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을 기억한다. 호흡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견디다 못해 나무 그늘에 기어들어가 혹여 애먼 소리라도 날까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옆에는 텐마도 함께였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지극히 당연하게. 지금 생각하면 기묘하기 짝이 없었으나 당시에는 그것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우습기 그지없다. 곰곰이 따져보아도 겨우 몇 달 간의 교제. 거기서 대단한 신뢰가 싹틀 리도 없었을 터인데.
매일 시끄럽게 떠들기만 했던 녀석도 그날은 어지간히 지쳤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앞만 바라봤다. 이따금 여름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에는 귀찮음이 깃들어있었다. 얼핏 눈썹이 일그러졌던 것 같기도 했다.
당시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텐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말이 없는 것뿐인데 마치 다른 계집이 거기 앉아있는 것 같았다. 표정이 없는 탓이란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하나로 인상이 바뀌었다.
얼마를 그리 있었는지 모르겠다. 불현 듯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버릇처럼 텐마가 싱긋 웃었다. 평소처럼 순진하고, 평소보다 어른스럽고, 평소처럼 밝고, 평소보다 예쁘고─ 아, 모르겠다. 그래서 자신은 어떻게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 그을린 목덜미에 엉겨 붙은 땀방울, 등으로 미끄러지던 머리카락, 오전에 새롭게 만들었다던 생채기, 그런 것만 떠오르는 걸 보니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끓어오르던 제 마음을 직시하지 못했듯.
이것은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파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 뿐이기도 했다.
기억은 언제나 추억이란 이름 아래 재편성된다. 더욱 새롭고, 더욱 빛나고, 더욱 아름답게. 옛날을 그립고 사랑스럽게 바꾸는 것은 시간이다. 딱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기에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 그러니 지난날의 흔적을 다시 만나봤자 빛바래기만 할 뿐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 바랐었다.
하나 신은 언제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시간마저 잊어버릴 듯한 어느 날, 데프테로스는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또 찾아왔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다. 하지만 상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데프테로스는 그것이 착각임을 알았다.
왜. 왜 네가. 불현듯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간다. 어떻게인지는 알았다. 자신의 존재는 감추어져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자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이 그 사실을 가르쳐줄 이유도, 기억도 없는 네가 이곳을 찾아올 이유도 없는데. 어째서 너는 또.
2년이다.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알고 지낸 것보다 몇 배는 되는 시간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무덤덤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모든 게 자만이었단 걸 깨달았다.
헤어져 있던 동안의 성장도, 얼굴을 가리는 가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발걸음 하나에, 실루엣 하나에, 목소리 하나에 데프테로스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너구나. 다짐도 헛되게. 존재 자체가 여전히 선명해서. 과거가 끌어올려 졌다. 겨우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부질없게도. 너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게도.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서. 한심하게도. 그럼에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부탁이야, 나를 제자로 삼아줘!!”
데프테로스는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분화가 멈추어간다. 땅의 흔들림도 잦아들었다. 이전부터 낌새를 느끼고 있던 데프테로스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하고 믿고 있었음에도 일말의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기우가 기우로만 끝났으니 다행이었다.
마지막 걱정을 꾸역꾸역 밀어 누르며 텐마를 찾았다. 있는 곳은 알았기에 금방이었다. 텐마는 바위 그늘에서 잠든 듯 기절해 있었다. 몸을 안아 올리자 생각 이상으로 가뿐해 데프테로스는 조금 놀랐다. 지난 2년 동안 나름 성장한 것도 같은데 자신에 비하면 여전히 조그맣다. 당연한 일임에도 데프테로스는 언제나 그 감각을 신비하게 여겼다. 이런데도 너는.
좀 더 안전하게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밤의 빛에 상처투성이 몸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데프테로스는 조그맣게 한탄했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제가 뭐라고, 보잘것 없는 저를 위해 텐마는 스스로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자신을 구했다. 화를 냈다. 자신이 소녀에게 있어 무엇이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러는 것이 당연해서. 그녀에게는 타인을 위해 화를 내는 게 너무 당연했기에.
“하지만 정말로 분화를 멈출 줄이야.”
나오는 게 고소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당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필시 언제까지고.
무심코 손을 뻗는다. 손끝에 잠깐 머리카락이 스쳤다. 그리운 감촉. 하지만 완전히 닿기 전에 데프테로스는 손을 거둬들였다. 페가수스의 크로스가 울리고 있었다. 그 안에 깃든 또 다른 기척을 알아채고 데프테로스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맙소사. 정말로 이 녀석에게는 당해낼 수 없을 것 같다.
“죽은 사람까지 떠돌며 나올 줄이야. 아스미타여.”
「좋은 달밤이구나, 데프테로스」
금빛이 흐트러진다. 모습을 드러낸 아스미타가 웃는다. 일견 사람을 깔보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미소. 이미 죽은 자임에도 태연자약한 모습에 데프테로스는 많은 탄식을 삼켰다.
“설마 네가 페가수스의 크로스에 피를 줬을 줄이야.”
「무얼. 흐름대로이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타인을 가르치다니 자네답지 않네. 다만 그 덕분에 그녀는 제7감에 일순이라도 다가갔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말하기가 어려웠다. 시간 죽이기에 좋은 볼거리였어.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아스미타가 다시 웃었다.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가 지독히 날카로웠다.
「자네는 타인을 위해 힘을 쓰는 그녀가 부러웠겠지.」
데프테로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삶은 전부 형을 위한 것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자를 찾아. 아무리 변명을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전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 타인이 무어라 한들 스스로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괴로움이었다.
그러므로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다른 사람들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나가는 자들을. 자신은 할 수 없었으므로.
「뭐,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역전된다. 얼핏 장난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는 아스미타를 보며 데프테로스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스미타가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무엇을 숨기든 전부 눈치채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성가신 녀석.
고집스럽게 무언(無言)을 고수하고 있자 아스미타의 모습이 흐려진다. 그의 표정이 이제까지 중에서 제일 부드럽게 풀렸다.
「자네는 원래 은하의 별을 부술 정도의 힘을 가진 사내지 않나. 섬 하나에 얽매이지 말게. 싸우게, 나의 몫까지. 강한 자네에게 친구로서 하는 말일세.」
“죽어서 나와서까지 설교인가…….”
잔상이 흩어지는 걸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데프테로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달만이 빛나는 밤 안에서 남은 텐마의 모습을 본다. 창백한 얼굴이 마지막 헤어짐과 겹쳤다. 실컷 울어버린 것 같은 얼굴.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저 눈꺼풀 속에 무척이나 강한 빛을 가진 눈동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꼭 달 같은 사람이네.’
문득 언젠가 소녀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맥락도 없이 떨어졌던 목소리였다. 어쩌면 목소리라기보다는 한숨이었을지도 모른다. 뭐? 의미를 알 수 없어 데프테로스는 미간을 찌푸렸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텐마가 화들짝 놀랐었다.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본인이 의미를 밝히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아 데프테로스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갑자기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그 말대로라는 생각도 했었다. 낮에는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 빛날 줄도 몰라, 다른 누군가가 없다면 의미도 없는.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발버둥치는. 꼭 저 같지 않은가. 텐마가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조했었다. 도피도 약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상냥한 진심을 듣게 된다면 또 무엇을 바라게 될지 몰라서.
그것을, 이제 와서─
“페가수스.”
듣는 이 하나 없음에도 데프테로스는 그녀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텐마. 단 두 음절. 짧은 발음은 앞으로 제 마음속에만 남게 되리라.
“그 크로스 소중히 다루는 게 좋을 거다. 싸움은 머지않았으니까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음에도 할 수 있는 말 역시 이것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영영 마주친 적 없던 것처럼. 이 짧은 재회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자신들은 그날, 그 달밤에 헤어진 거다. 과거를 전부 지우고 그곳에서 완전히 이별했던 거다. 더는 교차점을 만들지 않도록. 그녀는 그녀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어차피 제 삶은 머지않아 끝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욕심이 더 생기기 전에.
다만, 감사의 마음만은 품고,
─너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아주 약간의 소망을 가진 채,
─너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데프테로스는 끝까지 작별을 고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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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 완결일 것 같습니다(?????) 왜냐면 원작 내용은 다 스킵하니까요!< 그리고 외전 한두 개 나오지 않을까요....
참고로 태연하게 부활합니다. 제가 다 그렇죠 뭐....◐◐ 아니 이건 전멸 엔딩으로 만든 작가님들이 나쁜 거일지도....<<
+)그러고 보니 방문자 수가 벌써 만 명을 넘었더군요! 모두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어.. 이 마음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