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신이 실존하는 이곳에 오고 나서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정말 신은 부조리하다. 정말 원망하고 싶어진다. 차마 세인트들 앞에서 아테나를 씹을 순 없으니 매번 속으로만 욕하게 되지만. 사라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넘쳐흐르는 서류의 산을 정리했다.
그래, 서류의 산이다. 서류의 산.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 성전 이후 교황의 거처에 있는 집무실에 매번 서류가 쌓여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으니까.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성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까지의 일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라가 샤카에게 납치당하기 조금 전까지. 실제로 사가의 명백하고 고귀하고 외로운 희생─죽기 직전까지의 시달림─ 아래서 쌓여있던 서류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적어도 욕이 나오긴 했어도 눈물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불행이 겹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설명은 산더미 같은 서류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보조하는 역할인 사라는 나은 편이다. 이걸 일일이 다 처리해야 하는 사가는 지금 반쯤 유체이탈 상태다. 그야말로 본능만 남아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수준이다. 불쌍한 사가.
그때, 갑자기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제미니이자 시드래곤인 카논이다. 평소에는 태연하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당혹으로 듬뿍 물들어 있다.
“……큰일 났다.”
지금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있습니까? 라는 심정으로 사라는 피곤한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허나 다음 순간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오리아랑 미로가 또 콜로세움을 부숴 먹었어.”
공기가 쨍 얼어붙었다. 카논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다. 서류 추가. 무시무시한 현실에 사라는 차마 사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훗.”
느닷없이 사가가 웃음을 흘렸다.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은 망자의 목소리로. 카논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하얗게 질렸다. 사라는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악마의 화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도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얼굴을 숙이고 있어 표정은 잘 안 보이지만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평소와 달리 삐뚜름하다. 커다랗고 예쁜 손에 잡혀 있던 만년필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잉크를 흘리고 있다. 남자의 등 뒤로 원래대로라면 보이지 않을 분노의 오라가 보였다. 그 탓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심지어 말도 안 되게 머리카락이 끝부터 잿빛으로 빛바래가고 있다. 뭐야, 저거?! 환각? 환각이죠?!
사라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 이렇게 이승 하직하는 건가요? 다시 하데스 님 뵈러 가나요? 미노스. 전에 당신이 한 말 꼭 지켜주세요. 제발.
미리 내세를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이 잡혔다. 돌아보니 카논이다. 원흉의 쌍둥이는 진지하게 제안했다.
“도망치자.”
“…………네?”
반문과 동시에 냅다 끌려갔다. 품에 있던 서류 더미가 우수수 떨어져 꽃길을 만든다. 이런 꽃길 필요 없는데. 그런 상념도 카논의 어깨에 짐 덩어리처럼 실림과 동시에 전부 흩어져 버렸지만.
다행히 사가가 바로 따라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쪽은 안중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의 등줄기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었다. 왜 꼭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로 구원이 떨어져 내렸다.
“카논?! 누나?!”
“세이야!”
집무실을 벗어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페가수스의 소년이다. 둥근 갈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크게 뜨여있다. 사랑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사라는 도망치라고 외치려 했다. 허나 그보다 카논이 더 빨랐다.
“마침 잘 만났다! 뒤를 부탁한다, 세이야!!”
“에?”
“자?! 카논!!”
카논이 인정사정없이 세이야를 사가에게로 집어 던졌다. 그런 소년의 모습이 ─자의가 아니긴 해도─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보인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사라는 동생을 향해 안타깝게 손을 뻗었다. 세이야도 이쪽으로 손을 뻗는다. 허나 두 손은 결코 서로에게 닿지 않았다. 잽싸게 도망치는 카논의 발걸음에 따라 손가락이 허공만을 쥐어 잡는다. 곧이어 세이야와 집무실의 모습마저 작아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너무 뜬금없이 일어난 사건이라 그런지 어이없지도 않다. 카논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덜컹거린다. 멍한 머리가 제멋대로 입을 움직인다.
“……카논. 현재 상황 좀 설명해 주세요.”
“설명하기엔 너무 길고 복잡한데.”
“그럼 간단하게.”
“사가가 폭주를 시작해서 세이야를 방패막이로 삼아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역시 제대로 설명……이 아니라! 세이야를 뭐로요?!”
“얌마!! 얌전히 있어!!!”
이미 알고 있던 상황이지만 너무 열 받아 사라는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썩어도 골드 세인트. 그 정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단단한 팔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런 사라의 심정도 모르고 카논은 당당하게 지껄였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미 한번 막은 전적이 있으니까!”
“전적은 전적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무시는 못 하지.”
쓸데없이 말발만 좋아서는. 물론 자신이 그를 원망할 처지가 되진 못하지만 감정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사라는 불쌍한 막냇동생의 몫까지 포함해서 분노를 토해냈다.
“아무리 그래도 세이야에게 다 떠맡기다니. 그게 연장자로서, 선배로서 할 행동입니까.”
“나도 죽는 건 무섭거든?”
“세인트가 할 말이 아니네요.”
“모르는 소리 마라. 싸우다 죽는 건 안 무서워도 스트레스 때문에 폭주하는 형 손에 죽는 건 영 꼴사나워서 무섭단 말이다.”
그건 그래. 사라는 무심코 카논의 말에 동조했다가 좌절하고 말았다. 너무 분해서인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논은 착실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보니 어느새 쌍어궁에 다다른 상태다. 주변에서 데몬 로즈가 무서울 정도로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장미 덤불에서 좀 떨어진 곳에 카논이 자신을 내려준다.
“혹시 모르니까 보병궁까지는 내려가 있어라. 난 해계에 갈 테니까.”
즉, 당분간은 성역에 돌아올 생각이 없단 소리다. 사라는 차마 카논을 붙잡지 못하고 얌전히 그를 배웅했다.
푸른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던 사라는 곧 교황의 거처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쿠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게 진짜로 무섭다. 솔직히 세이야의 일만 아니었다면 사라는 카논에게 잘했다고 몇 번이고 칭찬해 줄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지.
돌아갈까?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사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임을 애써 지우고 보병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으로 동생에게 사과하는 것도 잊진 않았다.
‘정말 정말 정말 미안해, 세이야!!!’
뒤에서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주인 없는 쌍어궁을 지나 보병궁에 다다르자 궁의 주인이 이미 마중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위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상황을 살피던 참이었던 것 같다. 그도 아니면 카논이 지나가면서 뭔가 언질을 줬던가.
짙은 청록색의 머리카락. 그와 잘 어울리는, 언제나 무너지지 않는 쿨한 표정. 언제나의 카뮤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 때문인지 묘하게 안심이 된다. 덕분에 사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심코 주르륵 무너지고 말았다.
“괜찮은가?”
“예, 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카뮤가 팔을 붙잡고 부축해 준다. 남자의 얼굴에 담긴 것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동정과 이해다. 사라는 제대로 된 감사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은 카뮤의 권유대로 보병궁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으므로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축을 받아 걷던 도중 사라는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지금은 아테나가 없다지만 그래도 성역 내에서, 그것도 성역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거처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데 상황을 살피러 오는 사람이 없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폭발 소리는 일반인인 사라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데다 세인트들에게는 코스모인지 뭔지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둘. 카논이 상황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거나 혹은 이게 익숙한 일이거나. 그리고 사라의 심중은 어쩐지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혹시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확인을 위해 물어보면 카뮤가 태연한 얼굴로 긍정했다.
“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네가 오기 전에도 몇 번은 있었지.”
역시나. 쌍어궁에 아프로디테가 없던 것도 어쩌면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그냥 피난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만 피하다니 치사하긴.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가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건가요?”
사라가 본 사가는 그야말로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남자였다. 단어로 설명하자면 냉정, 침착, 유능.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일로는 격양도 되지 않는 지극히 이성적인 남자. 고지식함이 지나쳐 사적 관계를 쌓기는 힘들지언정 동료로서는 최고로 신뢰할 만한 남자였는데, 그랬는데─
물론 상황은 이해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사가라면 그것도 멋들어지게 제어해, 감정에 휩싸이는 일 없이 모든 걸 끝내리라고 사라는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도 그랬으니까. 적어도 저렇게 앞뒤 안 가리고 폭주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뭐 때문에?
부축하던 사라를 의자에 앉히고 카뮤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동료의 치부를 말하려는 주제에 표정이 심히 쿨하다.
“이야기하자면 조금 긴데.”
해서, 사라가 들은 사정은 다음과 같다.
원래 사가는 ─적어도─지난 13년 동안 이중인격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과는 다른 한쪽의 인격은 나쁜 짓만을 일삼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었다고. 다행히 검은 쪽 인격은 아테나의 은혜에 힘입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는데 뜻밖에 문제가 남게 되었다. 이중인격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던 터라 버릇이 남은 것이다. 덕분에 스트레스가 너무 쌓이면 머리카락이랑 눈 색이 변한 채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실제로 들은 내용은 더 많았지만 중요한 점만 정리하면 대충 이랬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미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던 터라 사라는 그러려니 했다. 죽은 사람도 살아오는 지경인데 이중인격 정도야. 오히려 딴지를 걸 부분은 그쪽이 아니라─
‘그 정도면 버릇이 아니라 사라졌다던 인격이 다 부활했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모두에게 나름의 기준은 있겠지만 어째 영. 게다가 그런 사실을 알면 스트레스를 안 주도록 노력해야지 왜 맨날 사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만 하는 거냐고요. 일부러? 일부러입니까? 모두 사가를 괴롭히는 게 즐거운 건가요?
물론 입 밖으로 내진 못한다. 때문에 사라는 그저 씁쓸하게 입가만 일그러트렸다. 그 모습을 뭐라 생각했는지 카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 세이야 때문에 돌아가고 싶은가?”
“…………아뇨. 슬프지만 전 제 주제를 잘 알아서요.”
돌아가 봤자 방해나 안 하면 선방한 거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끔살. 물론 단순히 폭주한 정도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겠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는 일어나기 쉽다고. 심지어 변명하기도 쉽고.
에라. 사라는 모든 걸 포기한 채 몸을 젖혀 보병궁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고 어둡기 때문인지 제대로 보이는 건 없다. 설령 보이더라도 뭔가 있지도 않겠지만.
어차피 지금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현재 사라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는 건 다른 일이다. 카논에 의해 던져진 세이야. 거기에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왤까. 사가가 폭주하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뭔가 계속 가슴에 걸렸다. 그런 심정을 말하자 카뮤가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샤카가 화낼 때마다 네가 희생양이 되는 게 겹친 거겠지.”
“…….”
그러고 보니 그랬더랬다. 왜 우리 남매는 운명까지 닮아있는 것인지. 사라는 속으로 통곡하며 미로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라를 가장 많이 희생양으로 삼은 사람이 미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에 사가가 폭주하는 데 쐐기를 밖은 것도 미로였다. 이래서야 안 씹을 수가 없다.
“……카뮤.”
“음?”
“이유는 묻지 말고 나중에 미로 좀 36시간 정도 얼려 주세요.”
“그러지.”
과연 아쿠에리어스. 친구를 얼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대답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심지어 긍정의 대답이다.
사라는 가감 없이 반짝이는 눈길을 카뮤에게 던졌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덤으로 엄지도 척 들어주자 보답으로 카뮤가 쿨하게 웃는다. 이상하게 카뮤하고는 이런 부분에서 죽이 잘 맞았다. 혹은 효가 얘기를 할 때라거나.
문득 카뮤가 고개를 돌렸다. 사라는 태평하게 누가 오기라도 하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세인트 주제에 예쁘게 다듬어진 남자의 손끝이 위를 가리켰다.
“조용해진 걸 보니 끝난 것 같군.”
“아…….”
사라는 인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교황궁을 향해 내달렸다.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자 잔뜩 흐트러진 방의 광경이 노골적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걸 다 치우려면 고생 꽤나 할 것 같다. 그 와중에 서류의 산은 한쪽에 얌전히 쌓여 있었다. 방안과 대조적으로 조금의 더럽힘도 없는 모습에서 사가의 애환이 쉽게 짐작됐다.
그리고 이 광경을 만든 장본인은 소파 앞쪽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원래의 깨끗한 푸른색으로 되돌아온 것을 보면 확실히 폭주는 멈춘 것 같다. 넓은 등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끝에 발이 빼꼼 나와 있는 걸 보니 세이야는 이미 녹다운된 걸까.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니 웅얼거리는 사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들어보면 계속 세이야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아직 울지는 않는 것 같은데 어째 바로 명계로 끌려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다. 짤막하게 대답하는 세이야의 목소리는 아예 안 들리는 상태인 것 같다. 이거 중증이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사라는 톡톡 사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가, 슬슬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사라. 하지만, 나는…….”
“아니, 세이야가 화낼까 봐 그러는 건데요.”
사과했으니까 됐어, 라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계속 죄를 뉘우치고 사죄해 나가는 모습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괜찮다고 하는데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열 받기 마련이다. 상대가 세이야처럼 뭐든 금방 훌훌 털어버리는 성격이라면 더욱더.
다행히 충고가 먹혀들었는지 사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움직여 집무실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이 퍽 우울하다. 잠깐 그를 쳐다보던 사라는 곧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판단하고 세이야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온갖 물건을 부수고 싸웠음에도 의외로 세이야의 모습은 멀쩡한 편이었다. 군데군데 그을리거나 옷이 찢어진 부분은 있지만 골드 세인트를 상대로 이 정도면 훌륭한 편이겠지. 하긴 사가는 폭주를 한 거지 살의를 가지고 세이야를 죽이려 했던 게 아니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과실치사의 가능성이라면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다만 기력이 다했는지 축 늘어져서 꼼짝도 않는다. 아까까지는 짧게나마 말이라도 하고 있었는데. 기절한 건가 싶어도 엎드려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으므로 알 수가 없다. 사라는 동생을 내려 보다 글썽이는 눈물을 닦고 말없이 합장했다.
“……누나, 나 아직 안 죽었는데.”
“어라, 모처럼 엘리시온에 가라고 기도했는데.”
“내가 엘리시온에 가서 어쩔 거야……”
“간 김에 하데스랑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
일부러 농담조로 얘기하지 신음이 들려온다. 이런 것조차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위로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세이야가 어리광부리듯 몸을 붙여왔다. 안타깝게도. 가련한 막내를 달래며 사라는 반드시 무슨 수라도 써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사가의 폭주가 있고 며칠 후, 갑자기 성역의 최고 연장자 두 명을 제외한 골드 세인트 전원의 소집령이 내려졌다. 그것도 아테나의 이름으로. 갑자기 무슨 일이래, 누가 또 사고 쳤어?, 설마 드디어 사가가 쓰러지기라도 했나, 등등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골드 세인트들은 황급히 교황의 거처를 향해 뛰어갔다. 허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뜻밖에도 아테나가 아니라 꽤 쌩쌩한 모습의─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에서만─ 사가와 성역의 서고 관리인 사라였다.
그리고 소심한 아가씨는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골드 세인트─라고 쓰고 웬수라 읽는다─에게 포부도 당당하게 선언했다.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서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한 개선을 요청합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대다수는 못 알아들었지만 데스마스크를 비롯한 눈치 빠른 몇몇은 금방 알아차렸다. 페가수스(세이야) 때문이구나. 과연 궁극의 브라콤. 이건 피닉스(잇키) 못지않다.
몇몇이 떫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사라는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치 미리 연설문을 작성해 두기라도 한 듯 막힘이 없다.
“아무리 성역이라는 특수한 배경을 생각하더라도 이제까지의 업무량은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원래 하루 노동량은 8시간이 정석입니다. 게다가 모두 다 같은 성역의 구성원인데 사가 혼자만 부담을 떠맡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죠.”
틀린 소린 아니다. 오히려 이치에 맞는다. 이제까지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은 게 이상했던 거다. 그걸 알기에 딱히 대단한 양심은 없어도 반박할 수 없던 데스마스크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모두와의 공평한 부담 배분을 원합니다.”
즉, 다 같이 서류를 처리하자는 소리다. 사라의 뒤에서는 사가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이때까지 별말은 없었지만 역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받았나 보다. 아닌 척해도 동작 하나하나에 절박함과 살기가 진득하니 깃들어 있다.
이런 내용이 나오리란 걸 대충 예상하고 있던 데스마스크는 거칠게 혀를 찼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다른 골드 세인트들의 얼굴도 크게 썩어들어 갔다. 당연한 소리지만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게 지루한 서류 처리라면 더욱더.
개중에 평온한 건 원래 서류를 분담해 처리하고 있던 므우나 카뮤 정도밖에 없었다. 아니, 이쪽은 오히려 희미하게 웃고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차피 그 꼬맹이 때문에 그런 거잖아.”
순순히 끌려가기 싫었던 데스마스크는 일부러 비꼬듯 말을 흘렸다. 하지만 사라는 크게 찔려하는 대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부정은 안 하겠지만, 사가는 어쨌든 간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기도 해요.”
“하?”
“주로 사가에게 당하는 건 같이 일하는 카논이나 므우나 카뮤가 될 테니까요. 아프로디테도 궁이 가까우니까 위험하고, 세이야가 없으면 보통 사가를 막는 건 아이오로스일테고요.”
거기서 말을 끊고 사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흐리마리하기 때문인지 더욱 처연해 보이는 미소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드라마 속 희생적 여주인공 같은 미소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으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사라…….”
이름을 불린 사람들이 전부 감동적인 표정을 짓는다.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데스마스크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악당 같지 않은가.
허나, 동시에 데스마스크는 조금 감탄도 했다. 마냥 소심한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연기도 잘한다, 저 녀석. 다른 건 몰라도 조금 전의 미소엔 작위가 분명히 섞여 있다. 역시 페가수스가 걸리니 이렇게 행동이 달라지는군. 과연 궁극의 브라콤(이하생략)
참고로 사가는 은근슬쩍 심한 말이 나온 것도 모르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마치 그것밖에 못 하는 인형 같다. 역시 스트레스를(이하생략2)
“……걱정하는 건 저들뿐인가?”
은근히 섭섭한 듯 아이오리아가 묻는다. 보이지 않는 사자의 귀가 축 처진 것 같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사라는 진심을 담아 대답해 줬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제대로 걱정하고 있어요. ……미로는 아무래도 좋지만.”
“……잠깐, 거기서 나는 왜 빼는데. 저번에도 그렇고! 카뮤한테 얼려 달라 한 것도 그렇고! 은근히 나한테 막 대한다?!”
“왜 그런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미로의 반발에 절대 영도의 대답이 떨어져 내렸다. 그에 미로는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찔리는 게 있음이다. 그 뒤로 아이오로스의 새카만 미소가 반짝였지만 주변에 있던 모두는 그것을 못 알아챈 척해주었다. 잠시의 행복이라도 누리거라, 전갈이여.
물론 이렇게까지 말해도 대다수는 여전히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노동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어차피 사가가 폭주하는 건 어쩌다 한 번이니 차라리 한판 뜨고 말지. 안되면 도망이라도 치면 되고.
제각각 정도의 차는 있지만 세인트란 대부분 단순한 족속들이다. 덕분에 모두의 생각을 남김없이 읽고만 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못됐네, 이 사람들.
“다들 잊고 계신 모양인데 제가 걸리면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즉사거든요?”
“아…….”
모두의 양심을 직격으로 건드린 건지 골드 세인트들의 표정이 흔들린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사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시면 권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네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는 뒤쪽에 있던 커튼을 확 젖혔다. 넓은 공간이 드러나고, 거기서 사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한 여성이 나왔다. 부드러운 보라색 머리카락, 지성으로 반짝이는 눈망울, 어린 외모에서 흘러넘치는 자애와 포용력. 성역의 주인이신 아테나다. 그제야 자신들을 호출한 자가 누구인지 떠올린 세인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오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신의 위압이 장난 아니게 느껴졌다. 그녀의 가녀린 팔에 들린 니케의 지팡이가 한 번 더 위압감을 더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인트들을 보며 여신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껏 사가의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전부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면 되는 법. 그러니 여러분, 사가를 위해서라도 부디 힘을 빌려주세요.”
“아테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혼자 감동하는 사가를 내버려 둔 채, 내막을 전부 짐작할 수 있던 세인트들은 은밀하고 신속한 코스모 통신으로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합쳤다. 저거 페가수스 때문이지? 세이야 때문이네요. 그것 말고 뭐가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 반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까라면 까야하는 법. 골드 세인트들은 자애로우신 자신들의 여신을 향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 뒤에서 사라와 사오리가 서로 잘했다는 듯 미소를 주고받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덤 1.
사라의 반란(?)이 있고난 뒤 어느 날, 갑자기 샤카가 집무실로 찾아왔다.
당연하지만 이 남자가 서류 처리를 도와주러 왔을 리가 없다─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시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평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내방인가, 하고 사라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샤카는 사라는 신경 쓰지도 않고 주변만 둘러보았을 뿐이다.
“……샤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샤카가 이쪽을 본다. 그러더니 뜻밖의 것을 물어보았다.
“사가는?”
“……네? 잠깐 어디 나갔는데요…….”
“요즘 그의 상태는 어떻지.”
“……에, 저, 다른 분들이 도와줘서 그런지 전보단 조금 나은 것 같기도…….”
일단 대답은 꼬박꼬박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런 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 머리 위로 퀘스천 마크를 띄우자 샤카가 답지 않게 망설였다.
“……사가가 폭주하면 네가 제일 위험해진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설마 걱정이 돼서 와준 거라든가? 빤히 바라보자 샤카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그것이 대답 같다. 그에 사라는 무심코 삐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뭔가 엄청 기뻤다.
“……샤카,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실래요?”
덤 2.
몇 번이고 말하는 거지만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게 익숙하지 않은 서류처리라면 더욱더. 그러니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을 분배함과 동시에 조만간 누군가 하나 터지리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태였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그리고 가장 먼저 터진 건 전갈좌의 남자, 미로였다.
미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자 그 여파로 쌓여있던 서류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하지만 사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접적이라고는 해도 사가의 폭주를 경험하고 난 뒤다. 덕분에 미로의 땡깡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배짱이 생겼다. 어차피 예상 범주 내였기도 하고.
하지만 이대로 일을 안 하는 건 조금 곤란한데. 뛰쳐나가는 거 아닌지 몰라. 그건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라는 미로 쪽으로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미로, 일이 하기 싫은 건 알겠지만…….”
“그게 아니라!!”
사라의 말을 턱 자르며 미로가 맞은편에 있던 샤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검지 끝에서 뾰족한 손톱이 진홍색으로 빛난다.
“왜 샤카는 아무 일도 안 시키는데!!”
미로의 말마따나 샤카는 아까부터 서류는 하나도 보지 않고 차만 호로록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거라면 어떻게든 넘어가겠는데 사라도 그에게 일을 시키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건 명백한 차별이다. 자신에게는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미로의 절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샤카도 일하고 있잖아요.”
“어디가?!”
“얌전히 잘 있는데, 저것만으로도 충분히 일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
사라가 너무 당연한 듯 말해 미로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기서 반박을 하긴 해야겠는데 뭐라 반박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덕분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미로는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3시간 동안 서류처리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