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던 야토는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가 펼쳐진 풍경에 손을 멈췄다. 아침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새카맣게 흐려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눈까지 내리고 있다. 딱 봐도 기세가 심상치 않다. 어째 폭설이 될 눈치라 야토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큰일 났다.”
“응? 뭐가?”
무심코 중얼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기다리던 텐마가 쳐다봤다. 야토는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움직인 적갈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우아아, 하고 괴상한 소릴 내는 꼴이 웃겼다. 평소라면 그 바보 같은 모습에 이죽거렸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야토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 간절히 질문했다.
“야, 텐마. 우산 있어?
“…없어. ……레굴루스라면.”
“있을 리가 있겠냐, 멍청아.”
멍청이란 말에 텐마가 울컥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래도 야토의 말엔 동의하는 것 같았다. 물론 레굴루스가 아니라 시지포스에게 기대를 거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시지포스가 점쟁이도 아닌 이상 일기예보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눈 때문에 레굴루스에게 우산을 쥐여주었을 가능성은 낮다.
야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서 어느새 진정한 텐마가 안 되면 맞고 가도 되잖아? 라며 태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평소의 초 긍정 모드가 발동한 모양이다. 친구만큼 긍정적이지 못한 야토는 그 말에 텐마를 노려보았다. 가볍게 웃는 얼굴이 심히 얄밉다.
“야토! 텐마!!”
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레굴루스가 갑자기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밖에 눈 와!! 눈싸움하자!!!”
만면한 미소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분명 평소와 같은 순수함이다. 그래, 평소와 같았지만─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결국 친구들의 태평함을 참지 못한 야토는 광속으로 가방을 내던졌다.
“뭐야, 가방을 내던질 것까진 없었잖아.”
“시끄러.”
투덜거리는 레굴루스에게 야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자신이 속 좁게 툴툴거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기만 한 녀석에게, 기껏 던진 가방마저 쉽게 피해버린 녀석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물론 옆에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텐마에게도.
어쩌다 이 녀석들이랑 친구가 되어버렸을까. 이 중에 제대로 나이를 먹은 건 아니, 그나마 상식적인 건 자신뿐이라니. 물론 후회해 봤자 이미 사후약방문이다. 야토는 아득한 눈으로 한탄했다.
“눈싸움 정도는 해도 되잖아.”
아직도 불만이 남았는지 레굴루스가 중얼거린다.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친구에게 야토는 다시금 울컥했다. 하지만 야토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보다 텐마가 웃으며 끼어드는 게 빨랐다.
“괜찮잖아, 하자.”
“자, 잠깐!! 텐마!! 어리광 받아주지 말라고!!!”
“역시 텐마!! 그럼 나랑 텐마가 한 팀인 거다?”
“그 와중에 나 혼자 너희랑 싸우라는 거냐?!!!!”
그렇게 됐다간 며칠을 앓아누워야 할 게 분명하다.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쉽게 그려지는 미래에 야토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무엇보다 더욱 슬픈 건 친구라 쓰고 원수라 읽는 이 녀석들에게 휩쓸려 분명 그리되리란 점이었다. 이 세상에 희망 따윈 없어.
새삼스레 야토가 한탄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텐마가 걸음을 멈춘다. 옆에서 걷던 야토와 레굴루스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미안, 레굴루스. 눈싸움은 무리야.”
“에? 왜에~”
아까까지만 해도 동조해주던 텐마의 변심에 레굴루스가 불만스러운 목소릴 흘렸다. 야토도 깜짝 놀라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텐마의 안색이 어째서인지 새파래져 있다. 시선은 앞으로 고정돼서 움직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야토는 텐마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굳었다.
걸으며 얘기하다 보니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셋은 어느새 현관에 도착해 있었다. 출입문 너머로는 바깥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폭설이 되리란 예상이 맞았는지 아까보다 더욱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 그것도 수준이 한 단계 업 되어 폭풍 수준으로.
“……우리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툭 떨어진 텐마의 질문에 야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문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야토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살짝 열었다, 바로 닫았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그 조그만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얼어붙는 줄 알았다. 자동적으로 밖에 나가기 겁난다. 바로 옆에 이 정도야! 하고 호기롭게 나갔다가 얼어서 덜덜 떨며 되돌아온 레굴루스가 있으니 더욱더 그랬다.
비싸기만 하고 전혀 실용성 없는 교복과 갑자기 얇게만 느껴지는 이 점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던 야토는 어이가 없음에 결국 머리를 헝클이며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왜 학교에서 조난자 심정을 느껴야 하는 거냐고!!!!
“아, 그러고 보니 나 좋은 거 있다.”
문득 생각난 듯 갑자기 텐마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뭐가 좋은 건가 싶어 보니 척 보기에도 두툼해 보이는 담요다. 뜻밖의 물건에 구명줄을 잡듯 레굴루스가 좀비처럼 다가왔다. 텐마는 일단 그것을 레굴루스에게 덮어주었다. 서로를 챙겨주는 훈훈한 모습이었지만 야토는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했다.
“왜 가방에 교과서가 아니라 담요가 있는데?”
“당연히 수면을 위해서지. 펼치면 이불, 접으면 베개거든.”
이를 드러내며 텐마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 행태에 야토는 저도 모르게 천장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선생님, 여기 학교까지 와서 잘 궁리만 하고 있는 불량 학생이 있는데요! 물론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이제 와서 지적해 봤자 입만 아플 게 뻔해 야토는 한숨을 내쉬며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담요를 둘러쓰고 골골대고 있는 레굴루스. 웃고만 있지 아무것도 안 하는 텐마. ……이런 걸 총체적 난국이라 하던가. 다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응? 아, 다 같이 저거 뒤집어쓰고 가자고.”
아무렇지 않게 나온 말에 야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저걸, 셋이서?”
다시 물어봐도 텐마는 응, 하고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 태연함에 야토는 다시 담요를 살펴보았다. 붉은색과 갈색이 섞인 담요는 확실히 따뜻해 보이긴 했다. 셋이 붙어있다면 서로의 체온 때문에라도 더 따뜻할 터였다. 하지만 정말 그러자고? 남학생 셋이 꼭 붙자고? 그것도 저 눈에 띄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연한 수순으로 야토는 폭발했다.
“미쳤냐!! 죽어도 못 해!!!!”
“에~”
텐마와 레굴루스가 동시에 이상한 얼굴을 했다. 섭섭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야토는 그런 친구들의 불평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저 녀석들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아는지 둘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레굴루스가 텐마를 뒤에서 덥석 끌어안는다.
“그럼 우리 둘이서 따뜻하게 간다?”
정말로 괜찮아? 나중에 후회하지 마? 고개를 갸웃거리며 뻔한 충고를 날려주는 친구들에게 야토는 허세를 가득 담아 코웃음 쳐줬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 그 꼴을 할 줄 알고.
그리고 야토는 정확히 3분 후 그 결정을 후회했다.
난 누구? 여긴 어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제대로 된 자각이 없는 상태였지만 사실 야토는 이미 반쯤 아케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밖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추웠다. 바람이 계속 뺨을 때리고 눈송이가 얼굴에 들러붙어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머리카락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시끄러울 정도로 이가 부딪혔다. 야토는 바람을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래 봤자 별 소용은 없었지만.
“어이, 야토. 살아 있어?”
옆에서 텐마가 장난스럽게 물어온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행태에 야토는 있는 힘껏 텐마를 쏘아보았다. 담요 때문인지 서로 붙어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텐마와 레굴루스는 조금 추운 것 같긴 해도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레굴루스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시끄러워.”
걱정하는 레굴루스에게 야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놀리는 것보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더 얄미웠다. 물론 그렇다고 텐마가 안 얄미운 것도 아니지만. 아, 그냥 둘 다 얄미워. 어째서 이 녀석들은 이렇게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걸까.
괜히 분이 나서 야토는 다시금 둘을 쏘아보았다. 그 행동에 텐마와 레굴루스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토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제가 속이 좁고 고집이 세다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흥, 누가 그 꼴을 할 줄 알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투덜거리자 지척에서 귀를 간질이며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러지 말고, 야토.”
타이르듯 텐마가 이름을 부른다. 곁눈질로 살피니 텐마도 레굴루스도 똑같이 웃는 얼굴로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미소가 심히 눈부시다. 고집을 부리는 제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짧았다. 야토는 계속 고개를 돌린 채로 둘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일단 살고 봐야지. 곧 두 쌍의 팔이 덮쳐왔다.
“잡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러라니까.”
웃으며 텐마와 레굴루스가 제멋대로 떠들었다. 잡았다니 내가 사냥감이냐. 그런 반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자신을 감싼 온기가 너무 따뜻해 야토는 이번만 관대히 그 무례를 넘기기로 했다. 결국 셋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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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522자
여름보다는 낫지만 추위를 너무 많이 타서 겨울은 싫습니다. 이불 속에만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 180X200(cm)의 이불 수준의 담요가 하나 있었는 데 그건 도대체 어디로 갔지.....
오랜만의 현대AU ......라기 보다는 글이 오랜만이네요◐◐ 아니 뭐 그래도 최근에는 하루에 10분, 20분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쓰고 있는 데 말이죠. 그게 블로그에 안 올리는 장편이라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