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사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교황의 거처 한구석에 붙어있는, 사람이 찾지 않는 조그만 뜰, 그 한구석에 조그만 소년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뒤돌아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가가 그 소년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세이야다.
세이야가 이런 곳에 어째서 있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사가는 발소리를 죽여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지막하게 억눌린, 아직 어린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다. 덕분에 사가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엔 세이야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없을 텐데.
“세이야?”
“으악?!!”
이름을 부르자 소년이 과도하게 반응하며 튀어 올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돌아보는 세이야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도 원망이 가득했다. 질타의 시선을 받고 시무룩해진 사가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었다.
“뭐야, 놀랐잖아. 사가!!”
“미안하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조심스럽게 사과하자 세이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이 마치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린애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세이야. 여기서 뭘…….”
말이 중간에 끊긴다. 세이야의 발치에서 꼬물거리는 물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체를 확인한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고양이가 있다. 아직 어린지 몸집이 작다. 털은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한 하얀색. 자신이 아는 한 성역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없으므로 십중팔구 길고양이일 텐데 사람에게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 묘했다. 아니, 그보다 여기가 길고양이가 숨어들어올 수 있을 만한 데던가?
의문을 가득 담아서 세이야를 쳐다보자 소년이 조금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띄웠다.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발견한 뒤로 같이 놀다 보니 친해졌어.”
그렇게 말한 세이야가 손을 뻗자 고양이가 그 손가락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확실히 퍽 익숙하고 친밀해 보이는 모양새다. 안 그래도 귀여운 소년인데 조그만 동물과 같이 놀고 있으니까 더 귀엽다. 사가는 무심코 입가에 미소를 피웠다. 이미 온갖 의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봤다면 필경 놀렸겠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흐뭇해하는 사가의 속마음도 모르고, 세이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계속 내버려 두기도 그런데 내가 키워도 괜찮을까?”
“글쎄, 괜찮지 않을까.”
세인트가 애완동물을 키워선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성역에서 페가수스의 소년이 무언가를 한다는데─위험한 일이 아닌 이상─ 반대할 사람은 없다. 사자도 아니고 고작 새끼 고양이 한 마리 정도야.
때문에 사가는 별생각 없이 쉽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게 오판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걱정하는 척하며 아프로디테가 놀렸다.
“그러게. 어른답지 못한 거 아냐?”
속내를 감출 생각도 없이 데스마스크가 조롱한다. 옆에서는 슈라가 진중하게, 그러면서도 내심 우습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모두의 놀림을 받은 사가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
느닷없이 사가가 이렇게 비웃음당하고 있는 이유는 전부 세이야가 기르기 시작한 고양이 때문이었다.
모찌라 이름 붙여진(세이야 작명) 고양이는 새하얗고, 작고,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있고, 귀여운 데다 애교도 많았다. 덕분에 세이야는 그 고양이에게 푹 빠져버렸다. 거기까지라면 아무래도 좋다. 당연한 말이지만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애완동물 때문에 애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그건 확실히 문제였다.
실제로 세이야는 고양이를 옆에 끼고서는 사가 쪽으로는 한눈도 팔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눈 정도는 파는데 그때마다 고양이가 무슨 짓을 해서든 다시 시선을 빼앗아가 버렸다. 빌어먹을 고양이가 영악하기는 엄청 영악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0살이나 먹은 주제에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질투한다니, 체면이 있지.
그런 식으로 자존심과 오기가 맞물려, 본의는 아니지만 고양이와의 대치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성역 내에서는 세이야를 두고 고양이와 싸움을 벌인다는 소문까지 퍼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직 직접적으로 주먹과 발톱이 교차한 적은 없으니 싸움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물론 이게 전부 변명이고,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님은 사가도 잘 알고 있었다. 말로 하니 더더욱 한심한지라 죽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게 놀림까지 받고 싶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적당히 하지.”
대꾸가 없음에도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 조롱에 사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경고했다. 그러나 애초에 경고가 먹힐 상대였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도 않았겠지.
“화풀이는 별로 좋지 못한걸.”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듯 아프로디테가 요염하게 웃었다. 아름답지만 이상하게 속을 박박 긁는 모습이다. 다시 화가 불쑥 치솟아 올랐지만 사가는 온갖 이유를 붙여 그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래, 화내서 뭐하겠나. 어차피─
“어차피 너희도 곧 남 말 할 수 없게 될 텐데.”
“……뭐?”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셋을 보고 사가는 얼음 같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에게 빠져 있는 사람이 세이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가의 말을 흘려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프로디테는 생각했다.
아프로디테는 느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맞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선의 끝에는 소년들, 세이야를 비롯한 브론즈 세인트들이 고양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에 누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는 그야말로 소년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 사이에 슌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 참, 슌이 저 무리에 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진작 예상했어야 했는데. 기분이 나빠진 아프로디테는 낮게 혀를 찼다. 반응은 없다. 그리 작은 소리도 아닌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괜히 열이 받았다.
기분이 점점 하락함에 따라 손등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까 내키지 않음에도 귀여워하는 척 저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고양이에게 할퀴어진 상처다. 필시 자신이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안게 틀림없다. 알데바란이나 므우의 손에서는 얌전히 있었다고 하니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한낱 짐승 주제에 눈치만 빨라서는.
“아프로디테? 상처가 아픈가요?”
그래도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슌이 흘끔거리며 이쪽을 돌아봤다. 예쁜 녹색 눈동자에 아프로디테는 간신히 미소를 그러모았다. 여기서 어린애처럼 굴 수는 없으니 참으로 필사적이었다.
“아니, 괜찮아.”
“그래도……. 아, 잠깐─”
저 빌어먹을 고양이가.
겨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옷자락을 잡아당겨 다시 슌의 주의를 빼앗아 가는 고양이를 보고 아프로디테는 이를 갈았다. 어른의 여유 같은 건 이미 닳고 닳아 우주의 먼지가 된 지 오래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진작 저 조그만 생명체를 밖으로 내던졌으리라. 그러나─
‘……어쩔 수 없나.’
슌이 저렇게 웃고 있는데 그걸 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전히 화는 났지만 의욕이 잔뜩 꺾여버린 아프로디테는 포로록 한숨만 내쉬었다. 역시 사가를 놀리는 게 아니었어.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아직도 싸움은 멈추지 않은 것 같았다.
쌍아궁으로 들어서던 세이야는 위화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공기가 고요하다.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사가와 고양이가 있을 텐데. 고양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서 또 나간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세이야는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私室)에 가까워져도 여전히 느껴지는 건 없다. 그렇다면 역시 나간 게 틀림없겠지. 매번 몸은 신경도 안 쓴다니까. 바보 같으니.
세이야는 입술을 삐죽이며 버릇처럼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사가?”
궁 안에 없는 줄 알았던 사가가 침대 위에 자고 있다. 심지어 그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자는 건 그토록 사이가 나빴던 고양이다.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여 침대로 다가갔다.
자면서도 뭐가 그리 기분 나쁜지 사가는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뺨과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팔에는 가늘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아무래도 한바탕 한 모양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편한 모습이 아니었다. 심기가 불편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한 잠꼬대인지 가끔가다 기다란 꼬리가 침대를 툭툭 두드린다.
“……풉.”
둘의 모습을 보고 세이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물어 죽였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둘이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말썽꾸러기 꼬맹이들이 한바탕 싸웠다가 잠든 모습이랑 닮았던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사이가 나빴으면서.
“질투 나게.”
일부러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세이야는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둘을 한 번 더 쳐다보고 그대로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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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475자
사실은 그냥 제가 고양이를 좋아할 뿐<
오랜만의 사가세이네요. 이게 얼마만이야. 다른 거 연성하면서 찔끔찔끔 쓰다가 겨우 완성했습니다. 뭔가 굉장히 짧아진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