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역에서, 특히 12궁 내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바로 사라와 샤카의 공방전─이라고 말하기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이었다. 그야말로 스릴, 쇼크, 서스펜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사상 초유의 사태에 누군가는 안쓰럽게, 누군가는 흥미롭게, 누군가는 열렬하게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물고기좌─피스케스─의 아프로디테로 말하자면 그들을 보는 시선은 한 발짝 물러선 방관에 가까웠다.
애당초 아프로디테는 샤카와 깊은 친분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제삼자로서 남의 일에 멋대로 끼어들어서 이것저것 지시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성격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타인의 연애싸움에 함부로 연관되어 봤자 좋은 꼴을 못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로디테가 사라와의 사이에 벽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프로디테는 그녀에 대해서 오히려 호의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대함에서도 표정을 꾸며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부러 가까워질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뿐. 말하자면 아프로디테와 사라의 사이는 좋은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프로디테는 사라가 쌍어궁을 찾아와 갑작스러운 요청을 해왔을 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여자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빗과 리본이었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머리를 단장하는 데 쓰는 그런 물건이 사라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프로디테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사라를 내려다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너무 반짝거린다. 그 눈동자에 골드 세인트답지 않게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며 아프로디테는 조심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는 건……?”
“그게…….”
사라가 부끄러운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소녀다운 수줍음과 순수함이 적절하게 섞인 모습이다. 그런데 흐뭇해야 할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는 건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아프로디테는 어쩐지 그 대답을 알 것도 같았다.
아프로디테의 시선을 받으며 한참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사라는 마침내 결심한 것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머리카락 만져 봐도 괜찮습니까?”
아, 역시나. 빗을 가져왔을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아프로디테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좀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백 보 양보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질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왜 하필 자신인가. 사라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므우도 있고 카논도 있고 세이야들도 있다. 굳이 자신을 찾아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심정을 담아 쳐다봐 주었지만 아무래도 필요할 때만 둔한 이 아가씨는 그의 눈길을 전혀 알아챌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아프로디테는 시선 대신 말로 직접 묻기로 결심했다.
“사라,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 별로 상관없지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을?”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어째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부탁하러 온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므우나 카논이나 세이야들도 있을 텐데? 하고 예를 들어주자 사라가 눈을 커다랗게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질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거야 원. 상상도 못 했던 반응에 아프로디테는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라는 곧 이해한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아름다우니까요.”
“응?”
이번에는 아프로디테 쪽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반문하자 사라가 희미하게 웃은 듯한 기척이 났다.
“아프로디테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우니까요. 찰랑거리고, 색도 예쁘고,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고, 어쩐지 좋은 향기도 날 것 같고. 그래서 예전부터 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
부끄러울 정도로 스트레이트한 말에 아프로디테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그래. 아름다워서. 아름다워서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결국 아프로디테는 웃었다.
“뭐, 마음대로 해도 좋아.”
승낙의 말에 사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른다.
어울려주기로 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그러고 있기는 뭣해, 아프로디테는 일단 사라를 쌍어궁의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대로 말없이 의자에 앉으면 사라가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 뒤에 서 있는 기척이 낯설기도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어딘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사라가 외쳤다. 순간적으로 샤카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지만 아프로디테는 그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데에는 샤카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방관자의 입장이지만 한 번쯤은 끼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아프로디테는 본심을 숨긴 채 붉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해.”
오랜만에 거해궁을 찾아온 아프로디테를 보고 데스마스크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뭐냐? 그 모습은.”
데스마스크가 가리킨 것은 아프로디테의 머리카락이었다. 평소에는 되는대로 그냥 풀어놓고 있는 머리카락이 지금은 곱다라니 하나로 땋여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끝을 장식한 것은 로얄 데몬 로즈처럼 새빨간 리본이다. 물론 제법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문제는 아프로디테가 스스로 저런 꼴을 할 리가 없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데스마스크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아프로디테는 남자의 황당함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뽐내는 것처럼 땋인 머리카락이 잘 보이게 몸을 돌려주기까지 한다.
“사라가 땋아주었어. 제법이지?”
아, 정말로 자랑이었나 보다. 어딘가 먼눈을 하던 데스마스크는 아프로디테의 말 중 한 단어를 포착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가 땋아줬다고?”
“사라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지만 아프로디테는 데스마스크의 생각을 깔끔하게 부정했다. 최근 소란의 중심에 있는 처녀의 이름을 듣고 데스마스크는 조금 전보다 더욱 아득한 눈을 했다.
아프로디테가 지키는 쌍어궁은 제일 마지막인 12번째 궁. 자신이 지키는 거해궁은 4번째 궁. 샤카가 지키는 처녀궁은 6번째 궁. 즉 아프로디테가 거해궁으로 오기 위해서는 처녀궁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샤카가 타인의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제아무리 추측해 봤자 정확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데스마스크는 골치 아프게 머리를 굴리는 대신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다는 제일 확실하고 편안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샤카한테도 보여줬냐?”
“물론.”
아프로디테가 상큼한 얼굴로 즉답했다. 이 녀석 성격 나쁘네, 하고 데스마스크는 생각했지만 일신의 평화를 위해서 그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수틀리면 언제 데몬 로즈가 날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데스마스크는 아프로디테를 비난하는 대신 곧 찾아올 미래를 걱정하기로 했다.
“……또 한바탕 소란이 일겠구만.”
정확히 말하자면 소란이라기보다는 샤카가 사라를 추격하는 데 가깝고, 내용도 유치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들뿐인 데다 그 피해 정도도 미미한 편이지만─ 얽혀버린 사람들의 정신은 그다지 안녕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사라가.
하필 얽혀도 골드 세인트 중에서 손꼽히는 괴짜에 천상천하유아독존, 제멋대로에 고집까지 센 샤카와 얽혀버린 처녀를 떠올리며 데스마스크는 다음에 만나면 어깨라도 한번 두드려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정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동정하게 될 거야.
자신이 그 녀석들과 얽히는 일이 거의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자료를 찾기 위해 서고로 들어서던 카논은 평소와 다른 서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다. 사라가 없다. 이는 지극히 드문 일이다.
활동범위가 무척 좁은 사라는 평소 자신이 머무는 곳과 사가의 집무실과 서고만 왕복할 뿐 어딘가로 외출하는 일이 그다지 없다. 오죽하면 므우가 엄마처럼 제발 외출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사라가 도대체 어디로?
카논은 사라가 갈만한 곳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생각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집무실은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으므로 열외. 그렇다고 일하는 도중에 제 방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브론즈 세인트들이 찾아올 때는 이따금 성역 밖으로 나간 일도 있는 모양이지만 정작 그 세이야들은 지금 일본에 있으니 그 가능성도 열외. 어쩌면 다른 궁에 자료를 전해주러 갔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며 혀를 차던 카논은 문득 서고 구석에 있던 책상 밑에서 조그만 기척을 느꼈다.
“……뭐하냐?”
뭔가 하고 책상 밑을 들여다보고 카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도저히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행방불명이던 사라가 한껏 불편한 자세로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디서 길고양이라도 숨어들어왔나 싶었더니.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사라가 상대를 확인하고 조용하게 숨을 내쉰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카논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은 듯 꽤나 안심한 모습이다. 어딜 봐도 명백한 도망자의 모습이었다. 이런. 카논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혀를 찼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건가?”
“……비슷할지도.”
대답을 하며 사라가 책상 밑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다리가 저린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주무르는 모습을 보자니 꽤 오랜 시간 그러고 있었던 듯하다. 카논은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며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서 술래는?”
아, 알겠다. 묻자마자 잔뜩 썩어들어가는 사라의 얼굴에 카논은 대답을 충분히 짐작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성역에서 사라와 숨바꼭질을 할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다.
대답보다 먼저 사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어깨에 먹구름을 잔뜩 짊어지고 어두운 오라를 내뿜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온갖 풍파를 혼자 다 겪은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녀석 어쩐지 처음이랑 캐릭터가 조금 바뀌지 않았어? 하고 카논은 무심코 생각했다.
“샤카가…….”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에 카논은 그럼 그렇지, 하고 내심 고개를 주억이며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번에는 또 뭐가 거슬려서 이렇게 사람이 폐인이 될 때까지 괴롭히고 있는 건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최근에는 의외일 정도로 사라도, 다른 사람들도 사고 한번 치지 않고 제법 얌전하게 있었던 것이다. 뭐, 아주 사소한 사건을 가지고 이러고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가능성만 따지면 그쪽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무슨 일인데?”
카논의 물음에 사라가 그대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얼마 전에 아프로디테의 머리카락을 땋아주었는데.”
“호오?”
“아프로디테가 그대로 샤카에게 가 보여주었던 모양이라…….”
“과연.”
그 녀석 성격 나쁘네, 하고 게좌의 모 씨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카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그 한마디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독점욕이 심하고 자존심이 높고 쪼잔하기까지 한 그 샤카다. 사라가 다른 사람에게 해주었으면 자신에게도 해줘야 한다고, 제멋대로인 논리로 밀어붙였음이 틀림없다.
하여튼 그 녀석이나 이 녀석이나. 카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부러 감추지 않으며 사라와 눈을 맞추었다.
“머리카락 정도는 그냥 땋아줘도 될 텐데?”
살짝 찔러보자 사라가 시선을 피했다. 찔리는 게 있음이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머리 땋기인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시선으로 압박하자 사라가 어깨를 크게 떨구더니 우물쭈물 말하기 시작했다.
“그, 트라우마라고 할까, 조건반사라고 할까…….”
“음?”
“처음부터 납치당한 데다 이후에 샤카의 막무가내에 엄청 당했더니 이제는 샤카만 오면 도망치는 게 자연스러워 져서…….”
“……………….”
뭐랄까, 그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자업자득이긴 해도 카논은 잠깐이나마 샤카를 조금 불쌍하게 여겼다.
샤카에게 별다른 악의가 없다는 것은 ─조금 의심스럽긴 해도─ 성역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악의가 없다고 해서 항상 상대에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옆에서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공방이지만 실제로 사라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 역시 성역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느 한쪽만 편을 들기 애매한 것이다. 뭐, 므우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사라의 편인 것 같지만.
중립에서 약간 기울어져 있는 카논은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서 사라의 머리카락을 조금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 아래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의외로 부드럽다.
“뭐, 힘내라.”
“카논…….”
감동한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카논은 히죽 웃어 보였다. 본인이나 사가가 들으면 기함할 생각이긴 하지만 역시 이럴 때의 사라는 강아지처럼 보인다. 이미지는 전혀 맞지 않고 오히려 세이야 쪽이 강아지에 가까운데 이상하기도 하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카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옷자락이 강하게 당겨졌다. 뭐야, 하고 내려다보면 사라가 전에 없이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카논. 그런 의미에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는 뭐냐, 그런 의미는. 카논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사라를 동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 둘 사이에 얽히는 건 별개의 문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되는 한 있는 힘껏 도망치고 싶은 게 본심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뒷맛이 영 별로다. 일단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보자 싶은 심정에서 카논은 얌전히 사라의 뒷말을 기다렸다.
“머리카락 땋게 해주세요!”
“……어이.”
카논은 순간적으로 밀려 들어오는 허탈감에 그대로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뭘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나 했더니.
원망을 가득 담아 쳐다봤지만 사라는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절실하게 간청하고 있다. 하여튼 이 녀석.
“너, 분위기 파악 안 하냐.”
현재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카논은 불평을 가득 담아 말했다. 허나 슬프게도 사라는 강적이었다.
“하지만 저 머리카락 페티시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당당하게 말하지 말라고…….”
아, 이젠 화낼 마음도 들지 않는다. 샤카도 아닌데 어쩐지 무념무상의 도를 깨우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카논은 머리를 푹 숙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이 녀석이랑 샤카랑 사실 엄청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궁으로 들어서며 사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본적인 구조는 같을 텐데 어쩐지 처녀궁은 다른 궁에 비해 훨씬 엄숙한 기분이 든다. 단순한 심리적 압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주인의 성질이 반영되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사라가 처녀궁에 들어가는 데에는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아니, 뭐, 이것은 처녀궁의 주인이 꺼려지기 때문은 아니다. 아마.
사라는 필시 샤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크게 메아리친다. 석재로 만들어진 건물은 어쩐지 차갑다는 인상을 준다. 샤카는 항상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걸까. 왠지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사라는 드러난 팔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사라.”
“……윽!”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와 사라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두근두근 뒤를 돌아보면 처녀궁에 오게 만든 원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 있다. 평소의 골드 크로스가 아니라 러프한 평상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다.
상대를 확인하고 사라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사실 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무서우니까 그건 포기했다. 어차피 말해봤자 들어먹지도 않겠지만.
문득 샤카가 한숨처럼 질문을 흘렸다.
“어딜 가는 것이냐.”
“……아뇨, 샤카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만.”
“……나를?”
샤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샤카만 보면 항상 피해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감동과 비슷한 것을 느끼는 듯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사라는 아주 조금 반성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피하는 건 너무했지. 앞으로는 몰래 피해 다녀야겠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아, 올 것이 왔다. 사라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억눌렀다.
정말 별것 아닌 말이다. 사소하고, 몇 번이나 입 밖으로 꺼낸 적 있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긴장할 것은 없다. 분명 없을 터인데─ 그런데도 긴장이 돼서. 사라는 배에 꾹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 땋아도 괜찮습니까?”
침묵이 떨어졌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다.
문득 샤카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한마디 말조차 없는 채다. 생각해보면 샤카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사소하고, 정말 아무래도 좋은 것은 거침없이 말하고 제멋대로 우기지만 정말 본질적인 것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샤카는 아프로디테의 머리카락을 땋아주었더군, 하고 말했을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으로 사라의 곁에 계속 있었을 뿐. 가끔은 샤카 자신도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말해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거기에 희미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괜찮다.”
사라는 손안에 있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감촉이 정말로 부드러워서 무심코 한숨이 나올 정도다. 남자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예쁜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샤카의 머리카락은 다른 골드 세인트들에 비해선 정말 평범한 편인데,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빛을 뿌리는 것 같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사라는 다시 정신을 차려 샤카의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지금은 머리카락에 홀려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샤카의 머리카락을 땋아주고 이 지긋지긋한 공방전을 끝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무심코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졌다. 순간적으로 놀란 사라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샤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슬쩍슬쩍 살펴봐도 언짢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끝을 리본으로 묶고 사라는 손을 놓았다. 머리 타래가 샤카의 등 뒤에서 가볍게 흔들린다.
“끝났어요.”
그렇게 고하면 확인하는 것처럼 샤카가 머리카락을 앞으로 가져가 매만졌다. 마음에 든 것인지 남자의 손이 몇 번이고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보고 사라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스스로 말하긴 뭣하지만 이번엔 제법 예쁘게 땋았다.
“음. 수고했느니라.”
“…………아.”
그렇게 말하고 샤카가 웃었다. 순간적으로 사라는 숨을 삼켰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 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달랐다. 말로 잘 설명할 수 없지만 평소보다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느슨하고, 좀 더 온화하고, 좀 더, 좀 더─
사라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샤카는 별달리 사라를 막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는 그대로 백양궁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백양궁의 한 공간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므우는 갑작스럽게 거의 구르듯 뛰어들어온 여자를 보고 놀라 깜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 그렇게 급하게 무슨 일인가요?”
“……………….”
“……죄송합니다. 숨부터 고르세요.”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도 못하는 모습이 어딜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므우는 일단 사라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컵에 물을 따라 건네주자 사라가 벌컥벌컥 그것을 마신다. 그리고 그대로 테이블 위로 다이빙. 쾅! 하고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가 울려 퍼져 므우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사라? 괜찮습니까?”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라, 하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사라가 고개만 들어 므우를 쳐다보았다. 다갈색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잔뜩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 므우는 괜히 재촉하는 대신 얌전히 사라의 말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후 사라가 입술을 열었다.
“……므우. 저는 제멋대로인 사람이 정말 싫어요.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을 거의 경멸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합니다.”
“……보통은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뜬금없는 얘기였지만 므우는 일단 적당히 대꾸했다. 그러자 아니라는 듯 사라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므우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닐 걸요.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 저는 샤카를 싫어하지 않거든요. 샤카의 행동에 화가 난 적도 없어요.”
얘기가 그렇게 이어지는 건가, 하고 므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사라는 샤카는 어려워했을 뿐이지 딱히 싫어한다는 제스쳐를 보인 적은 없었다.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민폐지만요. 므우는 속마음을 감추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를 알아채지 못하고 사라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 그게 너무 엉뚱한 말만 하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에 그 이유를 완벽하게 깨달았어요.”
“……무엇 때문인가요?”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얘기다. 때문에 므우는 조금 두근두근하며 사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가 뜨거운 데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그래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얼굴이 취향이라 그래요.”
“………………………………………………네?”
“그러니까! 얼굴이 취향이라고요! 취향!!”
드물게 흥분하는 사라를 보고 므우는 그녀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즉, 샤카의 얼굴이 사라의 취향. 샤카의 얼굴이 취향. 얼굴이 취향…….
이번에는 므우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쾅 소리와 함께 이마가 얼얼했지만 이미 그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사라가 허둥지둥하는 게 느껴졌다. 므우?! 조그만 목소리를 무시하며 므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도 이제 모르겠습니다.
덤 1.
“시류.”
조용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옮겨진 곳에는 사라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어김없이 빗과 리본. 과연, 소문의 그건가. 납득하고 시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땡큐.”
가볍게 웃고 사라가 시류의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둘의 곁에 있던 카논은 그 모습을 보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 성역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땋을 생각이냐.”
그렇게 말하는 카논의 머리카락도 하나로 예쁘게 땋여 있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골드 세인트의 대다수는 머리카락을 땋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시류는 속으로 웃었다.
허나 사라는 남자의 말을 이해 못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시온이랑 사가랑 카뮤의 머리카락은 땋지 못했는데요.”
“그쪽까지 땋을 생각이냐…….”
카논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어쩐지 세상만사를 다 포기한 모양새다. 그러나 분위기를 파악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아니 분명 못 하는 게 분명한 사라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슌은 양 갈래로 땋을까?”
“……삼가주세요.”
덤 2.
“세이야랑 잇키는 머리카락이 짧아서 못 땋겠네.”
“뭐어-”
애매하게 대답하고 세이야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별로 안 어울리니까 잘 됐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면 틀림없이 귀여우니까 분명 잘 어울릴 거야! 하는 대답이 돌아왔으리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자애한테 귀엽다는 아니지.
그 순간 무언가 납득한 듯 사라가 갑자기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럼 옷 갈아입기를 할까?”
“……뭔가 목적이 바뀌지 않았어?”
“그런가. 뭐, 싫다면 안 할 거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금방 업무로 되돌아가는 사라를 보고 세이야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들은 원래 다 이런 걸까. 조금 전 뇌리에 사오리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