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데프테로스와 텐마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아주 예쁜 쌍둥입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문장, 흔한 이야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단순한 해피엔딩이었겠으나―
“데프테로스가 이상해.”
출산 후 벌써 삼 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느닷없는 친우의 고백이 토해졌다. 참으로 맥락 없는 말이었으나 본인에겐 아니었는지 텐마는 영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전 때나 봤을 법한 진지한 얼굴이라 야토는 그에 맞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새삼스럽게.”
진심의 대가로 야토는 텐마가 던진 쿠션에 얻어맞았다. 사정없이 얼굴을 향해 날아온 솜뭉치가 아프긴 더럽게 아팠다. 과연, 페가수스. 푹신한 쿠션조차도 살상력 높은 무기로 바꿔버리다니. 라고 감탄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자신은 진실을 말한 것뿐이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여하튼 데프테로스가 멀쩡하고, 멋지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콩깍지가 잔뜩 씐 텐마밖에 없다. 데프테로스가 못나고 나쁘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만 평범하다고 말하기에도 미묘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내에게 말하기엔 잔혹한 내용이었던 것도 사실이라 야토는 조금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배려심을 발휘해 돌려 말해줘야지.
그러거나 말거나, 친우가 생각하는 걸 알 리가 없던 텐마가 입술을 삐죽인다. 데프테로스가 이상해. 되풀이된 문장. 여기서 제 감상을 말해봤자 아까의 반복일 게 뻔해 야토는 그냥 마음을 배제하고 매뉴얼대로 대꾸했다. 어디가 어떻기에? 영혼 없는 질문에 텐마가 포르륵 한숨을 내쉰다. 지독히 안 어울린 덕분에 어쩐지 작위적으로 푹푹 내쉬는 느낌이었다.
“애들을 안 안아줘.”
확실히 그건 텐마가 걱정할만하다고 야토는 순순히 수긍했다. 데프테로스가 아이를 예뻐하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자기 아이인데―정확히는 사랑하는 아내의 아이인데― 안아주지도 않는 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이상하다. 무뚝뚝하지만 그리 매정한 남자는 아니었을 턴데. 아마도.
하지만 또 다른 제 친우는 공감할 수 없었나 보다. 사실은 처음부터 옆에 있었던, 그것도 갓난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다고 본인은 생각하)던 레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그런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텐마를 직시했다.
“그게 문제야? 데프테로스만 그런 게 아니잖아.”
야토는 여기에도 무심코 수긍할 뻔했다.
출신과 혈연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성역 대부분의 사람이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주고 있었지만 레굴루스의 말마따나 마냥 아이들을 귀여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시드와 알바피카가 그렇다. 안 그래도 타인과 어울리는 일이 적던 둘은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마주치는 일이라도 생길까 아예 쌍아궁에 오는 일 자체를 피할 정도였다. 고작 갓난아기에게 보이는 철저할 정도의 회피.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둘이 그리 행동하는 건 아이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 좋아하기 때문이란 걸. 세인트 주제에 있는 힘껏 겁을 먹어서란 걸. 소중하기에,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서, 제 실수로 누군가를 울리는 건 할 수 없기에. 그저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상냥함.
야토가 수긍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생판 남인 자들도 이리 초조해하는 데 아버지인 데프테로스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 더군다나 제가 남에게 긍정이 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 그 남자라면.
‘라고 할까, 오히려 진짜로 그런 것 같아서 무서운데.’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너무 뚜렷하다. 오히려 왜 바로 이유를 떠올리지 못 했냐고 생각될 정도다. 이렇게 사건 해결? 하나, 용의자와 가장 가까운 지인은 레굴루스와 야토의 태평한 추측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건 아니야.”
아니, 아닌 건 아니고. 뭐랄까. 뭔가 무서워하긴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쪽으론 아니랄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달까, 어차피 또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래. 두서없는 옹호가 이어진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하라고 충고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텐마인지라 야토는 포기하고 순순히 끄덕였다. 도대체 뭔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텐마가 그리 말하니 그런 거겠지. 데프테로스에 관해서는 텐마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 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프로스조차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실정인데 오죽할까.
하지만 이래서야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애당초 데프테로스에 대해 제일 잘 아는 텐마가 다른 누군가에게 상담한 것 자체가 잘못인 거 같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본인도 오죽 답답했으면 저럴는지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날이 갈수록 레벨업하는 해탈 스킬을 발휘하며 야토는 너그럽게 친우를 용서했다. 고민은 해결 못 해주지만.
“그 녀석을 어쩌지.”
한숨 쉬는 대신 분노를 불태우며 텐마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얼핏 말투는 얌전했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부부싸움 한번 일으킬 것처럼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야토는 오싹오싹 올라오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다만 살기와 닮은 반응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건 역시 야토보다는 레굴루스다. 팟,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레굴루스의 표정이 바뀐다. 아주 미세하게.
“데프테로스는 매번 텐마를 화나게 만드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뭔가 의미심장한 대사가 가볍게도 튀어나왔다. 야토는 무심코 레굴루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투조차도 어딘가 놀이에 가까운 감각으로 치부하는 친우는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용맹할 정도로. 수호성이 태양인 사자좌인 만큼 미소가 참으로 눈부셔서 야토는 띠꺼운 눈을 했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일단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에게 너무한 반응일지도 몰랐지만, 저 밝음에 속아 넘어간 전적만 해도 수백 번인 야토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안타깝게도 사람 좋은 텐마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하지만.
무슨 소리야? 단순한 만큼 순식간에 푸시식 식은 텐마가 의문을 참지 못했다. 깜빡이는 노을색에 레굴루스의 웃음이 깊어진다. 깨끗한 하늘색 눈동자가 천진하게 빛났다. 불길하게시리.
“내가 텐마랑 결혼했으면 절대로 안 그랬을 거야.”
“뭐?!!”
폭탄선언이다. 야토는 당연하게 경악을 내질렀다. 어색한 침묵. 풋. 정확히 3초 후 웃음이 터진다. 텐마에게서였다. 자신을 비웃는다 생각했는지 레굴루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왜 웃어. 아니, 그렇지만, 갑자기 그런……. 어지간히도 우스웠는지 텐마가 말을 못 맺는다.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연애부터 결혼, 출산에 이르는 과정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느닷없고도 태연하게 저딴 소릴 지껄이는 데 진심이라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작 말한 본인은 뭐가 이상한지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진심인데…….”
계속 말하는 거냐. 야토는 한탄하고 동시에 안심했다. 이 자리에 데프테로스가 없어서, 텐마가 단순히 농담으로 받아들여서. 아니었다면 성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이 한 번 더 일어났을 테니까. 정말이지 만악의 근원 같으니라고. 열심히 키워온 해탈 스킬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적어도 여기서 욕은 내뱉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 바보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데프테로스와 텐마가 빨리 화해―라기엔 미묘하지만―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야토는 한숨과 함께 레굴루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 * *
밤의 어둠이 깔렸다. 한구석에 작게 피워놓은 램프만이 희미하게 빛을 비춘다. 데프테로스는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제집인데 어쩐지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원인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고, 근거도 없는 두려움 때문이다. 매번 텐마가 혀를 차며 꾸짖는 것처럼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제 소심함 때문이기도 하다. 발전 없는 자신. 한심하기는.
만약 이 사실을 그 녀석이 안다면 이번엔 또 얼마나 화를 내려나. 반사적으로 익숙한 얼굴을 상상하다가 데프테로스는 비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데프테로스는 그 광경을 너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붉은 눈동자를 일그러트리고, 크게 입을 벌려 온 얼굴로 화를 내겠지. 분명 주먹도 몇 번이고 날아올 터다. 너무 짜증이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고. 그래도 결국엔, 그 끝에는 미소를 지어주겠지. 언제나의 녀석다움으로. 이제껏 제게 그래왔듯, 매번 자신을 구해왔듯.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데프테로스는 생각했다. 물론 혼나고 싶은 변태라서가 아니다. 그저 제 생각을 토해낸다면 비겁하지만 텐마가 모두 해결해줄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어리석은 자신은 겁먹고 그 쉬운 일조차 하지 못했다. 한심하기는. 다시 질책이 반복됐다.
“데프테로스?”
그리고 너는 언제나 형편 좋게 나를 찾아온다.
데프테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날아온 밝음에 눈을 조프렸다. 바로 가까이에 간소한 차림의 텐마가 램프를 들고 서 있었다. 실루엣이 희미하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불빛을 받아 더욱 밝게 물들었다. 자신은 가지지 않은 붉음. 텐마.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다가온다. 얇은 슈미즈가 사부작댔다. 손끝이 굳는다. 텐마. 다시 한숨처럼 목소리가 흘렀다. 데프테로스. 답하는 음성이 어딘가 나지막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텐마가 램프를 높게 들어 올렸다. 겨우 얼굴 전체가 밝게 보인다. 잔뜩 굳어있으리라 생각했던 얼굴은 의외로 한심하단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의식적으로 어깨에서 힘을 뺐다.
“당신 말야, 슬슬 자수하지그래?”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척수반사로 대답하고도 데프테로스는 내심 찔끔했다. 엉뚱하긴 하지만 허언은 하지 않는 녀석이다.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분명 짚이는 곳이 있다는 거다. 도대체 뭘 들킨 거지? 이전에 몰래 훈련을 지켜보던 거? 며칠 전 밤에 몰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던 거? 아니면 한 달 전에 임무에서 상처 입은 걸 얘기 안 한 걸 말하는 건가? 아니, 이게 아니다. 무슨 도피인가.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물을 거라면 분명―
“또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제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퍽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텐마가 타박한다. 데프테로스는 변명을 하는 대신 현명하게 침묵을 취했다. 사실 말재주가 없는 그로서는 유일한 선택지였으며, 딱히 변명할 말이 없기도 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화라도 안 돋우면 다행이지.
시선이 엇나간다. 텐마가 포옥 한숨을 내쉰다. 별수 없다는 티가 팍팍 났다. 그 모습이 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대하는 듯해 데프테로스는 머쓱해졌다. 제가 몇 살이나 연상인데. 그러나 연상처럼 굴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애들 말이야, 애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데프테로스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발밑에서 그림자가 크게 아롱거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잔뜩 소리를 죽였으나 텐마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화가 묻어났다. 당연할 것이다. 제 반응은 누가 보아도 이상했다.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만의 이유라 이해받기 어려웠다. 말해도 좋은가? 잠깐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도 상념의 끝에서 데프테로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침묵은 쉬웠으나 고백은 더욱 쉬웠기에. 언제나 텐마 앞에서만은.
문제? 문제라고? 당연히 있다.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데프테로스는 아직도 숨조차 멎을 것처럼 지내던 세월을 기억한다. 이제는 허망할 정도로 스러져버린 나날이나 그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과거는 흔적을 남겼다. 몸을 웅크리고, 아픔에 무뎌져 가며, 스스로 바라는 것조차 헷갈리던 그런 시간. 제가 살아있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고, 모든 감정을 억누르느라 앞을 보는 것조차 간신히 가능했던 그런 삶. 누구도 바라지 않았고, 누구도 저주하지 않았으나 부여되어버린 그런 운명. 그저 모든 원인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그런 상처.
때문에 생각하고 말았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저였기에 그랬던 거라면, 그렇다면 그저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똑같은 인생을 반복할 수도 있는 거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자신의 영향을 받아 똑같은 운명을 되풀이할 수도 있는 거라고. 어처구니없는 망상인 걸 알면서도 데프테로스는 생각하고 말았다. 차라리 한 아이면 헛되다고 눌러버리고 말았을걸. 차라리 여자아이였다면 그럴 리가 없다고 넘겨버리고 말았을걸. 하필이면 자신과 형처럼 쌍둥이라서, 아이가 자신을 너무 닮아버려서. 그랬기에 데프테로스는 불합리를 계속 이어갔다.
너는 이런 심정을 모르겠지. 간신히 뱉어낸 실토 끝에 떨리는 목소리를 뽑아내자 텐마가 조용히 손을 잡아 왔다. 흉터와 굳은살로 뒤덮인 손은 거칠었으나 그래도 언제나 따뜻했다. 토옥, 토옥, 손가락이 손등을 두드렸다. 격정이 얌전히 가라앉는다. 데프테로스의 말을 뒤덮듯 조곤조곤 언어가 풀어진다. 상냥한 질책으로 자아낸 문장.
“바보네.”
그래, 자신은 바보다. 부정하지 않는 사실.
“저 아이들은 당신과 아스프로스가 아니야.”
확실히 동일인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들이다. 자신과 닮은 아이들이다.
“그딴 한심한 예언도 없었고.”
아, 예언은 없었다. 그저, 아직까지는.
“만에 하나 그런 예언이 내려진다고 해도 사샤나 아스프로스나, 다른 녀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분명히 그 팔불출들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모든 걸 뒤집어엎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예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할까. 아스프로스조차도 조그만 계기 하나로 쉽게 휘둘려버렸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그랬다. 네가 있었다. 분명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불안은 걷히지 않는다. 아무리 이치를 들어 설명한들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전부를 더럽히듯, 한 조각의 염려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 먹구름을 걷어내 줄 완전하고 오롯한 확신이 있을까. 데프테로스는 떨리는 손끝을 뻗었다. 비굴한 이율배반. 불가능을 알면서도 데프테로스는 매달렸다. 애원했다. 얼마나 치졸한지. 그래도 너라면 해줄 거라 믿으며, 모든 걸 떠넘겨서. 이제는 이 수밖에 없어서.
불현듯 손가락이 얽혔다. 새끼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철없는 어린아이의 행위처럼 가뿐하고도 무겁게. 오직 단 하나의 맹세만을 위하여.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아롱거리는 불빛 속에서 텐마가 말갛게 웃는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래도 걱정된다면 약속하자. 절대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지킬게.”
어이없게도 데프테로스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형태도 갖추지 못한 말 한마디인데, 기록되지도 못할 말 한마디인데. 수런거리던 가슴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너무나도 손쉽게, 불이 붙는 것처럼. 자신의 무언가를 꿰뚫어서.
언젠가 아테나가 말한 적이 있었다. 텐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킨다고. 데프테로스에게 들려준다기보단 혼잣말처럼. 당시 데프테로스는 어린 여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수긍했을 뿐이다. 텐마가 그랬던 것을 알았기에. 올곧은 어리석음으로, 그저 하나의 약속만으로 소꿉친구와 세계를 구했던 것처럼. 너는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내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고. 약속이란 게 때로는 얼마나 덧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프테로스에게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은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데프테로스는 매달리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웃음이 더욱 깊어진다. 몸이 기울어진다. 한껏 가늘어진 노을빛 눈동자가 가까워진다. 떨어진 램프가 발끝에 굴러 부딪혔다. 달라붙은 체온에 한숨이 가볍게 섞였다.
“그러니까 더는 한심한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이나 안아줘.”
고민할 시간이 아까워. 장난처럼 넘겨진 말에 그제야 목소리가 나왔다. 알았다. 하지만 그 전에 텐마가 먼저였다. 데프테로스는 자신과 비교하면 더없이 가는 몸을 끌어안았다. 등에 사뿐하게 손이 얹힌다. 위로처럼, 혹은 칭찬처럼 뺨에 상냥한 키스가 내려앉았다. 이미 상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