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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응?”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사라는 시류의 팔을 꼭 붙잡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친 돌로 이루어진 들판, 저 멀리서 보이는 완만한 모양의 돌산, 그곳까지 이어진 좁은 길, 세계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황폐한 하늘, 생기를 잃고 걸어가는 사람들. 말로만 듣던 황천비량 언덕, 즉 명계다.
시류에게 바싹 몸을 붙이자 옆에서 쓴웃음 짓는 기척이 났다.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손이 상냥하게 등을 두드린다. 행동은 부드러웠지만 내뱉어진 말은 냉정했다.
“그거야 사오리 아가씨가 명령했으니까.”
“……이래서 신이란 족속들은!”
잔혹한 현실에 사라는 절규했다.
아직 수명이 한참이나 남은─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은─ 사라가 시류와 함께 명계에 오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시류의 말처럼 사오리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원래 지상과 명계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에 주신들의 사이가 좋지 못해 각자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성전 이후 협정(물론 이 협정에는 해계도 끼어 있다)으로 인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생겼다. 하지만 따로 놀던 시절이 길었던지라 협력을 위한 조정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때문에 양측에서는 때때로 각자 사절을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중요한 일을 함부로 맡길 수 없으므로 성역에서는 대개 골드 세인트─특히 데스마스크─를 보냈다. 이전까지는.
‘그런데 이번엔 왜 나야…….’
사라는 치솟는 화를 억눌렀다. 비록 사오리 앞에서는 한 점의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꼬리를 말고 물러났지만 적어도 사라의 분노는 정당했다.
애초에 자신은 성역에서 일하고 있긴 해도 세인트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아래의 잡병들보다도 못한 위치, 쉽게 말하자면 계약직이나 될까 말까 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기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아니, 그 이전에 주먹질의 ㅈ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명계로 가라고 하는 게 어디 있냐고. 여신의 자애와 인정은 도대체 어디에 팔아먹은 건가요, 아테나!!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호위랍시고 시류를 붙여주긴 했다.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물론 시류가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데스를 쓰러트린 브론즈 5인방 중의 하나니 실력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게다가 동생들 중에서는 제일 의젓한 데다 성실해 믿음직하고,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푸근해지니 몸도 마음도 같이 케어해 주는 훌륭한 치료제다. 그런 점에서 사오리의 인선은 정확했다. 다만 시류 한 명으로 커버하기엔 사라의 공포심이 너무 컸을 뿐이다. 왜냐하면─
“또 유령이야…….”
사라는 유령이라면 딱 질색이었으니까.
옆으로 망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생기 없는 모습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진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결국 사라는 시류와 함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솔직히 말해 걸어가고 있다기보다는 반쯤 시류에게 매달려 가고 있는 것에 가깝다. 동생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람. 그래도 뭐라고 타박하지 않아 주는 게 고맙다. 아마 세이야였으면 답답하다고 지금쯤 자신을 들쳐업고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바람 빠진 것처럼 시류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유령을 무서워할 줄은 몰랐어.”
슬쩍 올려다보자 시류가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해 사라는 조금 울컥했다.
“사람이라면 뭐든 무서운 게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야. 밀린 월세라든지, 텅 빈 냉장고라든지, 월급 안 주는 사장님이라든지 유령이라든지!!”
“……마지막이랑 앞은 종류가 너무 다른 것 같은데.”
“…………사회인은 고달프거든.”
“……그래.”
새카만 눈동자에 얼핏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동생에게 한껏 동정을 받은 사라는 모른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걷다 구멍에 떨어진 다음 지옥문을 지나 또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은 강가에 도착했다. 강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저 너머가 보이지 않는 강. 아케론 강이다. 정말로 크구나. 그런 생각이 멍하니 머리에 떠올랐다.
직무 태만 뱃사공이 보이지 않았기에 사라는 쉬기라도 할 겸 강가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걸었던 탓인지 발이 심히 아프다. 너무 아픈 나머지 주변에서 뒹굴고 있는 망자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역시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멍하니 강의 흐름을 바라보던 사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여기만 건너면 되는 거야?”
“……안타깝지만 여기가 입구야.”
그럴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기에 사라는 그저 웃었다.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어쨌든 웃은 건 맞다.
하긴, 실제로 신곡을 보면 단테도 이 아케론 강을 건너 8 감옥을 통과하며 안내자가 있었음에도 별별 고생을 다 했더랬다. 그러니 자신이라고 편하게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연옥이나 천계까지는 안 가도 되니까 그나마 다행인가.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투정이 튀어 나온다.
“…………뭔가 비밀 통로 같은 건 없으려나.”
“있어도 가르쳐주진 않겠지.”
시류가 정론을 말한다. 너무 정론이라 사라는 아무런 반박도하지 못했다. 신화시대부터 싸워왔던 사이다. 지금이야 협약을 맺고 있다지만 그것조차 시한부. 언제 다시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자신들의 중요한 정보를 내어줄 리가 없을 것이다. 성역이 그런 것처럼.
그래도 말이지. 한숨이 튀어나온다. 사라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시류는 다 좋은 데 성실한 만큼 융통성이 좀 떨어졌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다른 애들이면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을 텐데─물론 잇키는 제외─ 저렇게까지 진지한 답변이라니. 솔직히 너무 허탈해진다.
옆에서 시류가 이상하단 시선을 보냈지만 사라는 답해주지 않았다. 때마침 저쪽에서 뱃사공이 다가왔기에 거기에 주의를 빼앗긴 탓도 있다.
“카론이 온 모양이군.”
시류도 그를 발견했는지 손을 내민다. 사라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까워질수록 상대의 모습이 더욱 뚜렷이 보였다. 크로스와는 전혀 다른 색과 광택을 가진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 그에 이질감이 들었지만 이 명계에서 유령이 아닌 자들은 모두 저런 스펙터들밖에 없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배가 강가에 닿았다. 사라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배 위로 올라섰다. 이제 본격적으로 명계를 가로질러야 했다.
완만하게 몸이 흔들렸다. 마치 요람 속에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이다. 덕분인지 기분 좋게 의식이 부상한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검정. 밤하늘과 같은 머리카락이다. 그 너머로 핏빛 하늘이 보였다. 선명한 대비에 사라는 눈을 깜빡였다.
“깼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류. 조용히 부르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사라는 그제야 제가 시류에게 업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에 오른 후의 기억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술을 마셔 필름이 끊긴 것도, 어딘가 얻어맞아 기절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
“……나 혹시 잤어?”
“응. 너무 잘 자서 깨우기 미안하던데.”
등에서 내려주며 시류가 여상스럽게 대답한다. 사라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막지 못했다.
이런 쪽팔린 일이. 거기에 시류는 둘째 치더라도 스펙터도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이에 멍청하게 자는 얼굴을 보이다니. 혹시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니겠지.
기분 탓인지 입가가 축축한 것 같기도 했다. 사라는 몰래 입가를 닦아내며 변명해봤다.
“……건너는 데 너무 오래 걸리더라고. 유령도 없으니까 긴장도 풀렸고.”
“뭐, 확실히.”
정말로 동감하는 건지 단순히 누나의 체면을 생각해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긴, 다른 누구라도 아케론 강이 넓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간까지 건너는 것만 해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강이다. 그걸 넓다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넓다고 할까.
뭐, 건너는 데 시간이 걸린 건 단순히 강이 컸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지만.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동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뱃사공을 떠올리고 사라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모터보트로 바꾸면 편할 것 같던데.”
중얼거림에 시류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쪽을 보는 얼굴이 오묘하다.
“……진심이야?”
“응? 물론이지. 편할 것 같지 않아?”
“확실히 편하긴 하겠지만…….”
거기서 시류가 우물거렸다.
“……명계에 최신문물은 이미지상 좀 아니지 않을까.”
“이미지보다는 효율을 따지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아, 또다. 라고 사라는 생각했다. 가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 시류의 표정이 딱 그랬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허를 찔렸다는 듯,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는 표정.
사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절실한 진심이긴 했지만 동시에 단순한 말 뿐이기도 했다. 원래 이리저리 나서서 제안하고 개혁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명계에 대해 제가 발언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걷기 시작하자 시류가 뒤따라온다. 잠시 뚜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져 있다. 반사적으로 계단을 오르던 사라는 문득 깨달았다.
“저기, 시류. 안 보여서 잊고 있었는데 이 앞에 가면 또 유령이 있겠지?”
“그렇겠지.”
역시나 담담한 대답이 돌아온다. 사라는 뒤돌아 10살 아래의 동생에게 간절하게 애원했다.
“……손잡고 가자.”
계단을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재판소가 눈앞에 튀어나왔다. 명칭에 걸맞게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건물이다. 원래 죄가 없어도 경찰을 보면 도망치고 재판관 앞에서 움츠러드는 게 사람인지라 사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사라와 다르게 시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척척 걸음을 옮겼다. 저를 이끄는 동생을 보고 사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니 얘가 겁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전부 깨부수며 쳐들어간 적도 있다는 데─이렇게까진 말 안 했다─ 그냥 들어가는 것 정도야 거리낄 게 없긴 하겠지.
건물 안은 조용했다. 사람이 없어 조용한 게 아니라 건물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덩달아 사라도 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했다. 발자국이 울리는 소리가 기괴하게 컸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지나자 커다란 법정이 나왔다. 제일 상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는 풍성한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검은 옷과 은발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눈동자는 어두운 보라색. 미인인데 엄청 깐깐하게 생겼다, 라고 사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때마침 튀어나온 남자의 목소리가 사라의 추측에 박차를 가했다.
“……드래곤. 어째서 살아있는 인간, 그것도 세인트가 아닌 자를 데려온 거지.”
깐깐하단 말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말에 가시가 삐죽삐죽 서 있다. 사라는 일단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저기, 시류가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일단 저희 둘 다 아테나가 시켜서 온 건데요.”
그 말에 남자의 미간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젠 아테나도 별짓을 다 하는군.”
이번에는 아무런 반박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류는 할 말이 없었으며 사라는 그럴 의리가 없었다. 날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이 누군데 변명을 해줘. 이제사 말하는 거지만 사라는 아테나가 자신을 명계로 보낸 일을 원한으로 새겨뒀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왔다. 그를 보고 재판관이 반색한다.
“미노스 님.”
“무슨 일인가요, 르네. 아까부터 소란스럽던데.”
“그게…….”
그러면서 설명을 시작하는 데 어째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에 비해 너무 저자세다. 사라는 궁금증을 참다못해 시류의 손을 꾹꾹 눌렀다.
“……누군지 알아?”
“삼거두 중 하나인 그리폰의 미노스야.”
어라, 이제 1관문인데 갑자기 중간보스 등장이시다. 밸런스 패치는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긴 인생은 실전이지 게임이 아니고 지금은 싸우러 온 것도 아니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사라는 빤히 미노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도중 문득 시선이 맞았다. 안 그래도 앞머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더욱 가늘어진다. 그가 웃은 것이다. 순간 사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건 샤카 앞에서나 받은 느낌인데?!
삽시간에 경계태세에 들어간 사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노스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여유로움만 보면 과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답다.
“뭐, 얘기는 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도록 하죠.”
“…………네?”
어안이 벙벙한 둘에게 미노스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반짝반짝 흩뿌렸다.
“어차피 저도 가는 길이니까요.”
느닷없이 프리패스권이 생겼다. 뭐지, 이 친절. 이 사람 사실 좋은 사람인 건가? 사라는 혼란에 빠졌다.
어찌해야 좋을지 시류를 올려다보자 이쪽도 난처한 얼굴이다. 사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자신들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이곳은 저쪽 영역이니 괜한 반항은 좋지 않은 데다 친절히 권해오는 데 거절하면 이쪽만 나쁜 놈이 돼버리니. 사실 그보다는 저쪽이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려 거절할 새도 주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결국, 별수 없이 뒤를 따라가는데 미노스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역시 수상쩍다.
“그런데 둘 다 언제까지 손잡고 있을 겁니까?”
“아…….”
사라는 그제야 자신들이 이제껏 손을 잡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익숙해져서 몰랐다.
지적당한 게 부끄러운 건지 시류가 손을 빼내려는 듯 꼼지락거린다. 시류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강제로 빼낼 수도 있겠지만 굳이 뿌리치지 않는 건 배려일지도 모른다. 사라는 그런 동생의 배려를 악용해서 당당히 선언했다.
“계속요.”
유령 나오면 당신이 막아줄 것도 아니잖아요.
안내자로 미노스가 붙었다. 덕분에 사라와 시류의 여행길은 한결 편해졌다. 물론 여기서 편해졌단 말은 각 감옥을 통과할 때마다 일일이 설명을 안 해도 되게 되어서 편해졌단 소리지 지름길로 안내받았다는 소리가 아니다. 즉, 사라는 여전히 제 두 다리로 이 넓은 명계를 건너야 했다는 소리가 되시겠다.
그 결과, 현재 사라는 다시금 동생의 넓은 등에 업혀있는 중이다.
‘……이게 무슨 꼴인지.’
24년, 짧은 생애에서도 남자 등에 업히는 건 이게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아까 자고 있을 때 업힌 일이다. 다시 말해 퍼스트랑 세컨드 경험은 다 시류랑 했다는 말이다. 뭐, 그건 다 좋다. 어차피 동생 아닌가. 좀 못난 꼴 보이고 한심한 꼴 보여도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그것도 휴전 중이긴 하지만 적측에 있는 인물에게 이딴 꼴을 보이다니 이만저만 창피한 게 아니다. 이번 생은 망했어요. 솔직히 미노스 앞에서 당당히 손잡고 걷던 때부터 이미 망해있던 것 같지만 그건 넘어가고.
물론 사라로서도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명계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중간부터 시류에게 업혀 오지 않았으면 사라의 발걸음으로는 며칠이 걸렸을지 모른다. 인간적으로 참 잔인하다 싶다.
은근슬쩍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생활방식 때문에 저질인 자기 체력은 무시하기로 했다. 서플리스의 특혜를 받는 스펙터와 어린 시절부터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받아온 세인트에 비교해서 그런 거지 실제로는 그리 심각하진 않을 터다. 아마도.
게다가 여긴 정신력 소모가 극심했다. 여기저기 널린 풍경은 없던 감수성까지 다 뺏어가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스펙터들은 다들 무섭게 생겼지, 잊을만하면 이미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유령들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지. 덕분에 깜짝 놀라 미노스에게 매달리기까지 했다.
‘……아니, 이건 잊자.’
생각해봤자 정신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 그냥 놀라서 붙잡은 정도면 변명할 말이라도 있겠는데 거의 대성통곡 직전까지 갔으니 더욱더.
괜히 한숨만 나온다. 그걸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시류가 걱정 어린 눈길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힘들어?”
“…………조금?”
육체야 업혀 가고 있으니 상태가 나쁜 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사라는 굳이 거기까지 설명하진 않았다. 세인트라서 그런지 남자애라서 그런지 시류도 은근히 무딘 데가 있어서 자신의 섬세한 감정을 이해해 주진 못했으니.
다시금 한숨이 포로록 떨어졌다. 평소라면 뭐든 참았겠지만 지쳐있어서 그런지 참는 게 잘 안 된다. 덕분에 입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러다 이대로 명계에 살게 될 것 같네.”
짧은 혼잣말이었다. 허나 그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미노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렇게 되면 코큐토스에 좋은 자리를 알아봐 드리지요.”
“…………좋은 자리라고 해봤자 어차피 지옥 아닌가요.”
아니, 그보다 코큐토스는 제일 죄질이 나쁜 녀석들이 가는 곳이잖아. 제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죄를 짓진 않았거든요!!!
사라는 절규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미노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환하게 지어보았다.
“농담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당신의 수명이 남았으니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군요.”
“……아쉽게도는 뭐냐고요…….”
튀어나오는 욕설을 삼키며 사라는 시류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눈물이 흘러나온다. 샤카도 그렇고,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밖에 안 모이는 건가요. 내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리도 인복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인복을 동생들에게 전부 몰빵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그렇다면야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렇게 살겠지만.
계속 바보 같은 생각밖에 안 드는 게 점점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누나의 피폐한 상태를 알았는지 시류가 적당하게 끼어들어 주었다.
“미노스.”
경고하는 목소리가 15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섭다. 어지간한 적이라면 금방 꼬리를 말고 항복했을 터다. 하지만 상대는 108 마성을 통솔하는 삼거두 중 한 사람. 오히려 뻔뻔한 미소로 맞대응해온다. 주변 공기가 점점 팽팽해진다.
어째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데……? 눈치만 보던 사라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냅다 눈을 감았다. 난 좀 잘 테니 빠른 배송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진짜로 싸울 생각은 없었는지 사라는 코큐토스를 지나 무사히 쥬데카까지 배송되었다. 중간중간 불온한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그건 못들은 척하고─
쥬데카의 한구석에 있는 집무실에서 사라를 맞이해 준 건 다른 삼거두인 라다만티스와 아이아코스였다. 물론 둘 다 표정이 좋진 않았다. 아테나의 심부름이랍시고 일반인이 대뜸 찾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미노스의 반응이 이상했던 거라 사라는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인을.”
여전히 탐탁지 않은지 라다만티스가 으르렁거린다. 그 옆에서 아이아코스가 본질을 찔렀다.
“그보다 호위로 드래곤을 붙일 거면 차라리 드래곤만 보내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제 말이 그 말입니다만. 사라는 속으로 열렬하게 맞장구쳤다.
물론 사라도 사오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은 건 아니다. 비탄의 벽 같은 사오리의 미소 한방에 바로 좌절당해서 아무 소용없었을 뿐이지. 돈줄, 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니케)을 쥐고 있는 아테나는 아무도 이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성역에 머무르게 된 건가요?”
태연하게 미노스가 끼어든다. 초승달 같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 눈빛에 재촉당해, 사라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아련하게 회상했다.
“그게 샤카에게 납치당해서…….”
“납치?!”
“덕분에 12궁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매일 성역에 착취당하는 일상을…….”
“감금에 착취?!”
삼거두들이 사이좋게 경악한다. 그 모습이 퍽 볼만하다. 하지만 성역의 일원 중 하나인 시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한 발짝 떨어져 있던 태도를 버리고 사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뉘앙스가 다르지 않아?”
“거짓말은 안 했어.”
“그건 그렇지만…….”
시류의 확답에 삼거두의 눈에 동정의 빛이 더욱 진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사라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지상의 사랑과(이하생략) 세인트들에겐 착취당하면서 정작 스펙터들에겐 동정받다니.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다.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은 덕분인지 그 후의 임무는 스무스하게 잘 진행됐다. 라기보다는 사라는 아직 삼거두들과 대등하게 업무를 조정할 짬밥이 안됐으므로 서류만 전해주는 게 끝이었다. 이럴 거면 역시 시류만 보냈어도 상관없지 않았냐, 하는 한탄이 다시 들었지만 새삼스러우니 넘어가고.
한시라도 빨리 유령 소굴을 벗어나고 싶던 사라는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로 행동에 제약이 걸렸다. 잊고 있던 심부름이 하나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악의 퀘스트가.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멈춰버린 모습이 이상하게 비쳤는지 미노스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사라는 삐걱거리는 목을 움직여 간신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전해야 하는 편지가 하나 더 있는데요.”
“? 그럼 주면 되지 왜…….”
“그게, 하데스…… 님께 드려야 하거든요…….”
“하데스 님께?”
삼거두 셋이 전부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무시할 순 없는지 미노스가 손을 내민다. 허나 사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직접 전해드려야 해요.”
“직접?”
라다만티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이 더 흉악하게 보인다. 사라는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뒤에서 시류가 단단히 버텨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줄행랑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저도 사람을 얼굴로 판단하는 게 안 좋다는 건 알지만 당신은 표정이 너무 무섭거든요?! 진짜 위험해 보이거든요?! 슈라나 데스마스크가 온순해 보일 정도니 말 다한 거라고요. 그러니 제발 표정 좀 풀어주세요.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만 쨍쨍 맴돌았다.
다행히 그런 사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미노스가 가볍게 라다만티스를 타박했다─솔직히 사라에게는 놀리는 거로 보였다─.
“이런, 라다만티스. 원래도 얼굴이 안 좋은데 그런 표정까지 지으면 어쩝니까. 무서워하고 있잖아요.”
“시끄러워.”
신경질적으로 일갈하면서도 라다만티스는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어주었다. 의외로 일반인에 대한 태도는 이 중에서 제일 올바를지도 모른다.
여하튼 별수가 없었으므로 다시 미노스가 하데스에게 안내해주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듯한 복도를 걸어가면서 사라는 다시 시류에게 꼭 붙었다. 누나가 믿을 건 너밖에 없어. 뭘 부탁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부탁한다, 시류!
그리하여 만나게 된 하데스는 예상 이상이었다.
넓은 홀과 같은 공간에 계단으로 이어진 제단이 있다. 그 아래 가지런히 서 있는 여성이 아마 판도라일 것이다. 제단 위에는 쌍둥이 신과 커다란 옥좌가 있었다.
그곳에 한 청년이 앉아있다. 창백한 피부에 그와 대조적으로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키에 비해 가는 체구는 상대를 싸움과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미청년으로만 보이게 했다. 다만 눈, 옅은 물빛을 띤 저 눈이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덕분에 그에게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음을 일반인인 사라도 알 정도였다. 어쩌면 신의 위엄이라든가 품격이라든가 하는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지 미노스.”
하데스를 대신해서 판도라가 입을 연다. 결국 미노스가 설명하는 동안, 사라는 천진하게 하데스를 감상하며 시류에게 들릴 정도로만 감탄을 중얼거렸다.
“……다들 엄청난 미인이네.”
“이런 상황에서 용케 그런 감상이 나오네.”
시류의 말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얼결에 동생에게 한심한 취급을 받아, 사라는 뭘 모른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상황이니까 나오는 거야. 현실도피거든.”
때마침 설명이 끝났는지 하데스가 조용히 뇌까렸다.
“아테나가 보내온 편지가 있다고?”
중얼거림 같았지만 그 목소리는 매우 잘 울렸다.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사라는 등 뒤의 시류만 믿은 채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네. 아테나께서 직접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보일 듯 말 듯 하데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옆에 서 있는 쌍둥이 신들도 마찬가지다. 사라는 어설프게나마 그 이유를 이해했다.
올림포스 12신에 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우스, 포세이돈과 함께 3대 주신으로 불리는 하데스다. 물론 아테나도 제우스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지만 신들의 계보를 따지면 엄연히 하데스 쪽이 위. 그런데 제 조카뻘 되는 여신에게 휘둘려서야 영 체면이 안 서기도 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신화시대부터 싸워온 적의 말에 휘둘리는 것도 불쾌하겠고.
하지만 이번 성전에서 하데스가 진 것도 사실. 겉으로는 대등한 협정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갑을 관계다. 어찌 되었든 그는 아테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예상대로 하데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도라가 가볍게 눈짓을 한다. 성역에서 (한 부분에 대해서만 빼고) 눈치를 키운 사라는 그것이 재촉이라는 걸 알고 얌전히 그에 따랐다.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당연히 상대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음, 가까이서 보니까 더 미인이긴 한데 이왕이면 떨어져 살고 싶네요. 그렇게 생각한 덕분인지 성급히 편지를 건넬 때 서로의 손끝이 닿았다. 차가운 온기에 사라는 내심 몸서리쳤다. 괜히 명부의 왕이 아니구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을 끝마친 사라는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예의가 아니라는 자각은 있지만 저절로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고 만다. 어쨌든 일은 끝냈으니 되는 거 아닌가요. 허나 시류에게 돌아가자, 라고 말하려는 순간 하데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너와 페가수스가 형제인가?”
신은 별걸 다 알고 있네. 사라는 그런 얼굴로 하데스를 올려다보았다. 하데스의 얼굴에는 미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뭔가 흥미로워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명계 전담은 네가 될 테니 잘 부탁한다고 쓰여 있군.”
“……뭐요?”
하데스가 팔랑팔랑 종이를 흔들면서 하는 말에 무의식중에 날카로운 반문이 튀어나왔다. 그에 쌍둥이 신들만이 아니라 판도라나 미노스까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라는 거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뇌리에 사오리의 미소가 떠오른다. 여신으로서의 자애로운 미소가 아니라 기업 총수로서의 계산되고 반항할 수 없는 미소다. 그 순간 사라는 사오리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고, 경악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오리는 세이야들에게 집착하고 있다. 그러니 그 집착이 형제인 사라에게 옮겨와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미 세인트가 되어 아테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소년들과 달리 사라는 ─성역에 제법 깊게 개입하긴 했지만─단순한 피고용인. 막말로 하자면 어느 한쪽이 ‘우리 이제 더는 보지 말죠.’라고 선언하고 떠나도 붙잡을 수 없는 관계란 소리다.
그래서 사오리는 이런 일을 꾸몄으리라. 표면적인 업무만 보지 않게, 아주 깊숙하고 내밀한 곳까지 끌어들여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무서워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사라가 성역에서 떠나지 못하게.
팔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사라는 참지 못하고 땅바닥에 좌절 자세로 엎어졌다. 뒤에서 시류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무시. 매정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라는 확실히 사오리의 의도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 것과 납득한 것은 다르다.
다 좋다. 다 좋았다. 자신을 붙잡아 두려고 한 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동생들이 그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언젠가 성역에서 탈출하려는 맘은 버렸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친절한 사람들과 자신을 형제처럼 대해주는 사람들과 친구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긴 힘들었을 것이다.
명계에 심부름 보낸 것도 좋다. 솔직히 말해서 유령이 너무 무서워 속으로 사오리를 골백번은 더 씹었겠지만 한 번만이라면 눈 딱 감고 못 가줄 것도 없었다. 그래, 한 번만이라면.
그런데 전담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앞으로 몇 번이나 여길 또 오라는 건가요!!! 혹시 그냥 죽으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겁니까?!!!!
“……그래, 차라리 여기 남을까.”
자포자기식으로 중얼거리자 시류가 바로 반응한다.
“누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여기 다들 미인이고…….”
“미인은 성역에도 많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라는 답지 않게 냉소적으로 미소를 띄웠다.
“그렇지만 다들 성격이 그 모양이잖아.”
“……………….”
시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거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후후후후 하하하하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입술에서 새어나온다. 기가 막힌 듯 자신을 보고 있는 명계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젠 될 대로 되라지 뭐.
그 후, 시류는 2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사라를 설득하고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덤 1.
명계에서 돌아온 사라는 결국 브론즈 세인트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폐인처럼 피폐해진 꼴을 보다 못한 시온의 특단적인 조치다. 하루를 꼬박 걸려 동생들에게 푸념하고 위로받고 도닥임 받은 끝에 사라는 겨우 부활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일하러 가기는 싫어 현재는 효가의 다리를 베고 소파에 누워있는 중이다.
천장에는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엔 조금 서늘한 효가의 체온. 바로 옆에서는 세이야와 슌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평화롭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라는 한편으로 자괴감을 막지 못했다.
아무리 사정이 사정이라 한들 자신이 보인 건 틀림없는 추태다. 꽤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동생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독이고 위로해 주기까지 했다. 상냥하다. 허나 소년들이 상냥한 만큼 보이지 않는 가시가 더욱 아프게 가슴을 찔러왔다.
“……너무 어리광부리는 것 같네.”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세이야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별로 괜찮지 않아?”
“응?”
“우린 남매잖아.”
“세이야…….”
소년이 태양처럼 천진하게 웃는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걸 부정하는 기색은 없다. 사라는 뭉클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막지 못했다. 무심코 본심이 튀어나온다.
“…………카논이 세이야 반만 닮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혼나고 싶냐?”
때마침 옆에 있었던 카논은 킥킥 웃으며 사라에게 꿀밤을 먹였다.
덤 2.
오랜만에 성역을 방문했던 잇키는 사라의 팔목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작고 푸른 구슬이 달린 팔찌다. 굉장히 심플한 디자인으로, 본인 스스로도 왜 신경에 거슬리는지 모를 평범한 물건이었다. 저게 왜 신경 쓰이지?
잠깐 고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라가 액세서리를 한 걸 처음 봤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 한 적이 있는 데도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항상 사라 곁에 붙어있지 않으니 평소에 하니 안 하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 탓이려니, 하고 잇키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래도 엄청 거슬리는 데.’
어차피 확인하는 데 수고가 드는 것도 아니니까. 혼자 변명하며 잇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이, 그건 뭐야.”
“응? 아……, 이거?”
사라가 가볍게 팔목을 흔든다. 그에 따라 팔찌에 달린 구슬도 같이 흔들렸다.
“유령을 무서워한다니까 샤카가 만들어 준 부적이야.”
“하. 부적?”
예상 못 했던 이름에 잇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적이라니. 데스마스크도 아니고 샤카 녀석이 무슨 부적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하필이면 액세서리로 만들어 줬다. 굳이 꼬아 보지 않아도 무슨 흑심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허나 은근히 형제들에게 약한 잇키의 속도 모르고 사라는 밝게 웃어 보였다.
“샤카가 만들었다니까 쫓아내는 효력은 확실할 것 같지 않아?”
“……………….”
순간 반박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말마따나 확실히 뭔가 도망치게 하기에는 최적의 물건인 것 같기도 했다. 유령만이 아니라 다른 것까지. 예를 들면 샤카 외의 남자라거나 남자라거나 남자라거나.
저리 좋아하니 빼앗지도 못하겠고. 잇키는 험악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흡혈귀물을 보고 있다보니 흡혈귀AU가 쓰고 싶어졌습니다(개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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