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부탁하는 대상이 아테나였다면 세이야는 별생각 없이 수긍했을 것이다. 자신들─세인트─의 의무는 아테나를 지키는 것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사가라면 얘기가 다르다. 애당초 그는 부탁의 대상이 될 만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같이 싸울 수 있는 훌륭하고 믿음직한 동료. 어쩌면 자기 혼자서 먼저 달려가 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인데. 그런데. 그런데 아이오로스는 어째서 사가를 부탁하는 걸까.
게다가 왜 하필 자신일까. 사가라면 데스마스크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오로스 본인도 있는데.
물론 자신과 사가 사이에 있는 인연이 그리 얄팍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거짓 교황의 모습이었더라도 수행시절 6년 동안 교류가 있었고, 성전의 때 말이 아닌 무언가를 서로 나눴다. 그 모든 것에 기반에 자신 안에 어떤 감정이 자라나고 있다는 걸 세이야는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그것뿐이다. 어차피 거짓 위에 세워진 관계. 형체가 없어 불확실하고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 무슨 사이냐고 질문받으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그런 불확실함.
이런 자신이 사가를 부탁받아 봤자 무언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오로스라면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그러나─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정말 나라도 괜찮아?”
조심스럽게 물으면 아이오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쁜 비취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는다. 언제나 자신들과 아테나를 지켜봐 주었던 남자의 얼굴.
“너라면 괜찮아.”
굳은 신뢰의 말에 세이야는 그제야 안심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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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진단 메이커
현대AU
“아, 어서 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낯익은 소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를 하고 있던 건지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서 흘러넘친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채가 가득한 공간. 자연스럽게 경직되어 있던 몸이 풀렸다. 이런 저녁을 맞이할 수 있을 줄은 예전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짧게 대답하고 코트를 벗던 데프테로스는 문득 텐마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뒤돌아보면 매우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 평소 감정표현이 뚜렷한 텐마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드물다. 데프테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복장도 아침에 나갔을 때 그대로이고 직장 외에 어디 다른 곳에 들른 일도 없다. 자신에게 몰래 장난을 칠만큼 친한 존재도 없다. 그런데 왜?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텐마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마치 웃으려다 실패한 모양새였다.
“……당신, 혹시 담배도 피워?”
“……하?”
느닷없는 말에 데프테로스는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의 특성상 데프테로스가 다니는 직장의 구성원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것은 즉 동료의 대부분이 흡연자란 소리와 동일했다. 상당한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주변에 흡연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휴식 시간만 되면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광경을 곧잘 볼 수 있다.
물론 데프테로스는 흡연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담배 냄새가 옮겨붙지 않게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좋다는 편에 가깝다. 아마 오늘도 그런 경로로 담배 냄새가 붙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별말 않는 텐마가 굳이 언급한 걸 보면 꽤 심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원래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대략의 내용을 설명하면 텐마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다. 그렇게 냄새가 심했던 걸까.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지 않으면, 라고 데프테로스는 내심 반성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마치면, 그 시간에 맞춰 텐마가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런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간지럽다. 그걸 드러낼 만큼 솔직한 성격이 아닌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지만.
커피를 받아들고 소파에 앉자 자연스럽게 텐마도 옆자리에 앉는다. 다만 평소보다 거리가 가깝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소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덕분에 깜짝 놀라 컵을 떨어트리지 않은 것은 칭찬받아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텐마?”
이름을 불러도 텐마는 꼼짝하지 않고 계속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있었다. 이따금 자그만 숨결이 닿아 매우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냄새를 맡는 듯한 텐마의 태도에 데프테로스는 금방 납득했다. 아마 아직도 담배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는 거겠지. 라고는 하지만 텐마가 이렇게까지 담배 냄새를 신경 쓸 줄은 몰랐다. 아니면 혹시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는 건가?
“냄새가 그렇게 심한가.”
무심코 힐난하는 말투가 되면 텐마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뺨이 희미하게 붉다.
“아니, 미안. 당신한테서 담배 냄새가 난 적이 없으니까 조금 낯설었거든.”
“………….”
“하지만 지금은 평소대로니까, 겨우 안심했어.”
스스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텐마가 지독히도 부드럽게 웃었다. 남자의 마음을 있는 대로 뒤흔드는 미소. 정말이지, 이 녀석은. 의도하지 않은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원망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째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드냐고.
뜻밖의 고백에 습격당한 데프테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커피만 입에 댔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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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고 있는 것 때문에 신경쓰이는 담배냄새란 소재
최근 딱히 바빠진 것도 아닌데 어쩐지 이것저것 할 시간이 없네요. 어지간히도 정신을 놓고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