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놀러 온 세이야들과 얘기하던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사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형제? 하고 다시 시선만으로 묻자 세이야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태연하게 얘기하지 말란 말이다.
어지간히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시류가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몰랐습니까?”
“응…….”
정말 몰랐다. 아무 것도 몰랐다. 전혀 들은 기억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그냥 까먹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사라는 분명히 후자라고 확신했다.
사라는 다시 소년의 말을 곱씹으며 세이야부터 시작해서 슌, 효가, 시류의 얼굴을 차례로 천천히 살펴보았다. 형제라고 듣고 나니 왠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래, 이 네 명이 형제란 말이지.
한참 동안 소년들을 바라보던 사라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부지불식간에 한숨이 튀어나온다.
“어쩐지 잇키와 세이야가 닮았더니.”
사라의 솔직한 감상에 세이야가 매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 처음 들어.”
“친형제보다 이복형제끼리 더 닮았다는 말도 미묘하고 말이지.”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효가의 말에 사라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누가 뭐라고 말한들 자신이 그렇게 느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보다 슌이랑 비교하면 세상 누구든 잇키랑 닮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사소한 것에 깊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이 소년이다. 별로 안 닮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세이야가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형제가 더 있는데.”
“응?”
다섯 명으로도 충분한 데 또 있다고?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사라의 반응에 소년들은 서로 공범자 같은 시선을 교환했다. 대표로 설명한 것은 제일 어린 세이야였다.
세이야의 말에 따르면 항상 같이 다니는 이 네 명 플러스 잇키가 사실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라고 한다. 거기에 세이야의 누나인 세이카와 사라가 아직 만나지 못한 형제들이 다섯 명 더. 즉, 형제가 총 열한 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원래는 100명 정도였어요.”
대부분 세인트 수행 도중에 행방불명되었지만, 라고 슌이 담담히 보충 설명하자 다른 셋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대부분이라는 건 바꿔 말하자면 여기 있는 이 소년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단 소리다. 확실히 그걸 생각하면 별로 좋은 표정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시류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었던 수행 시절을 떠올리는지 세이야의 얼굴은 완전 사색死色이다. 효가도 답지 않게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그 남자도 뭔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지.”
효가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 반응에 사라는 소년들의 심정을 대충 짐작했다.
일단은 아버지가 되는 존재를 그 남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소년들이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긴 얘기를 들어보면 자식 취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은 것 같고 말이지. 제아무리 세계를 위해서라지만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남자를 아버지란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하기 힘들었으리라.
저 대단하다는 말이 비꼼이라는 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게 자식의 수에 관한 게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비꼼이라는 것도.
알지만,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라는 입이 간질거려 말을 꺼내지 않는 게 힘들었다.
“별로 100명 정도는 대단한 게 아니지 않나?”
““““하아?””””
폭탄 발언에 네 명이 사이좋게 합창한다. 한껏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소년들을 보고 사라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기네스북에 러시아의 한 여인이 일생 69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돼 있었지. 그리고 모로코의 마지막 황제 무레이 이스마일에게 음, 얼마더라.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800명 넘는 자식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뭐, 이건 한 나라의 왕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잠깐 정적. 슌도 시류도 효가도 전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다. 평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모습에 사라는 느긋하게 소년들의 얼굴을 감상했다. 역시 얼굴 때문인가, 이런 멍청한 표정도 귀엽단 말이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사라는 진심이었다.
유일하게 사라의 마수를 피해낼 수 있었던 건 순진하다 못해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이야 뿐이었다.
“사라는 별걸 다 알고 있네.”
솔직한 감탄의 말에 뭐어, 하고 사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원래 어렸을 적부터 그런 잡다한 지식에는 관심이 많았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라 드러낸 적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사라는 척 검지를 세워 보였다.
“세인트 후보생으로 보내졌다던 아이들은 모두 남자?”
“그렇습니다만…….”
시류가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얼굴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라고 쓰여 있다. 슌이나 효가의 얼굴도 비슷하다. 음, 이쪽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말이지. 사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턱을 긁적였다.
“그렇다면 세이야의 누나처럼 다른 여자 형제가 있을 수도 있단 소리 아닌가?”
“에?”
“그렇잖아? 솔직히 확률적으로 따졌을 때 남자애들만 낳을 리가 없잖아. 여자 형제도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우아아아아아, 하고 누군가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패닉에 빠진 소년들을 보고 사라는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따졌을 때의 얘기다. 제가 말하긴 했지만 사라는 세이야들에게 형제가 더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만약 세이야들이 말한 대로 ‘그 남자’가 남자아이들의 존재 여부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면 여자아이들까지 파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었겠지. 그랬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오리는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사오리라면 세이야들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일 정도는 했을 거라고 사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소년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 같다. 갑자기 제시된 가능성에 세이야는 절절한 몸짓으로 사라를 붙잡았다.
“만나면 어, 어떻게 하지?!”
어딜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세이야의 모습에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소년의 머리를 퐁퐁 두드렸다.
“아직 있다고 결정된 것도 아니니까 진정해, 세이야.”
“그렇지만!!”
격렬한 반발이 되돌아온다. 사라는 다시금 넘쳐흐르려는 한숨을 물어 죽이며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분명하게 말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설령 있다고 해도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 미리 걱정해 봤자 쓸모없으니까 그냥 농담으로 듣고 흘러넘겨.”
그제야 겨우 진정된 걸까, 사라의 말을 듣고 소년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제 저희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별로 작은 소리가 아니었기에 사라는 소년들이 ─만약 형제가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하고 있다는 알 수 있었다. 뭔가 상상력을 한껏 부풀리는 것 같지만 형제들만의 대화였기에 사라는 별달리 끼어드는 일 없이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날의 대화를 잊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사라는 갑작스럽게 사오리의 호출을 받았다.
얘기를 들었을 당시 사라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여신과 그라드 재단의 업무가 바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녀를 대하기 어려워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그녀가 사사로이 호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른 장소도 평소 애용하는 집무실이 아니라 접견실이다. 편한 장소를 내버려두고 굳이 왜? 사가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집무실은 매번 놀러 오는 브론즈 세인트들과 매번 쳐들어오는 샤카 덕분에 보육원으로 변해있는 상태였으니까. 더군다나 사오리 본인도 아무렇지도 않게 집무실을 드나들곤 했다.
이처럼 의문은 많았지만 사라는 얌전히 사오리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허튼일로 자신을 불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고용주의 심기를 거스르긴 싫었다. 월급이 깎이면 어쩌려고.
그렇게 접견실 앞에 도착한 사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낭비가 많은 건물이다. 이렇게 쓸데없이 큰 문이라니. 열기도 힘들게. 엄청 무거워 보이네. 안타깝게도 지금 주변엔 도움을 청할 만한 없었다. 노크를 한다 치더라도 안에 있는 게 사오리인 이상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제아무리 전쟁의 여신이라도 겉모습은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약해 보이는 소녀였으니까.
결국 사라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문에 손을 댔다. 그대로 팔에 힘을 주자 생각보다 가볍게 문이 열렸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반쯤 문을 연 사라는 그 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손을 떼자 귀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쿵, 묵직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라는 안도했다. 어떻게든 들어는 왔구나.
그때, 갑자기 뺨이 따끔거리는 시선이 박혔다. 누구야, 사오리 아가씨인가. 하고 고개를 든 사라는 그대로 굳었다. 뺨이 가늘게 경련한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혹은 소년들─이 있었다.
“에…….”
도대체 누구? 크로스를 걸치고 있으니 세인트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지나가면서 한두 번 본적이 없는 것도 아닌 건 같지만 지독히도 낯설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진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사라는 절망했다. 나 혹시 잘못 찾아왔나요…?
“사라?”
허나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와 사라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낯선 이들보다 더 안쪽에 익숙한 브론즈 소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겨우 아군을 찾은 사라는 반색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자 저마다 웃으며 인사를 던진다. 오랜만에 만난 잇키는 말 대신 고작 시선만 던졌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샤카가 괴롭힐 때마다 도와주는 은인님이신 걸요. 고작 이런 걸로 섭섭할 리가 없다. 조금 토라졌을 뿐이지.
“그런데 사라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세이야의 물음에 사라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사오리 아가씨가 불러서 왔는데…….”
“사라도?”
소년들이 이상한 얼굴을 한다. 아무래도 다들 사오리에게 불려서 온 모양이다. 어쩐지 방랑벽이 붙어있는 잇키가 끼여 있는 게 좀 이상하다 했더니. 자세히 보면 잇키의 한쪽 팔은 안드로메다의 사슬에, 다른 한쪽은 세이야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주 방지책이지만 사라는 조금 부러웠다. 나랑 자리 바꾸지 않을래.
그나저나 계속 뒤통수가 따갑다. 경계는 풀었지만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시선 덕분이다. 사라는 남모르게 한탄을 삼키고 옆에 있던 시류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저번에 말했던 저희 형제들입니다.”
“너희랑 아버지만 같다던?”
시류가 난처하게 웃는다. 사라는 어설프게 대답을 피하는 그 모습에서 시류가 그 남자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읽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장 예의 바르고 고지식한 시류가 이 정도면 다른 아이들은 어떨지. 사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제가 뭔가 말할 처지가 아니다.
대신 사라는 시류의 또 다른 형제들을 살폈다. 분명 다들 또래라고 했던가. 아버지가 다르다지만 정말 제각각으로 생겼다. 하긴 자식이 꼭 부모를 닮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초면인 5인과 더불어 시류, 효가, 잇키까지 훑던 눈동자는 세이야와 슌에 이르러서 멈췄다. 눈길을 받은 두 사람이 눈을 깜빡인다. 천진한 두 막내를 바라보고 사라는 무심코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뭐야?”
시선이 맘에 들지 않는 듯 세이야가 콧잔등을 찌푸린다. 사라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아니, 세이야랑 슌은 아직 좀 더 자라야겠구나 싶어서.”
다른 애들에 비해서 많이 작잖니, 까지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그 말을 이해한 세이야와 슌은 폭발했다.
“별로 작은 건 아니라고!!”
“저희 성장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하긴. 따지고 보면 둘 다 평균 혹은 그보다 조금 큰 정도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골드 세인트들이 쓸데없을 정도로 커서 느끼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다지 클 것 같지 않은 샤카나 므우도 180cm를 넘은 위너니까 말 다했다.
애당초 평균도 못 되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던 터라 사라는 미안, 하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세이야와 슌은 여전히 씩씩대긴 했지만 얌전히 사과를 받아주었다. 원래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이니만큼 사과하는 사람들에게 더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거겠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라고 약속까지 하고 나서야 소년들의 얼굴이 펴졌다. 옆에서 형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나 어깨를 두드려 주는 모습이 참 정답다.
근데 사오리 아가씨는 왜 안 오는 거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데 때마침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사라는 고개를 들었다. 안쪽에서 사오리가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 사오리 아가씨, 사오리씨. 소년들이 저마다의 호칭으로 그녀를 환영한다. 딱히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머쓱해 사라는 멍청히 서 있었다. 어째 자신이 불청객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꼭 기분 탓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허나 의외로 사오리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사라였다.
가볍게 시선이 맞았다. 소년들에게 인사한 뒤, 자신에게 다가온 사오리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사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사라.”
“……아뇨.”
까라면 까겠습니다. 라는 심정으로 사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려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분이니 이 정도 일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응해줄 수 있다. 애당초 샤카가 저지르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문득 사오리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영 그녀답지 않게 약한 모습이라 사라는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먼저 사과드릴 일이 있어요.”
“……무얼?”
“이전에 몰래 당신의 뒷조사를 했습니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애당초 선선히 자신을 받아들였던 사오리가 이상했던 거다. 그라드 재단만이라면 모를까 성역이란 비밀에까지 접근한 사람에게 아무런 의심도 없다니. 샤카가 억지로 데리고 온 쪽이었기에 의심의 여지는 적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 정도는 했어야 했다.
담담한 반응에 사오리가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허나 그 표정도 곧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사라. 당신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버지요?”
뜬금없는 방향전환이다. 허나 보스의 질문이었기에 사라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사라에게 있어 아버지란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에는 궁금함과 서운함을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허나 어머니만으로도 충분한 걸 알게 되자 그런 감정은 곧 사라져버렸다. 주변의 악의 어린 말도 관심을 꺼버리자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조금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체 없는 대상에게 어떤 감정을 품어봤자 허무할 뿐이다. 원망은 금방 사그라졌고, 조그만 미움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자신에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오롯한 사실. 이제 와 아버지란 사람이 자신을 찾는다 해도 그를 아버지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이 보낸 시간이 없기에, 추억조차 남아있지 않기에. 혈연이란 가느다란 실에 의지하기는 너무 덧없어서.
그런 감정을 더듬더듬 설명하자 사오리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순간이지만 마음에 깊이 새겨질 정도로 인상 깊었다.
“사실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도 들어주세요. 중요한 일이니까.”
사라의 소심한 반항을 막으며 키도 사오리가 선언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키도 미츠마사. 즉, 당신과 세이야들은 형제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완벽하게 얼어붙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키도 미츠마사. 즉, 당신과 세이야들은 형제입니다.”
사오리가 그렇게 선언한 순간 시류는 불경하게도 자신들의 여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사오리는 매우 정상으로 보였으며, 이런 일을 가지고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이라면 또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시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지금 제가 느끼는 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한 경악이라기엔 너무 난폭했고 분노라고 하기엔 지독히도 차분했다. 단순히 혼란이라 말하면 편하겠지만 그러기엔 뭔가 어긋나 있다.
다들 비슷한 심정인지 전부 표정이 비슷하다. 다만 제일 중요한 사라만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 제대로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라는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평소 대부분의 일에 무덤덤하고 순응적인 사라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가볍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들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알린 건 사라 본인이 아닌가.
물론 그것이 얼마나 태평한 생각임을 시류도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담담한 성격이라 한들 자신의 출생과 자신도 모르던 가족에 대한 얘기에 미동조차 하지 않을 리가 없다. 만약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대단한 용자거나 어지간히 무정한 자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사라는?
이기적인 말이지만 시류는 사라가 자신들을 별 잡음 없이 받아들여 줬으면 했다. 처음 느꼈던 충격은 어느새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폭탄선언을 듣는 게 두 번째여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사라에 대한 호의가 분명하게 깔려있다.
기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시류는 여전히 키도 미츠마사를 자기 아버지라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음을 안다. 그가 무조건적인 악인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단순한 이해와 용서 사이에는 절대적인 간극이 있었다. 설령 언젠가 그를 원망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시류는 자신의 생부라는 남자를 결단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형제들에 대한 애정은 별개의 문제다. 비록 자신의 몸에 흐르는 그의 피가 끔찍하게 싫더라도 그의 피로 연결된 형제들은 사랑스럽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 목숨을 나눈 형제들.
그렇기에 시류는 사라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 세이야나 슌,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다만 이 마음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닐까 걱정될 뿐.
물론 사라가 자신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역시 별개의 문제다. 본인이 말했듯 단순히 혈연이란 이유만으로 타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자신들이야 어쨌든 적어도 사라는 그래 보였다. 때문에 걱정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반발로 이제까지의 호의가 악의로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니까.
문득 사라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어깨가 떨렸다.
“……착각일 가능성은 없나요?”
“없습니다. 유전자 검사까지 모두 끝냈어요.”
그건 또 언제 한 거지. 시류는 치밀한 전쟁에 여신에게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야 뭐든 확실히 하면 좋긴 좋지만 상황이 이러니 뭔가 압박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사라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지 아무런 불평도 끝내지 않았다. 다만 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공기가 삐걱거린다. 살갗을 날카롭게 찌르는 긴장이 느껴졌다. 결국 이런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세이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라?”
짤막한 부름에도 사라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휙 뒤돌아본 그녀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누나.”
“………응?”
“누나라고 불러.”
그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마음이 얼어버릴 정도로 시린 바람이었다. 눈치 없는 세이야는 효가에게 냉기를 뿜지 말라고 말했다가 결국 가볍게 한 대 얻어맞았다.
천하태평인 막내는 내버려두고 시류는 빤히 사라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갑자기 무슨 얘기입니까?”
“무슨 얘기긴. 누나라고 부르라는 게 무슨 문제 있어? 이복 누나라도 누나는 누나잖아.”
사라가 너무 당당하게 말해 시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틀린 소린 아니지만…… 방금까지 고심하는 것처럼 있던 사람이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심정은 다들 마찬가지인지라 슌은 쓴웃음 지었고 효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잇키는 크게 인상을 썼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라 한탄하거나 하늘을 우러르거나 하는 둥 저마다의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다만 이미 누나라는 존재에 익숙해져 있던 세이야만이 웃었을 뿐이다.
“누나!”
“응.”
기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라를 보며 시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복누이는 생각보다 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저 정도는 돼야 샤카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지. 라며 시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감탄했다.
덤 1.
집무실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미로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안에는 드물게도 피닉스가 있었다. 뭐, 이거야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세인트 주제에 성역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은 녀석이지만 동생들 때문에라도 가끔씩 얼굴을 비치곤 했으니까.
더불어 사라도 있었다. 이거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사라는 이미 서고가 근무지인지 집무실이 근무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들락거리곤 했으니까.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바로 사라가 잇키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서 졸래졸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것도 평소 브론즈 세인트들을 심히 귀여워하는 사라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신께 맹세코 미로는 피닉스가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도망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다.
“저건 뭐야?”
옆에 있던 효가에게 묻자 소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나라고 부를 때까지 쫓아다닌다고 하던데?”
“허어─”
무대포적인 사라의 행동에 미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평생 쫓아다닐 셈인가.”
"글쎄, 그건……. 아, 결국 잇키가 도망쳤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라를 보고 미로와 효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덤 2.
아이오로스는 성역의 영웅이자 동생의 지인이자 자신의 후계자에게 선언했다.
“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라, 세이야.”
“엥?”
뜬금없는 말에 갈색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온몸으로 갑자기 무슨 소리야!를 외치는 세이야를 보고 아이오로스는 상냥하게 웃었다.
“동생(사라)의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니까.”
“……그 설정 아직도 유효한 거였나요.”
물론 옆에서 딴지를 거는 사라의 목소리는 아이오로스에게 닿지 않았다.
왜 이것만 쓰냐고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서 변명하자면 이 글이 참 정줄 놓고 쓰기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