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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umada

[LC/데프텐]찰나적 파편

citrus_ 2019. 6. 4. 22:11

 

 

 

 

 너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짠 내 나는 바람이 분다. 물결에 따라 햇살이 흐드러진다. 반짝반짝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바다였다. 익숙지 않은 풍경에 데프테로스는 눈을 조프렸다. 지독히도 꿈결 같았고, 지독히도 평범했다. 제게 어울리지 않음이 평범이었고, 그럼에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꿈결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무엇 덕분에 가능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다. 어차피 답을 구한다고 한들 헝클어지기만 할 뿐이다. 때문에 데프테로스는 의미 없이 시선을 흘렸다. 

 

 조그만 모래사장의 면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테네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다. 가까이에 마을도 없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 그런 만큼 사람의 모습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소년을 제외하고. 

 

 던져진 시선의 끝에 텐마가 있다. 한낮의 태양 아래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색을 띠었다. 아직 어린 몸이 선명한 윤곽을 그린다. 살짝 보이는 옆얼굴에선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어찌 보면 한없이 처연하기까지도 했다. 본인이 멋대로 이 먼 곳까지 데려온 주제에 이쪽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하다. 멋대로 바다에 가자고 외쳤던 모습이 아직 선명한데. 변덕이었던 건지 무엇인지, 그저 바다에만 정신이 팔린 듯한. 데프테로스는 조용히 그를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덧새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옆을. 

 

 걸음에 따라 신발 밑에서 모래가 산산이 부서졌다. 뒤꿈치에 붙은 알갱이가 거슬거렸다. 자연히 걸음이 느려진다. 대조적으로 텐마는 이미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바지마저 걷어 올린 채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커다랗고 말간 웃음이 들렸다.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물장구를 치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 아니, 아직 어린아이라 불러도 좋을 나이인가. 열다섯은 퍽 어중간해 어느 쪽도 어울리면서 어울리지 않긴 하였다. 제가 소년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는 어떻게 취급받기를 원했던가. 데프테로스는 과거를 더듬다가 포기했다. 이제 와 되돌아본다 한들 자신과 텐마는 다르니 정답을 맞출 수 있을 리 없다. 

 

 

 “데프테로스!” 

 

 

 문득 텐마가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어느새 뒤돌아보며 방방 휘젓는 손짓이 완강하다. 오라는 뜻이겠지. 거절을 담아 목을 울리려다 멈춘다. 그 기저에는 저를 눈치채준 것에 대한 기쁨이 있다. 이게 무엇이라고. 그럼에도 데프테로스는 속절없이 소년에게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물결이 밀려오는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중간에 신발은 적당히 벗어 던졌지만 바짓자락은 내버려 두었으므로 젖은 천이 발목에 휘감겼다. 괜히 발을 움찔거려본다. 어머니인 여신에게 발뒤꿈치를 잡혀 스틱스에 몸을 담갔다는 옛 영웅처럼 발을 적실 일이 없던 것도 아니건만 발가락 사이를 멋대로 흐르는 물결이 생경하긴 하였다. 

 

 데프테로스. 텐마가 다시 제 이름을 부른다. 고개를 약간 들어 펼쳐진 풍경을 망막에 새긴다. 수면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눈부시고 더 푸르렀다. 속이 전부 비칠 만큼 투명하면서 어떻게 이런 색을 띠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리에 닿는 감촉이 지독히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더 걸어 들어간다. 젖어 드는 부분이 늘어난다. 바로 옆에는 사람 하나 분의 감각. 갈비뼈 아래서 어떠한 감정이 풀렸다. 눈이 부셔 손으로 그늘을 만든다. 멀리서 구름이 층층이 쌓이고, 수평선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모아 서른 해 가까운 생 동안 느낀 적 없는 어떠한 감정을 만든다. 

 

 데프테로스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텐마가 제게 이런 광경을, 감촉을 제게 느끼게 하고싶었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어쩔 수 없는 녀석. 순간적으로 찾아온 감정이 기쁨인지 씁쓸함이었는지는 애매했다. 거스러미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어서. 단편적인 이해는 연속된 질문을 낳았다. 지극히 사소하고도 중요한. 

 

 

 “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기도 했다. 사실은 이미 물어봤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새벽녘, 갑자기 쳐들어온 소년이 자신의 팔을 잡아끌었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가 좀처럼 주변과 가까워지지 않는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예민하게 날을 세우는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접했을 때. 그때 물었어야 했다. 다정한 눈동자에, 친근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마냥 휘둘릴 것이 아니라. 

 

 

 “왜 나를…….” 

 

 

 왜 내게 이러느냐고. 오래전의 얄팍한 인연을 다시 이을 이유 따윈 없는데, 새삼스럽게 제게 친절할 필요 따윈 없는데. 
모든 것을 토해낸다면 처절하기 짝이 없는 외침이 될 것이다. 본심을 드러낸다면 비굴하기 짝이 없는 울음이 될 것이다.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을 좀먹는 짓이 될 것이다. 그래도 데프테로스는 그리 자랐기에 의심과 좌절을 안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 

 

 

 돌연 팔이 홱 잡아당겨 졌다. 아주 잠깐 힘이 빠진다. 당황해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더더욱 무너트린다. 저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더해진다. 다만 뿌리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손을 떨쳐내고 바로 설 수도 있다. 그러나 데프테로스는 그러지 않았다. 텐마가 부러 소리 내어 웃는다. 입귀에 걸린 장난기가 분명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그 웃음소리가 기꺼웠으므로 데프테로스는 모든 저항을 거둬 소년에게 맞춰주었다. 

 

 일순의 잠수. 푸른 시야가 펼쳐진다. 수심이 깊지 않았으므로 바닥을 박차고 올라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잠시에 물속에서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일그러진 시야에도 퍽 또렷한, 상냥한 붉음. 아, 그렇구나. 데프테로스는 왠지 모르게 이해했다. 텐마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어렴풋하게, 확실하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있는 힘껏 헐떡인다. 대조적으로 텐마는 깔깔대며 웃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반사된 빛이 소년의 위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모든 세상이 그를 위한 소품과 다름없단 착각이 들었다. 그리도 선연하게 반짝이는 찰나였다. 먼 훗날, 누군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나 행복했던 시간을 묻는다면 떠올릴 그런. 

 

 

 돌연, 뚝 웃음소리가 끊긴다. 멱살이 잡혔다. 자연스럽게 몸이 끌려간다. 강하지만 견고하지 않은 힘이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쉽게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그러나 데프테로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저항하지 않았다. 코끝과 코끝이 부딪혔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선명하다. 노을이 또렷이 번진다. 입술의 떨림이 느껴질 정도로 좁은 틈새를 남기고 손이 멈춘다. 옅게 숨결이 섞였다. 달다, 고 접한 적이 드문 설탕 과자의 맛을 혀끝에 올린다. 하잘것없는 침묵이 길었다. 이게 무엇이라고. 

 

 

 “……하지 않을 건가.” 

 

 

 결국 데프테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하면서도 속으로 웃어버렸다. 어중간하고 이상한 말이다. 겁먹은 것 같기도 했다. 이해했음과 각오했음이 영 달랐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이 또한 어긋난 대답이다.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그런 걸 물은 적도 없건만 데프테로스는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들에겐 시간이 있다. 지금과 같은 찰나를 겹치고 겹쳐 쌓아, 영원이라고 부를 순 없을지라도, 아직은 길게 이어질 미래가. 수많은 기회가. 

 

 헛된 소망일지도 모른다. 데프테로스는 미래가 사람을 너무 쉽게 배신한다는 걸 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것이 뒤엎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쩌면. 

 

 텐마가 손을 놓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돌아가자. 소년의 중얼거림에 데프테로스는 얌전히 따랐다. 모래사장에 새겨놓은 발자국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발짝 앞에서 걸어가는 텐마의 뒷모습을 본다. 단단한 모습에 데프테로스는 자신이 안도감을 느낀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 어쩌면. 

 

 

 너와 함께라면 아직은 꿈꿔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프테로스는 파편을 그러모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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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889자

 

나름 열심히 쓰려고 했는데 중간에 미루다보니 영원히 완성하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 부랴부랴 마무리.

왜 이렇게 바다의 이미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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