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란로드의 루이카와 지펠르시의 제놈은 서로를 이해했다. 족장이자 훌륭한 주술사였던 루이카와 마찬가지로 족장이자 뛰어난 전사였던 제놈이 10여 년 동안 전장에서 마주친 것은 13번, 검을 맞부딪친 건 오직 7번이었다. 자신들의 가진 시간의 단위로 따진다면 총 반나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아니 사실은 한 호흡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루이카는 제놈을, 제놈은 루이카를 이해했다.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더라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지 않았더라도. 모든 의문 속에 그 사실만이 명확했다. 물론 그것은 흔히 말하는 이해와는 거리가 있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상을 품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그런 씁쓸하고 달콤한 감정은 영원히 불가해의 영역에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알았을 뿐이다. 서..
어렸을 때 우연히 화성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개발된 도시의 사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의, 초기 화성의 모습이었다. 반절은 홍차 색 하늘, 나머지 반절은 온통 모래와 암석으로 뒤덮여 있던 황야. 그 모습은 다른 행성이라기보다는 지구 어딘가에 있을 자갈 사막처럼 보였다. 탐사선이 찍은 사진은 예술성이라곤 전혀 없었다.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그대로 전하는 자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고 꼭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단지 사막에 가고 싶은데 갈 수 없으니 비슷한 곳이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사막보다 화성에 가는 게 더 어려울 게 분명한데. 하지만 그 결심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
대륙의 동과 서에 제국이 있어 세계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두 제국 중, 동쪽에 있는 제국의 이름을 건身이라 한다. 현재 제위에 올라있는 것은 17대 황제 민의제敃毅帝, 그 덕이 높아 현제로 칭송받고 있다. 슬하에는 황자 하나와 황녀 다섯을 두었다. 그 중 황자와 셋째 황녀만이 황후의 소생이다. 황자의 이름은 발發, 자는 덕성德星, 호는 계원啟元, 건국의 현 국저이다. 셋째 황녀의 이름은 소형素馨, 호는 휘란輝爛이라 한다. 남매가 모두 용모가 수려하며 성품이 훌륭하고, 서로 우애가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 봄, 휘란공주에게 일어난 자그마한 사건이다. 열린 창으로 햇발이 흘러 들어온다. 창가에 앉아 수를 놓던 소형은 눈귀를 조프렸다. 가만히 내리쬐는 햇살이 지금 제가 쥐고 있는 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