자는 슌이 보낸 것이었다. 애당초 잇키는 휴대전화를 받았음에도 들고 있는 걸 본 적이 없고 효가는 문자보다 통화하는 걸 선호하는 쪽이다.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성격이 아닌 시류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 역시 제대로 쓰는 걸 본 적이 없으므로 슌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언제쯤 돌아올 건지, 늦는다면 저녁은 어떻게 할 건지. 짧게 묻고 있는 문자 끝에 ‘데이트 잘해~’ 라고 야유하는 듯한 말이 쓰여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세이야는 무심코 볼을 붉혔다. 상대가 슌인만큼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한 놀림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부끄럽다.
놀리지 말라고. 결코 슌에게 들리지 않을 불만을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세이야는 조금 난폭하게 키패드를 눌렀다. 문자에 대한 답과 약간의 불만을 적고 송신 버튼을 누르자 곧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배경으로 화면이 되돌아간다. 이걸로 끝. 그 순간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게 있어 세이야는 휴대전화를 집어넣으려던 손을 멈췄다.
세이야는 고개를 들어 사가를 바라보았다. 사가는 무늬 없는 남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치노 팬츠라는 심플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외투론 블랙 세미 체스터 코트, 거기에 갈색 로퍼를 신고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칠 것 같은 차림새였지만 인물이 인물인지라 전혀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평소의 법의가 아니란 점도 초 레어.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의아했던 건지 사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하고 시선으로만 던지는 질문에 세이야는 대답대신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사가,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응?”
의아해하면서도 사가는 세이야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화면 안에 미동도 않는 남자의 모습이 꽉 찼다. 세이야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찰칵,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뭐,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이럴 때만 능숙하게 시치미를 뗀 표정으로 세이야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만큼의 무게가 주머니에 걸렸다.
세이야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사가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최신문물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세이야가 무엇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뭘 한 거지?”
호기심에 가득 차 물어오는 사가를 보고 세이야는 양 검지를 입 앞에서 교차해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비~밀~”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사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그 모습을 보고 세이야는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놀리는 걸로 비친다는 건 알지만─실제로도 반쯤 놀리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이야는 상황을 얼버무리려는 듯 사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빨리 가자고.”
애교 섞인 세이야의 재촉에 결국 사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웃어버렸다. 어지간한 일에서 사가가 세이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둘 다 잘 알고 있다. 이번에도 사가는 당연하게 세이야에게 져준다.
표정을 푼 사가를 올려다보며, 세이야는 만족감에 마주 웃었다. 슬쩍 주머니로 손을 미끄러트리자 연인의 사진이 저장된 휴대전화가 만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