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이 되자 곧바로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과 전혀 다른 복작거림은 어딘지 모르게 도심의 거리 한복판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밀도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들 할 일도 없는 데 어째서 복도로 나오는 걸까 잠깐 궁금해졌다. 하긴 자신도 별 이유 없이 밖으로 나도는 일이 많으니 그냥 일상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쳐 세이야는 미안, 하고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익숙한 일인지 상대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짧은 고갯짓을 끝으로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확인하고 세이야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아무리 세인트라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선 제대로 된 운신은 어렵다.
아무래도 빨리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이야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목표로 했던 곳은 금방 보였다. 3-D라고 쓰인 표찰.
들어가기 전, 교실 문 앞에서 세이야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학년에 따라 층이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세이야가 이곳까지 오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실제로 이 교실도 두어 번인가 스쳐 지나간 게 다였다. 그 탓인지 자신의 교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음에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짧게 숨을 들이켜고 안을 들여다보면 학급의 반 이상이 빠져나간 탓인지 복도와 다르게 한산했다. 살짝 눈을 굴려 살폈지만 어쩐지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부재에 세이야는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잇키가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는 데.
성전이 끝나고 브론즈 세인트 전원이 일본에서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정됐을 때 제일 싫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잇키였다. 모두 예상대로, 라고 생각했다. 공공연하게 무리 짓는 건 싫다고 말하고 다니는 만큼 잇키가 집단생활을 반길 거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승낙을 표시한 것도 본인의 의지보다는 사오리의 부탁과 동생들의 떠밀림에 의한 마지못함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랬던 만큼 세이야는 내심 잇키가 학교에 다니는 건 표면적 행동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등교야 어찌 됐든 실제로는 수업에 하루 종일 얼굴도 내밀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예상외로 잇키는 ─제대로 듣는지 안 듣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수업에 불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잔뜩 찌푸리긴 했지만 여타 다른 학교 행사에도 제대로 참여했다. 세이야는 그제야 잇키가 생각 외로 고지식하고 관념에 얽매이는 성격이란 걸 깨달았다.
그런 잇키가 없다. 물론 쉬는 시간인 만큼 밖에 나가도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분명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자리에 앉아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던 세이야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으음~ 어쩌지~”
갈만한 곳을 찾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 경우에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더 최악이다. 만약의 경우에는 코스모를 더듬는다는 방법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세이야는 코스모의 세심한 컨트롤에 서툴다. 슌이나 되면 모를까 세이야로서는 잇키가 대충 어디쯤 있다는 막연한 범위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범위는 대략 건물 한 층 정도. 즉, 세이야가 제대로 잇키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육박한단 소리다.
문득 고민하고 있는 세이야의 곁으로 조그만 인기척이 둘 다가왔다. 그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거라 생각한 세이야는 둘에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세이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왔다.
“얘, 여기서 뭐 하니?”
고개를 들자 여학생 둘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 슬쩍 명찰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3학년인 모양이다. 혹 잇키와 같은 반인가. 어쩐지 그녀들의 웃는 얼굴에서 무슨 꿍꿍이─라면 조금 과장이지만─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걸까. 전혀 짐작되지 않았지만 페미니스트인 세이야는 일단 성실하게 상대의 질문에 답했다.
“잇키를 찾아 왔는데─”
세이야의 대답에 그녀들의 눈동자에서 반짝거림이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역시. 키도의 동생 맞지?”
“친동생? 아니면 사촌이니?”
덮치듯 얼굴을 바짝 붙여가며 던지는 질문에 세이야는 무심코 몸을 뒤로 뺐다. 기세 좋기로 모자라 건방지다는 평까지 받는 세이야가 이렇게까지 압도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기껏해야 사오리나 마린의 앞에서 정도뿐이다. 상대가 전부 여성이라는 점이 애매하다. 덕분에 세이야는 역시 여자는 무섭네,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고 말았다.
일단 사촌이야, 하고 대답하자 그녀들은 어딘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꾸민다. 세이야는 그 빠른 변화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둘이 친하지? 키도, 그러니까 잇키 군에 대해서 좀 물어봐도 돼?”
의외의 질문. 상황을 전혀 모르겠다. 도대체 왜 잇키에 관한 걸 자신에게 묻는 거지? 아니, 애당초 왜 잇키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까?
“왜?”
“그거야 당연히 좋아하니까 그렇지!”
무심코 질문을 던지자 그녀들이 까르르 즐겁게 웃으며 대답한다. 마치 난 초콜릿이 좋아, 라고 말하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좋아한다는 게 저런 감정이었던가. 그런 물음이 잠시 세이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쩐지 피곤해져 세이야는 답지 않게 조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지만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직접 물어보면 될 텐데.”
조금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그녀들 중 한 명이 어허, 하고 허리에 손을 척 올려놓았다. 마치 누나가 어리석은 동생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훈계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세이카를 연상한 세이야는 무심코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물어보긴 부끄럽잖니.”
“거기에 잇키 군은 과묵한 데다 날이 서 있으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 같은.”
“맞아. 그래서 괜히 말 걸기 무섭달까. 뭐, 그런 점이 멋있는 거지만.”
“응, 응. 왠지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 같잖니.”
그래서 인기 많잖아, 하고 그녀들은 꺄악꺄악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자신들만의 세계에 들어가 버린 여자들을 보고 세이야는 어설프게 뺨을 긁적였다.
잇키가 정말 그런 성격인 건지, 그런 타입이 인기가 있는 건지, 여러 가지로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역시 제일 묻고 싶은 건 그거랑 직접 묻지 못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하는 거였다. 한 번 맘에 두게 되면 장애물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일직선으로 돌파해버리는 세이야에게 있어 그녀들의 소극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지.
만약 슌이나 다른 형제들이 옆에 있었다면 세이야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었겠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세이야 혼자였기에 소년의 과감성에 태클을 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쨌든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기회다. 그녀들이 얘기에 빠져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세이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만약 여기 계속 붙잡혀있다간 자기가 알지 못하는 정보까지 죄다 토해내야 할지도 몰랐다. 잇키를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건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고.
허나 세이야의 소원은 별로 바라지 않던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왁?!!”
갑자기 누가 뒤에서 어깨를 쳐 세이야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조마조마하며 뒤를 돌아보자 잇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필이면 이 미묘한 타이밍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전혀 모르겠는 상황에서 세이야는 결국 화내는 것을 택했다.
“갑자기 나타나지 마!!”
“못 알아챈 네가 멍청한 거지.”
잇키가 코웃음 친다. 그 태도에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부풀렸다. 확실히 세인트로서 주의부족이라고 지적당해도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브론즈 세인트면서 골드 세인트에 비견되는 실력을 갖춘 잇키가 제대로 기척을 감추면 어지간해선 그를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런데도 자신보고 알아채지 못한 게 이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불만 어린 세이야의 얼굴을 보고 잇키가 까다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을 어쩌면 좋냐, 라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쓰여 있다.
“……그래서 왜 여기 있는 거냐.”
결국 져주는 걸 선택한 듯 잇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어쩐지 한숨이 섞인 듯한 건 분명 착각이 아니다.
“아, 맞다. 나 체육복 빌려줘.”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빌려주긴 할 모양인지 잇키는 조용히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며 세이야는 곁눈질로 아까 자신에게 말을 건 여자들을 살폈다. 잇키가 나타났을 때 그녀들은 멀리 떨어졌지만 눈빛만은 사정없이 박혀왔다. 엄청 부담스럽다.
세이야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잇키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모르는 게 부처다.
“슌은 같은 반이니까 못 빌리고 시류랑 효가는 오늘 체육 수업이 없어서 안 가져왔다던데.”
“그런가.”
자신이 물어본 주제에 정작 본인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잇키는 시큰둥한 얼굴로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내 던졌다. 손에 들어온 체육복은 어쩐지 지나치게 깨끗한 것 같기도 했다.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상의를 펴서 자기 몸에 대봤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켁.”
크다. 엄청나게는 아니더라도 제법 크다. 그것도 눈으로 봐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세이야는 생각했다.
잇키와 세이야는 두 살 차이다. 고작 두 살,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십 대 소년에게는 그 정도의 나이 차도 굉장히 크다. 거기에 세이야는 이제야 겨우 성장기에 들어서려는 참이고 잇키는 한창 성장기가 진행 중. 당연히 둘의 체격 차는 적지 않다.
체육복은 전 학년 공통이라 별문제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걸 그대로 입었다간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이 될지 상상하긴 쉽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잇키도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낮고 희미해 알아보긴 힘들지만 분명 평소의 비웃음관 다른, 완연한 웃음이었다.
“뭐야.”
웃지 마. 그렇게 말하려던 세이야는 문득 타인의 시선을 깨달았다. 집요하고 어딘지 모르게 흥분한, 아까 얘기를 나눴던 그녀들의 시선이다. 아니, 그녀들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교실에 있던 여학생 중 반절이 잇키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이야는 무심코 어처구니없음과 감탄이 반씩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잇키는 인기 많구나…….”
“하?”
뜬금없는 얘기에 잇키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세이야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만 납득했다.
“응, 확실히 그런 것 같네. 굉장해!”
“……그래 맘대로 떠들어라.”
결국 잇키는 모든 걸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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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858자, 저녁엔 귀가한 세이야가 이 얘기를 해 모두가 웃습니다
인기가 많은 잇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십 대 소녀에겐 어쩐지 차갑고 불량스러운 느낌이 인기가 많은 것 같으니까. .....................뭔가 중간에 틀어진 것 같지만◐◐ 진짜 글 막올리는구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