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을 기억한다. 호흡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견디다 못해 나무 그늘에 기어들어가 혹여 애먼 소리라도 날까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옆에는 텐마도 함께였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지극히 당연하게. 지금 생각하면 기묘하기 짝이 없었으나 당시에는 그것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우습기 그지없다. 곰곰이 따져보아도 겨우 몇 달 간의 교제. 거기서 대단한 신뢰가 싹틀 리도 없었을 터인데. 매일 시끄럽게 떠들기만 했던 녀석도 그날은 어지간히 지쳤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앞만 바라봤다. 이따금 여름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에는 귀찮음이 깃들어있었다. 얼핏 눈썹이 일그러졌던 것 같기도 했다. 당시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텐마를 쳐다보고 있었..
※여체화 주의 가느다란 몸이 품 안으로 쓰러진다. 팔과 손바닥, 가슴께에 최소한의 면적이 접촉했다. 어쩔 수 없이 닿은 부분에 올올이 감각이 일어났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하다. 그 감각을 닫듯 데프테로스는 다시 텐마에게 가면을 씌워주었다. 달빛에 금속질의 물체가 창백하게 빛났다. 둔탁한 칼금에 데프테로스는 가늘게 눈을 떴다. 팔에 안긴 생명의 무게는 지독히도 낯선데, 그럼에도 언제까지라도 짊어지고 가고 싶었다. 단념했음에도 다시 손을 뻗고, 그저 눈을 감고 싶었다. 포기와 체념이라면 이미 익숙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욕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만약 미련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자신에겐 사치라는 걸 데프테로스는 알고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조심스럽게 텐마의 몸을 눕..
텐마에게 끌려가며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이 섞여들어, 머리가 어지러워져, 그래서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 자신을 먼 곳에서 관조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냉정하게 의문만이 입을 연다. 어째서 너는 나를 감쌌나, 어째서 그 말을 듣고도 나를 믿나,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상냥한가. 수많은 질문. 그러나 결코 답을 알 수 없는. 불현듯 텐마가 걸음을 멈췄다.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소다. 간신히 손이 떨어졌다. 조그만 뒷모습이 흔들린다. 데프테로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가느다랗게 드러난 목덜미, 제 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얄팍한 어깨. 어찌 이리도 작고 여린지. 감상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