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굴루스가 상대에 대해 알고 있던 건 거의 없었다. 자신의 또래라는 것. 페가수스의 세인트라는 것. 이름이 텐마라는 것. 눈동자가 해 질 녘 하늘을 닮았다는 것. 잘 웃고 잘 화낸다는 것. 명왕의 신체로 선택된 소년과 아테나의 소꿉친구라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슬프고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
알고 있던 건 고작 그 정도의 정보. 교류도 짧았고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눈 적 없었다. 실로 허무하리만치 덧없던 관계. 스쳐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던 관계. 그랬었는데─
어째서일까, 레굴루스는 마지막 순간에 그를 떠올렸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익숙한 천장이 낯설게만 느껴져 레굴루스는 또다시 자신이 그 꿈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렸을 적부터 레굴루스는 줄곧 같은 꿈을 반복해 꿨다. 꿈은 굉장히 희미하고 짧았다. 그저 자신과 한 소년이 대화를 나눌 뿐인, 꿈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꿈. 그럼에도 지독하게 가슴에 박혀와. 화면은 흐리고 소리조차 불분명한데 눈을 뗄 수가 없어 레굴루스는 같은 장면을 계속 봐야만 했다.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깰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레굴루스는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여서 어지럽다. 꿈을 꾸고 난 날이면 언제나 이랬다. 고작 꿈일 뿐인데.
아니, 틀려. 고작 꿈이 아니었다. 레굴루스는 이미 그것이 두 세기도 더 전의 기억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기억이다. 머나먼 옛날에 두고 오지 못해 아직도 지니고 있는 헛된 기억.
기억도 안 나는 어린아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전세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건 쉬웠다. 정보량의 차이는 있지만 주변 사람들도 자신과 같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명왕과 여신의 싸움. 세인트의 존재. 자신의 삶과 타인과의 인연. 어째서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레굴루스는 기억 속 모두와의 재회를 기뻐했다. 이미 곁에 있던 사람들과 기억에 의지해 서로 찾은 사람들과의 시간을 즐겁게 누렸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만나지 못한 채.
괴로움에 레굴루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두워진 시야가 꼭 제 마음처럼 여겨졌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열린다.
“……텐마.”
가슴은 이상할 정도로 애달팠지만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계속 그리 있을 수 없어 마음을 추스르고 거실로 나오자 평소와 변함없는 일상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빛바랜 벽지, 조금 낡은 소파,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키우는 화분, 사진이 놓인 장식장. 두 세기 전에는 있을 리 없는 풍경. 아무리 과거를 반추해도 지금은 현재일 수밖에 없었다.
레굴루스가 나온 것을 알아채고 소파에 앉아있던 일리아스가 시선을 돌렸다. 그 눈동자가 고요하다. 아버지의 시선을 받은 레굴루스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 이내 해죽 웃어버렸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일리아스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혹은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모를 리가 없건만 레굴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못 알아차린 척했다.
“좋은 아침, 아버지.”
“……아. 좋은 아침이다.”
원래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는 사람인 만큼 레굴루스가 태연하게 행동하자 일리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주었다. 그것에 감사하며 레굴루스는 다른 곳으로 말을 돌렸다.
“어머니는?”
물음에 일리아스가 짧게 눈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 레굴루스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굴루스.”
막 한 발짝을 뗐을 때 갑자기 일리아스가 레굴루스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만 살짝 뒤돌아보면 아버지와 시선이 맞았다. 그 순간 레굴루스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다시 태어나도 일리아스는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침묵으로 대지와 대화하는, 인간의 틀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사람. 그를 두고 시지포스는 ‘형은 언제나 형이니까.’라며 웃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며 레굴루스는 아버지의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오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드물게도 일리아스가 말을 번복했다. 아버지로서는 드문 일이라 레굴루스는 적잖이 놀랐다. 허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리아스는 어느새 언제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레굴루스? 일어났니?”
마침 어머니가 말을 걸어와 레굴루스는 질문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다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에서는 알케스가 하얀 앞치마를 두른 채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잘 어울렸다.
레굴루스의 기척을 눈치채고 알케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희미한 미소로 빛나던 얼굴이 이내 의문으로 바뀌었다.
“왜 그러니?”
“아니, 아버지가 뭔가 있는 것 같은 데 안 말해줘.”
토라진 것 같은 말에 알케스가 레굴루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의 손은 언제나 상냥하고 따뜻해 적잖이 안심된다. 그 온기를 느끼려 머리를 기울이면 가슴 속에 그리움이 가득 찼다. 과거에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던 탓인지 레굴루스는 곧잘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그를 알아 알케스도 레굴루스가 어리광을 부리면 별다른 말없이,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일리아스님께서 그리하신 거에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맹목적인 신뢰의 말을 듣고 레굴루스는 응, 하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레굴루스도 아버지가 무슨 의도가 있어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뭔가를 비밀로 한다는 사실이 조금 맘에 안 들었을 뿐이다.
순순한 긍정이 기뻤던 듯 알케스는 짧게 레굴루스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마에 간지러운 감촉이 남았다.
“자, 학교에 가야 하니까 슬슬 준비하렴.”
어머니의 말에 레굴루스는 이번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역시 신경 쓰인단 말이지~”
“……난데없이 뭐야.”
그렇게 답하는 야토의 표정에는 귀찮음과 관심 없음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다. 내가 알게 뭐냐는 말이 말하지 않았어도 들릴 정도다. 친구의 그런 냉정한 반응을 보고 레굴루스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뭐야, 야토! 좀 더 관심을 보이라고!!”
“내가 알까보냐!!”
불만을 그대로 표출하면 상대 쪽에서도 즉각 맞받아쳐 왔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서로 무섭게 노려보기를 수 초,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팩 돌리고는 도시락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옆에서 그런 둘을 지켜보던 유즈리하가 말없이 차를 따라주었다.
잠시 음식을 씹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문득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레굴루스는 견디다 못해 밀려오는 감정을 툭 내뱉었다.
“……뭔가 두근거려.”
레굴루스에 대해 잘 알기에 야토와 유즈리하는 그 말에 별다른 딴죽을 걸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듯도 했다. 하지만 제 말에 대한 건 어렴풋한 윤곽뿐이라 레굴루스는 거기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뭐가 두근거리느냐고 물으면 레굴루스 자신도 잘 모른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그것조차 몰랐다. 레굴루스는 아직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다. 그래도 예감은 확실히 있었다. 분명 오늘, 아버지가 얼버무린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는.
더 생각해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없어 레굴루스는 그대로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야토가 곧바로 옆에서 먹다 말고 드러눕지 말라며 잔소리를 해왔다. 레굴루스는 친구의 잔소리를 그대로 흘려들었다.
시야에 푸른 하늘이 비친다. 시리고 아름다운 푸름. 저 푸른색을 보면 레굴루스는 언제나 한 소년을 떠올렸다. 텐마. 페가수스, 그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던, 자유로운 소년. 다시금 그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텐마는 어떻게 된 걸까.”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린 말에 다시금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떨어졌다. 잠깐의 공백 후, 다 먹은 도시락통을 정리하고 유즈리하가 입을 열었다.
“텐마라면 틀림없이 잘 지내고 있을 테지.”
“바보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또 엉뚱한 짓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뚱하니 야토까지 말을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던 대답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문답. 하지만 유즈리하와 야토가 자신보다 텐마와 더 친분이 있던 만큼 마음이 복잡한 걸 알아 레굴루스는 그 가벼움을 감히 책망할 수 없었다. 그저 정말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지내고 있기만을 바랄 뿐.
“그럴까나~”
어쩐지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레굴루스가 아버지의 말을 다시 떠올린 것은 그날 하교 때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친구와 떠들며, 여전히 누군가를 문득문득 떠올리고 하던 그런 날.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항상 같이 가곤 하던 야토에게 일이 있어 혼자 하교를 해야 했다는 것 정도였다.
홀로 집으로 돌아가며 레굴루스는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가을이라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로수도 점점 단풍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거리 전체가 쓸쓸해진 느낌이었다.
“어?”
멍하니 길을 걷던 도중, 문득 발이 멈췄다. 길 건너편에 스쳐 지나가는 인영이 있었다. 낯익은 그 모습은 레굴루스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야가 아득해졌다. 동시에 레굴루스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심장이 비명을 질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인가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먼저, 동물 같은 직감은 아침의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오늘, 그렇게 말하고 일리아스는 뒷말을 망설였다. 하지만 실제론 그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오늘.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다른 날이 아니었다. 오늘이었다. 레굴루스가 모든 시간 동안 그리워했던 소년과 재회하는 건 바로 오늘이었다.
그다. 틀림없이 그였다. 레굴루스가 그를 착각할 리가 없다. 기억에 남아있는 그 모습. 꿈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그 모습. 간절히 그리워했던 그 모습. 텐마, 네가─ 기도처럼 소년의 이름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멀리서 갈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좀 더 다리에 힘을 주면 뒷모습이 가까워졌다. 아직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소년은 흔들림 없었다. 그에 레굴루스는 상대의 팔을 힘껏 낚아챘다. 이름을 부를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만으로 한 행동이다. 놀란 듯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했다. 기억보다 조금 야윈 것 같은 얼굴. 레굴루스는 어쩐지 목이 메는 걸 느꼈다.
“텐마……!”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상대를 껴안은 직후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텐마가 벗어나려는 듯 크게 허우적댄다. 그에 레굴루스는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여기서 텐마를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절로 입술이 열렸다.
“뭐야, 텐마! 이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 이때까지 찾지도 않고!!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진가. 그래도 어쨌든 만나서 다행이다. 영영 못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야토랑 유즈리하가 엄청 보고 싶어 했어. 물론 시지포스랑 나도!! 다들 널 보고 싶어 했다고─ 정말……”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냄으로써 곪았던 감정이 터졌다. 울컥, 심장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정말 보고 싶었어.”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레굴루스는 어리광부리듯 텐마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닿은 온기가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머뭇거리는 손길이 팔에 닿았다. 울고 있는 걸 아는 탓인지 떼어내는 손짓이 거칠지는 않았다. 조금 더 그리 있고 싶었지만 레굴루스는 일단 얌전히 텐마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소년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아…, 저기 미안한데 너 누구?”
“…………에?”
-
공미포 4240자, to be continued~ 언젠간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격조했습니다.....OTL 설마 나 자신도 뭔가 연성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지 몰랐다⊙ㅁ⊙ 저번 포스팅으로부터 딱 한달, 우와. 변명하자면 여러가지로-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습니다. ....후, 썰 푸는 거 듣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오시는 분은 썰 풀어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과연 다음 편은 나올 것인가, 다른 시리즈는 어떻게 되는 가 싶지만 뭐 살아있으면 언젠간 연성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 다시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