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궁을 내려가던 도중, 제일 첫 번째 궁에서 아이올로스와 맞닥뜨린 사가는 걸음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입술이 딱 붙었다. 설마 아이오로스를 인마궁이 아니라 백양궁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집무에 지친 뇌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 사가를 대신해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아이올로스 쪽이었다.
“아, 사가─”
친우에게 흔히 그러듯 아이올로스가 손을 들어 인사한다. 사가도 그제야 그래, 하고 애매한 대답을 되돌렸다. 스스로도 한심한 행태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삼일을 철야로 일하게 되면 누구라도 이렇게 되는 법이다.
어디를. 그렇게 묻던 아이오로스의 말이 중간에 끊어진다. 옅게 미소 짓고 있던 아이올로스의 표정은 법의가 아니라 심플한 셔츠와 바지만 입고 있는 사가의 모습을 확인하고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일본에 가는 건가.”
“아아.”
물음이라기보다는 단정에 가까운 말에 사가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이올로스의 고소가 더욱 깊어진다. 이해와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인 기묘한 웃음이었다.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가는 부러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무심코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저 미소는 이미 아이올로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서도 충분히 받고 있다. 그들의 감정을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동정에 가까운 어떤 것. 평소의 자신이 받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가는 모두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이었다면 같은 미소를 지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깊게 침잠하는 사가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아이올로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격려하듯 사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느새 아이올로스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이야에게 안부 전해줘.”
“……그래.”
익숙한 미소에 조금 안도감을 느끼며 사가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 출발했을 땐 오전이었지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오후로 바뀌어 있었다. 약간 늦은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거리가 묘하게 한산했다. 몇 번이고 밟은 길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사가는 그리움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세이야를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기대와 다른 두근거림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수많은 불안과 아주 약간의 희망이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가는 언제나 참담한 심정으로 희망이 지는 것을 목격했다. 새카만 어둠에 혼자 남겨진 감각. 빛을 찾고 있지만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아서, 그저 소리치고 싶어지는 감정. 엘피스Ελπις. 그것은 정말로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던 것일까.
숨을 들이켜며 병원에 들어서면 짙은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불쾌하고 불안한 냄새 또한. 이미 수없이 느꼈던 감각. 그럼에도 사가는 그 냄새에서 지금 상황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항상 받곤 했다.
성전 후 반년, 세이야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활 후 세이야의 모습을 찾았을 때 사가는 소년이 하데스와의 싸움에서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깨어나는 게 늦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이야가 깨어나지 않는 것이 단순히 상처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깨어나지 않는 세이야를 보고 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라고 여신은 말했다. 하데스의 검은 영혼에까지 직접 상처를 입히는 물건. 그것에 찔린 세이야는 혼마저 크게 찢겼다고 한다. 실제로 육체의 상처는 본인의 치유력과 아테나의 소우주에 힘입어 금방 치유됐지만 혼은 그러지 못했다. 때문에 무의식중에 영혼이 깊게 잠들어 스스로를 치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거라고.
하지만 인간의 혼은 원래 잠들지 않는다. 이는 좀처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잠든 세이야의 영혼을 어떻게 깨울 수 있는지, 언제 깨어나는 것인지,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신도─ 심지어 명왕조차도.
의식이 없다.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심장이 뛰고 있을 뿐인, 마치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상태를 지켜보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신은 아름다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사가의 눈물은 오히려 그때 이후로 말라버렸다.
세이야가 잠들어있는 병실 앞에서 사가는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달콤한 꽃향기를 잡았다. 시야에는 변함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세이야의 모습. 사이드 테이블 위의 꽃병에 장식된 장미는 아프로디테가 가져온 것일까. 선명한 붉음에서 어쩐지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싱싱함이 느껴졌다.
무심코 벽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가는 그곳에 있던 잇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세이야의 곁은 항상 아테나와 세이야의 형제들이 돌아가며 지키고 있긴 했지만 잇키가 있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잇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사가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황이 이런 곳에 올 시간도 있나 보군.”
너무나도 잇키 다운 냉대에 사가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을 뺐다. 천천히 긴장이 풀린다.
“세이야를 보러 올 시간은 당연히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교황 대리지만 사가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짧은 응답으로 말을 맺었다. 굳이 잇키에게 이것저것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침대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자 세이야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반년 동안 주사를 통해 영양을 공급하고 있다곤 해도 역시 실제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엔 비할 순 없는지 세이야는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다. 예전엔 그렇게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소년이었는데.
사가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기계음과 잇키가 옅게 호흡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 안에 세이야의 숨소리는 없다. 소년은 아주 가끔가다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내쉴 뿐이었다. 초조함에 사가는 세이야의 숨소리를 찾기라도 하듯 세이야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바로 앞에 있는 소년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찬다. 가까이서 들여다봐도 세이야의 눈꺼풀은 여전히 닫혀있는 채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언제 눈을 뜨는 걸까. 문득 세이야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강한 빛을 가진 그 눈동자로 자신을 비춰주었으면 했다.
살짝 세이야의 뺨에 손을 얹자 잇키에게서 불쾌하다는 기색이 가감 없이 뿜어져왔다. 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죄를 지은 그를 한 명의 세인트로서, 동료로서 인정한 것과 별개로 잇키는 세이야를 죽일 뻔한 사가를 용서하지 않았다. 정작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냉정하고 가차 없긴 하지만 어쨌든 잇키는 동생들에게만은 정이 두터운 남자였다.
사가는 그런 잇키가 우는 것을 단 한 번 본 적이 있다. 세이야가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그는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절규했다. 세인트로서가 아니라 그저 형으로서 투입한 마음은 여전히 사가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적을 가르듯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가는 문 쪽으로 시선만 흘끗 돌렸다. 상대가 다가오는 기척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사가가 침묵하고 잇키가 들어와, 하고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안드로메다의 소년이 모습을 보였다.
“형, 아직…… 아, 사가.”
슌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것은 세이야의 형제들이 사가에게 보이는 반응 중에서는 드문, 지극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이는 아마 슌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사가는 생각했다. 형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이 소년은 좀처럼 타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일이 없다.
인사 대신 짧게 눈짓을 하자 소년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걸음으로 슌이 잇키에게 다가간다. 날카로운 시선이 떨어져 내렸지만 슌은 동요하는 일 없이 형의 팔에 제 손을 얹어놓았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밥 먹으러 가자.”
“세이야를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사가가 있으니까 괜찮아. 부탁해도 되죠?”
갑자기 슌이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언가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 담담한 신뢰에 사가는 조금 놀라긴 했어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슌보다 잇키가 먼저 반응했다. 노골적인 불쾌감. 아무래도 소중한 동생이 외간남자와 둘이 있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잇키는 곧 ‘세이야가 화낼 거야.’ 라는 슌의 한마디에 병실에서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형제의 공방을 지켜보던 사가는 다시 세이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 소동에도 세이야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아직 소중한 형제들의 목소리조차 소년에겐 닿지 않는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사가는 세이야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소년다운 온기가 전부 사라진, 기묘할 정도로 서늘한 손끝. 접촉한 채로 눈을 감으면 세이야의 코스모가 느껴졌다. 언제나 태양처럼 빛을 내던 따스한 코스모였는데, 지금은 건드리는 것조차 겁이 날 정도로 연약해져 있다. 사가는 터져 나오는 한탄을 삼키며 세이야의 소우주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수동적인 반응이 되돌아 왔다.
결국, 사가는 참지 못하고 세이야의 손등에 이마를 붙였다. 때때로 사가는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신에게? 불가능하다. 신이 빼앗아 간 아이를 신에게 되돌려 달라고 기도할 순 없었다.
점점 뱃속이 뜨거워졌다. 제 간사함에 치가 떨렸다. 이 조그만 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무거운 짐을 떠넘겼다. 사실은 전부 제가 했어야 옳은 일인데. 이리 누워있어야 하는 건 세이야가 아니라 자신인데. 그런데도 소년을 위해 울어줄 수조차 없어─
그때, 잡고 있던 세이야의 손가락이 움찔 움직였다. 사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뜨인 푸른색 눈동자 속에서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엔 흐렸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맺힌다. 곧, 아직 멍한 눈동자가 움직여 사가를 잡았다. 두어 번의 깜빡임과 희미한 한숨. 약간의 공백을 두고 세이야가 메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사가.”
꺼질 듯한 부름에 사가는 멍하니 세이야의 손을 놓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소년의 손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손가락이 희미하게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더는, 울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팔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소년의 눈동자도 어느새 눈꺼풀에 감춰져 있었다.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건 혹시 환상이 아닐까. 사가는 자신을 의심했다. 간절한 바람 끝에 미쳐버린 뇌가 제멋대로 보고 싶은 것을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사가는 문득 세이야의 숨소리를 깨달았다. 변함없이 조용한, 그렇지만 자고 있는 것처럼 꺼지지 않고 고른 숨소리. 사가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밖으로 나온 세이야의 손을 다시 부여잡았다. 여전히 온기는 없다. 그렇지만 코스모에 닿으면 아까와는 다르게 활발한 대답이 돌아오는 걸 알 수 있었다. 크고 상냥한 코스모가 다시 빛을 내기 시작한다.
깨어났다.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사가는 이번에야말로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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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163자
사가가 너무 울어대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던 세이야.
성전 직후의 이야기. 이 소재로 한번 쯤 써보고 싶었다. 생각한 대로 써졌는지는 잘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