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과 다를 바 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와 레굴루스는 무심코 텐마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기에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란 걸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당황한 탓인지 헤에, 하고 두서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런 레굴루스를 보고 텐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햇살 같은 웃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레굴루스의 시선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텐마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길고, 곧고, 뭔가 어른의 손가락 같아.”
봐봐, 라며 텐마는 자신의 손과 레굴루스의 손을 맞댔다. 가벼운 접촉. 손바닥에 온기가 닿고, 레굴루스는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말함으로써 몰랐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텐마의 말대로 두드러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신장도 체격도 비슷한 둘이지만 레굴루스의 손가락이 조금 더 길고 마디가 굵다. 선도 훨씬 딱딱하니 텐마가 어른의 손가락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용케 이런 차이를 발견했네, 하고 레굴루스는 감탄했다.
동시에 그렇지만, 하고 텐마가 갑자기 한숨을 흘린다.
“엄청 상처투성이야.”
아쉬워하는 것 같은 말투에 레굴루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텐마가 말한 대로 레굴루스의 손은 여기저기 굳은살과 생채기로 가득한 데다 손톱이란 손톱은 전부 깨져있었다. 문자 그대로 엉망진창.
그렇지만 별로 아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는 성격도 아닌데다 애당초 세인트로서 잘 관리된 손을 바란다는 건 사치에 가까웠으니까. 때문에 레굴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
“그건 텐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매일 단련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면서 레굴루스는 불필요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난 그런 텐마의 손가락도 좋아해.”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해버린 텐마를 보고 레굴루스는 킥킥 소리 높여 웃었다.
잇키+세이야, 공미포 633자
“만약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하?”
뜬금없는 말에 뒤돌아보면, 가까이에 세이야의 얼굴이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흠칫 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세이야는 그런 내 행동에 신경 쓰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응? 하고 대답을 촉구했다.
또 시답잖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의외로 진지한 것인지 제법 심각한 얼굴이다. 그래 봤자 평소의 인상 때문에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쓸데없는 것을 묻는구나 싶어 가볍게 노려봤지만 곤란하게도 이 녀석은 어지간한 일엔 주눅이 드는 법이 거의 없다. 오히려 달라붙어서 대답해달라고 칭얼거릴 뿐이다. 적당히 대답해주면 되겠지만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알 바 아니다, 하고 내뱉자 뭐야! 라고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린다. 하아, 그건 이쪽의 대사다. 도대체 갑자기 뭐야.
내 한심해 하는 시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이야는 잇키 바보, 치사해,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불평들이었지만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기에는 충분했다. 어이, 그만둬. 내 인내심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에 한참을 투덜거리던 세이야가 갑자기 웃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녀석은 데굴데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데에는 재주가 있다.
“잇키라면 왠지 세계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것 같네.”
스스로 한 말이 맘에 들었는지 녀석이 낄낄대며 웃는다.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세이야의 머리카락을 난폭하게 쓰다듬었다. 아프다고 항의하는 세이야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 일은 절대 없다.
역시 너는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보다 웃는 쪽이 어울려.
아이오리아+세이야, 공미포 522자, 바보 같은 대화
“아테나와 나.”
“사오리 씨.”
“누나와 나.”
“누나.”
“마린과 나.”
“마린 씨.”
“슌과 나.”
“슌."
"…시류들과 나.“
“…시류들.”
“……사가와 나.”
“………………………사가.”
“……사가한테도 밀리는 거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포효하는 아이오리아를 보고 세이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평소라면 그런 세이야를 보고 화를 억눌렀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아이오리아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잡담 도중 문득 튀어나온, 위험한 상황에서 누굴 먼저 구할 것인가, 하는 의미 없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주제였다. 대화는 아이오리아가 선택문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 세이야가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이오리아도 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의 아테나나 누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하다고 아이오리아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답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사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폭발했다는 게 지금이다.
솔직히 자신도 조금 심할지도, 라고 느끼긴 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고도 세이야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이야에게 아이오리아는 가장 강하고, 믿음직하고, 누구보다 반짝이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라면 내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멋지게 위험을 극복해 보일 거잖아?
그것은 화가 나 있던 황금 사자에겐 아직 전해지지 않은 진심.
슌+세이야, 공미포 577자, 실없는 대화
텔레비전을 보던 도중 화면에 새하얀 드레스가 가득 찼다. 눈부시고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은 행복의 상징. 입은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물품. 신부들의 필수품인 웨딩드레스다.
화면 속의 여자가 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들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돌연 슌이 말을 꺼냈다.
“웨딩드레스 예쁘네.”
“응, 예쁘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세이야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웃는 기척이 난다.
“세이야도 결혼식 때 저런 거 입을까?”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에 세이야는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시선에 황당함과 약한 비난이 담기게 된다. 그렇지만 동갑내기 형은 그저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어쩐지 미묘한 기분이 되어 세이야는 떨떠름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기, 슌? 나 일단 남잔데.”
“응, 알아.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어쩐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래에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 확신하는 것 같은 말투다. 슌은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다.
세이야는 도저히 찝찝함을 털어내지 못한 채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는 슌은?”
되돌아온 질문에 슌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남자인걸? 분명 안 어울릴 거야.”
아니, 분명 엄청 잘 어울릴걸.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상냥한 슌이 화내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에 세이야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사실 그런 미래를 한 번쯤 생각해봤다는 건 말할 수 없는 비밀.
사가세이, 공미포 779자, 응석부리는 남자
사가가 비를 맞고 돌아왔다.
가만히 있는데도 남자의 머리카락에서, 턱에서, 옷자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발치도 금방 그림자처럼 검게 젖어 들어갔다. 심하게 젖었다.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세이야는 그것보다 사가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부드럽게 쓴웃음 짓고 있는, 어딘가 공허한 표정이.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지간한 일에 면역이 되어있던 세이야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일단 자, 하고 건네줬지만 사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에 세이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대신해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손끝에서 젖은 머리카락이 바스러진다.
그때 사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건 일순이고 다음 순간 세이야는 사가의 품 안에 있었다. 싸늘한 온기가 피부에 감촉을 남겼다.
당황도 무엇도 없었다. 그저 감정만이 가슴 속에서 흘러넘칠 뿐이다.
이럴 때마다 세이야는 사가가 어린애처럼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다고 느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마지막에야 간신히 손을 내미는, 지독히 서툰 남자.
어쩐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세이야는 남자의 등에 팔을 둘렀다. 맞닿은 부분에서 빗물이 번진다.
비 냄새가 나.
사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세이야는 문득 중얼거렸다.
비를 맞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사가가 대꾸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세이야는 생각했다. 남자에게서 비 냄새가 나는 건 단지 비를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이따금, 혹은 언제나 사가에게선 비의 냄새가 났다. 어딘가 쓸쓸하고 슬픈 냄새가.
세이야에게선 햇빛 냄새가 나는구나.
단순한 예처럼, 칭찬을 되돌리는 것처럼 사가가 얘기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세이야에게 그 목소리는 어쩐지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은 무얼 바라고 있어?
물어보는 것은 쉬웠다. 그렇지만 세이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남자를 안은 팔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 체온이 당신에게서 비를 빼앗아가 주면 좋을 텐데.
최근 블로그에 사가세이로 들어오는 분이 계셔서 뭐라도 올려야할 것 같은 강렬한 의무감을 느꼈는데 정작 생각나는 게 없어서 예전에 올렸던 거 재탕 중<
사가세이가 그 사가세이가 아니면 어떡하지. 만약 맞으시다면 전 격렬하게 기쁨의 탭댄스를 추고 싶습니다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