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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동과 서에 제국이 있어 세계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두 제국 중, 동쪽에 있는 제국의 이름을 건身이라 한다. 현재 제위에 올라있는 것은 17대 황제 민의제敃毅帝, 그 덕이 높아 현제로 칭송받고 있다. 슬하에는 황자 하나와 황녀 다섯을 두었다. 그 중 황자와 셋째 황녀만이 황후의 소생이다. 황자의 이름은 발發, 자는 덕성德星, 호는 계원啟元, 건국의 현 국저이다. 셋째 황녀의 이름은 소형素馨, 호는 휘란輝爛이라 한다. 남매가 모두 용모가 수려하며 성품이 훌륭하고, 서로 우애가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 봄, 휘란공주에게 일어난 자그마한 사건이다.
열린 창으로 햇발이 흘러 들어온다. 창가에 앉아 수를 놓던 소형은 눈귀를 조프렸다. 가만히 내리쬐는 햇살이 지금 제가 쥐고 있는 비단만치 고와 오수가 밀려 들어왔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수를 놓느라 따분하던 차, 마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기분이라 소녀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곁에 있던 상궁이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세간에는 행동거지가 음전하다느니, 현모양처의 귀감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지만 황궁에 거주하는 자라면 모두 황제가 귀애하는 딸, 휘란공주가 얼마나 말괄량이인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지금 이렇게 얌전히 수를 놓고 있는 것도 모두 보다 못한 황후가 따끔하게 벌을 내렸기 때문으로, 그것이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궁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터였다.
평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궁은 상전을 쉬게 할 요량으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분명 오랜 시간 동안 수를 놓은 것은 사실이니 조금 쉰다고 하여도 황후께서도 화를 내시진 않으실 터다.
“공주마마, 지루하시지요?”
“응? 아, 아냐. 무얼.”
무심코 대답은 그리하였지만 소형은 사실 굉장히 지루했다. 하필이면 천후까지 좋아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작야까지만 해도 날이 추워 견딜 수 없었는데 오늘따라 햇살은 왜 이리도 따스한지. 드넓은 창천과 소담하게 꽃이 피어나는 후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해져 소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주 체면에 맞지 않게 몰래 도망쳐버릴 것 같다. 게다가 옆에서 상궁이 인내하고 있는 제 마음도 몰라주고 계속해 밖으로 나가도록 부추긴다.
“지루하시면 산책이라도 다녀오시지요, 마마.”
계속해 들려오는 달곰한 속삭임에 소형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상궁이 쐐기를 박았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셨으니 황후마마께서도 뭐라 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소형은 제가 놓은 수를 내려다보았다. 수틀에 끼워진 것은 새하얀 비단, 그 위에 검은 실로 수놓아진 것은 부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시다. 안 그래도 부군도 없는데 이런 것을 수놓아 무얼 한다고 생각하던 차, 소형은 상궁의 말에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내 잠시 다녀오마. 따라올 것 없네.”
“네, 마마.”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말로 즐거운 듯 방을 나서는 공주를 상궁은 낙낙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소형은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풀내음이 정겹다. 수를 놓는 것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소형에게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쪽이 성격에 맞았다. 이를 두고 역시 말괄량이라며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는 한숨을 내쉬고 오라버니는 웃어버리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디 그리 타고난 것을 어찌하겠는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변명을 하며 소형은 정원을 거닐었다. 연한 잎이 올라오고 날도 다스한 것이, 아직 바람이 세게 불기는 하지만 확실히 봄이라. 곧 더욱 많은 꽃이 피어날 것을 상상하자 즐거워졌다. 날이 풀리면 따라 기분도 같이 풀리는 것인지, 소형은 어느새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계속 이런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슴 속에 그득 찼다.
“아─.”
너무 풀어졌던 탓일까, 불어오는 바람에 소형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표를 놓치고 말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소형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표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로 표가 가볍게 밀려 올라가다 다시금 추락하기 시작했을 때야 소형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저 표는 소형에게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다. 금사은사로 수놓아져 귀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위해 오라버니가 골라주었단 것이 더 의미가 컸다.
걱정되는 마음에 다급한 걸음으로 소형은 표가 떨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멈춰 섰다.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하물며 관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는 갓 약관을 넘겼을까, 적어도 그녀보다 대여섯은 많아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비원에 들어왔을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수상한 자이다.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형은 그가 두렵지 않았다. 수상하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이상한 일인데도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소형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그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방금 소형이 놓쳐버렸던 표가 쥐여 있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마침내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 다다랐을 때 소형은 조그만 입술을 열었다.
“…누구?”
허나 남자는 대답 없이 묵묵히 표만 건넬 뿐이었다. 무심코 소형이 그 표를 건네받자, 남자는 고개만 꾸벅 숙이더니 금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어안이 벙벙해져 소형은 한동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마치 대낮에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라 소형은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무의식중에 원래 목표했던 대로 후원의 온실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 길을 자주 밟았던 탓이었다.
계속해 남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결국 포기의 한숨을 내쉬고 힘없는 몸짓으로 유리 온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소형은 곧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감돌았다. 익숙하고, 그런 만큼 소중한 자신의 오라버니. 소형은 상裳을 말아 쥐고 한달음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계원도 바로 그녀를 알아보고 미소 지어 주었다.
“태자전하!”
“이런, 휘란아. 그냥 오라버니라 부르려무나.”
다정한 말씨에 소형은 마냥 어린아이처럼 웃어버렸다. 그에 계원이 소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그녀는 장난치듯 가볍게 투정부렸다.
“참, 오라버니도. 어린애 취급하지 마셔요. 저도 곧 있으면 열다섯이라고요.”
버릇없는 말에도 계원은 그저 방그레 웃었다. 마냥 아끼는 동생이니 이렇게 툴툴거리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게다가 정말로 불만이라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농을 치는 것뿐이니 귀엽고, 귀여울 뿐이라.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이니 계속 이런 모습으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도 그다지 그릇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다가 문득 입안이 써졌다. 이 귀한 아이를 어찌─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약조는 약조라. 계원은 씁쓸함을 남몰래 감추며 살짝 몸을 틀었다. 하긴, 아무래도 다른 이보다는 훨씬 낫긴 낫지.
“마침 잘 왔구나. 너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단다.”
“네?”
제 오라비가 몸을 틀어, 소향은 그제야 오라비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자를 발견했다. 워낙 조용해서 자칫 있는 줄도 모를 뻔했다. 오라버니가 손수 소개해주다니, 그게 누군가 해서 찬찬히 그를 살펴보던 소형의 연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천천세를 읊으며 절을 하는 남자는 아까 날려가는 표를 잡아준 남자였다. 선이 굵은 얼굴이 유리에 투과된 빛 아래서 더욱 선명했다. 그렇구나. 귀신이 아니라 오라버니의 지인이었구나.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편으로 안도하며, 제 오라비가 곁에서 안타까움의 탄식을 터뜨리는 것도 모르고, 소형은 소녀다운 수줍음으로 볼을 붉혔다.
15살 탄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봄, 휘란공주 평생가연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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