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야가 새벽녘에 잠을 깬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일어났다고는 해도 머리는 아직 반쯤 수면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눈꺼풀도 지독히 무거웠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뿐이다. 세이야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직 새벽이란 사실만을 힘겹게 깨달았을 뿐이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 아니구나.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다시 자기 위해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면 세이야는 바로 휴프노스의 유혹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야는 그리할 수 없었다.
몸을 뒤척인 순간, 갑자기 이불이 어깨 위까지 올라왔다. 물론 제가 잡아당긴 건 아니었다. 누가? 갑자기 습격한 의문이 각성의 시간을 좀 더 지연시켰다. 비몽사몽한 머리를 올리려고 하는데 이번엔 이불 위로 토닥거림이 더해졌다. 사실 토닥임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가벼움이다. 제가 깰 것을 염려하여, 살며시 닿기만 할 뿐인, 걱정과 배려가 잔뜩 섞인 손길. 그리고 세이야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제야 알아챘다.
“……사가.”
잠꼬대처럼 이름을 중얼거렸다. 잠깐 손길이 멈추더니 이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를 도닥이던 손이 이따금 이마나 귀밑머리에도 닿았다. 간지럽게, 무척이나 중요한 것에 닿는 것처럼. 아, 뭐야.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 정말 소중히 대해지고 있구나.’
걷어찬 것도 아닌 이불을 일일이 여며줄 정도로, 자그만 뒤척임 하나에 혹여 잠자리가 나쁜가 신경 써줄 정도로, 본인의 토닥임이 방해가 될까 손길 끝까지 염려할 정도로. 별것 아닌데, 그 모든 게 부끄러웠다. 동시에 비슷한 정도의 사랑스러움이 심장을 가득 채운다. 바보 같은 남자. 세이야는 헤실헤실 미소를 입가에 가득 담았다. 부러 꾸미지 않아도 절로 그리됐다.
‘일어나면 나도 똑같이 해줘야지.’
소년은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어린 날의 추억 / 데프텐
“데프테로스."
텐마가 이름을 부른다. 그 사실에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실 하나하나 따져보았을 때 이름을 불린다는 상황만으로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 제 이름을 부르는 자는 드물었으며, 그나마도 절반 이상이 경멸을 담아 부를 뿐이다. 이렇게 당연한 듯, 희미하게 애정을 담아서가 아니라. 그러므로 오히려 데프테로스는 기뻐해야 옳았다. 원래라면 그랬다. 그랬는데.
데프테로스도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아니다.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그저 싱숭생숭한 기분만이 들 뿐이다. 그리고 데프테로스는 아마 이유를 알았다.
‘형! 형아!’
어렴풋이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텐마는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욱 어렸다. 오히려 그랬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 천진난만한 부름이, 꽃이 벌어지는 듯한 미소가, 무구하기만 한 미소가.
그랬던 네가 지금은─
“데프테로스?”
대답이 없던 게 이상했던지 텐마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전과 변함없는 눈동자가 가까워진다. 아니, 눈동자만이 아니다. 기실 키가 크고 조금 성숙해지기만 했을 뿐, 텐마의 얼굴은 어릴 적과 그다지 다름없었다. 크고 시원시원한 눈매도, 노을 색 눈동자도, 커다랗게 웃음을 그리는 입술도. 모든 게 그대로.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데프테로스는 커다란 상실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고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데프테로스는 계속되는 텐마의 부름을 무시하고 한숨을 삼켰다.
뱀파이어 AU / 데프텐
데프테로스는 가만히 텐마를 살펴보았다. 저에 비하면 머리 하나는 작지만 성장기이므로 아직 자랄 여지가 있다. 얼핏 몸은 가늘어 보이지만 단련은 제대로 되어있다. 선은 굵지 않다. 이 역시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중성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아직 풋풋하고 부드러운 구석이 있다. 평소엔 커다란 웃음을 달고 다니는 얼굴이 지금은 진지하기만 하다. 몸은 가만히 있어도 요리를 하는 팔은 바삐 움직인다. 의외로 이 녀석은 가사에 능숙하다.
문득 탄식이 나오려 했다. 평소에는 이런 별것 아닌 것들을 보는 것만 해도 안정되었건만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계속 한 곳으로 시선이 간다. 목덜미로. 커다란 혈관이 지나가는 곳으로.
데프테로스는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셔츠 자락을 끌어 내리고 입술을 댄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살며시 이를 세운다. 예상보다 매끈한 피부 속으로 송곳니가 파고든다. 곧 맥동과 함께 피가 흘러나온다. 입안에 가득 삼킨다. 거기에 취해 송곳니를 더 깊게 박고, 본격적으로 쓰러트리고, 그런 다음─
아픔과 함께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이뿌리가 욱신거린다. 데프테로스는 남모르게 혀를 찼다. 어린애도 아닌 데 이리 충동에 습격당해서는. 본능이니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탐탁지 않았다. 차라리 잠깐 밖에 다녀올까.
“앗!”
그때 느닷없이 텐마가 비명을 질렀다. 청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채고 데프테로스는 움직임을 멈췄다.
“아파라…….”
텐마가 크게 미간을 찌푸린다. 소년의 오른쪽 검지 끝이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칼에 베인 건가. 큰 상처는 아니다. 기껏해야 생채기 정도다. 칠칠하지 못하긴. 그랬기에 평소라면 이리 말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데프테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자연스럽게 텐마가 상처를 핥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입술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주홍색 눈동자가 이쪽을 돌아본다. 말똥말똥한 얼굴이 퍽 무구했다. 제가 얼마나 큰 폭탄을 던지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