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아궁에 가까워지는 코스모가 느껴졌다. 이질적인 기척에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느껴지는 것은 둘, 서늘하고 고요한 코스모와 그와 대조적으로 뜨겁고 활기찬 코스모. 둘 다 데프테로스가 익히 알고 있는 자의 것이다.
별로 맞이하러 나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현재 데프테로스는 쌍아궁에 머물고 있긴 했지만 이 궁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과하는 자를 일일이 확인할 의무는 없다. 허나 어쩐지 둘의 목적은 이 쌍아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다른 이들도 아니고 인연이 있는 자들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던 데프테로스는 결국 손님을 맞이하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거주공간을 나서면 멀리서 얼핏 금색 인영이 보였다.
“데프테로스.”
모습을 드러내자 자신이 말을 거는 것보다 먼저 상대 쪽에서 이름을 불러왔다. 가볍게 대꾸하려던 데프테로스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순간 당혹했다.
“……뭐야, 그 모습은.”
무심코 얼빠진 목소리가 샌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그곳에 있는 건 텐마와 데젤이었다. 하지만 데프테로스가 놀란 건 그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둘이 같이 있는 건 분명 신기하긴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텐마가 상처투성인 것도 언제나의 일이니 놀랄 일이 아니다. 데프테로스가 놀란 건 데젤이 텐마의 목덜미를 붙잡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어이없어하는 데프테로스의 시선에 텐마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데젤이 흔들림 없이 그를 맞받아친다. 과연 아쿠에리어스. 조금의 미동도 없다.
한숨을 내쉬며 데프테로스는 팔짱을 꼈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역시 처음부터 무시하는 게 나았을지도. 지금이라도 못 본척하고 돌아갈까? 잠깐 달콤한 유혹에 휩싸였지만 그보다 데젤의 행동이 빨랐다.
“페가수스를 부탁한다, 데프테로스.”
“어이! 잠깐!! 제대로 설명을 해!! 아니, 그보다 나에게 맡기지 마!!”
그대로 텐마를 들이미는 데젤의 모습에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절규했다. 어째서 나에게 떠맡기는 거냐! 그리고 그렇게 다루지 마!!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니라고!!
다행히 절절한 외침이 통했는지 데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설명은 필요할 것 같군.”
납득한 부분은 그쪽이냐며 데프테로스는 어깨를 떨어트렸다. 이왕이면 뒤쪽을 납득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건 요원한 소원인 듯했다. 그런 데프테로스를 아랑곳하지 않고 데젤이 말을 잇는다.
“페가수스가 잡병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
전혀 예상 못 했던 말에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텐마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텐마는 여전히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데젤의 말에 따르면 그가 텐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어른 다수와 어린아이 한 명의 싸움. 어딜 보더라도 어린아이 쪽이 불리했지만 상황은 꼭 그렇게 돌아가진 않았다. 제아무리 훈련을 계속 해왔다고 하더라도 잡병과 세인트의 차이는 크다. 세인트가 될 수 있던 자와 아닌 자를 가르는 데 가장 중요한, 코스모 운용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텐마도 그를 고려했는지 싸우는 도중 코스모는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다만 소년의 고려는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한쪽은 잡병 무리, 다른 한쪽은 최하위 계급이라지만 엄연한 세인트. 그것도 평범한 브론즈가 아니라 명왕과 직접 맞붙기까지 했던 그 페가수스의 세인트다. 비록 싸움에서 코스모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도 승패는 불 보듯 뻔한 일. 실제로 수적 차이는 있었지만 열세는 없었던 듯, 데젤이 봤을 때도 그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소년의 일방적인 분풀이에 가까웠다고 한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는 어지간한 데젤도 곤혹스러웠지만 일단 싸움은 어찌어찌 멈출 수 있었다.─더불어 그 싸움에 끼려던 카르디아도 얼리고─ 다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벌에 관한 문제가 남은 것이다.
세인트에게 사투는 금지. 적어도 세인트끼리였다면 대련이었다고 둘러댈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잡병과 세인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인 이상 그런 변명이 통할 리가 없다. 가벼운 다툼 정도로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징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텐마는 여신의 소꿉친구인 데다 하데스를 쓰러트린 영웅이다. 어찌 보면 그 위상은 골드 세인트에 뒤지지 않을 정도. 게다가 별로 깊은 교류가 없다 해도, 데젤은 텐마가 고작 사감으로 이렇게까지 상대에게 분을 풀 만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사정을 들으려고 했지만 곤란하게 양쪽 다 제대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려 했다. 안타깝게도 데젤에게 이런 상황에서 사정만을 교묘히 알아낼 솜씨는 없었다.
결국 데젤은 어쩔 수 없이 사정을 듣는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다. 평소라면 텐마의 스승이자 형 같은 존재인 도코에게 맡겼겠지만 공교롭게도 때마침 그는 임무 때문에 부재중인 상황이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이 데프테로스였다─ 라는 얘기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 데프테로스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데젤의 설명은 간결하고 정확해 왜 텐마와 데젤이 같이 있었는지도, 텐마가 어째서 상처투성이였는지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설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 빠져 있다. 왜 하필 자신인가, 하는 부분이다. 어째서 자신인가. 자신이 아니어도 되지 않는가.
“……나에게 맡기겠다고?”
“그래.”
“……시온이나 마니골도나 아스미타나 아무튼 다른 녀석에게 맡기면 될 텐데.”
“네가 적임이라 판단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하는 데젤을 보고 데프테로스는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데젤은 자신만의 확고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를 깨닫고 데프테로스는 더없이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이런 상태의 데젤에게는 무엇을 말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데프테로스 스스로가 사건에 대해 호기심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도 반대를 강경히 말하는 데 방해가 됐다.
결국 데프테로스가 할 수 있던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알겠으니 애송이는 두고 가.”
자신 앞에서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텐마를 보고 데프테로스는 한숨을 물어 죽였다.
데젤에게 자신이 맡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프테로스 역시 타인의 입을 열게 할 말재간은 없었다. 적당히 을러서 해결될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데프테로스가 데젤에 비해 유리한 점이라고 해봤자 텐마가 조금 더 잘 따른다고 하는 것뿐이다. 라고 해봤자 이 천진난만한 소년은 대부분의 사람을 잘 따르지만.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이야기라도 해보긴 해야 할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프테로스는 가볍게 팔짱을 꼈다.
“텐마.”
이름을 부르자 소년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본다. 그 얼굴이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어서 데프테로스는 조금 당황했다.
대개 쾌활한 표정만 보여주기 때문인지 텐마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제아무리 데프테로스라도 강경하게 나가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목소리와 행동이 부드럽게 변한다. 마치 배려하는 것처럼.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날은 언제였던가.
“……말할 생각이 없는 거냐.”
상념을 떨치고 데프테로스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걸면 텐마의 붉은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소년의 모습에 일순 사고가 멈췄다.
“어, 어이?”
데프테로스는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쩔 줄 몰라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곧 손은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방황했다. 이럴 때 눈물을 닦아주는 방법을 데프테로스는 모른다. 사람과 제대로 된 교제를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이 지금만큼은 억울하게 생각되었다.
다행히도 텐마는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곧바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어린애다운 그 모습이 어쩐지 분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쉽게 얘기를 해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텐마는 금방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잘못 안 했어.”
울컥, 하고 소년의 입술에서부터 깨질 것 같은 목소리가 토해진다.
“나쁜 건, 내가 아니라, 젠장……!”
“어이.”
“멋대로 말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이, 텐마.”
분에 겨워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한 텐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데프테로스는 소년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제야 텐마가 데프테로스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소년의 붉은색 눈동자가 흐려지고, 이번에야말로 눈물이 흘러넘친다. 뺨을 구르는 구슬 같은 눈물이 턱에 맺혔다가 뚝 떨어졌다.
두 번째이기 때문인지 이번엔 그럭저럭 침착할 수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달래듯 허리를 조금 굽혀 텐마와 눈을 마주쳤다.
“제대로 알 수 있게 설명해봐.”
조용한 목소리로 촉구하면 소년이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그 녀석들 욕하고 있었어.”
“……?”
“그러니까, 당신을 욕하고 있었다고!!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멋대로 떠들기나 하고!! 빌어먹을!!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게 당연하잖아!!”
말하다 보니 더 북받쳤는지 텐마의 어조가 거칠어진다. 소년의 뺨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우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는 텐마의 반응에 데프테로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소년이 분노하는 과정이 눈에 선해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낄 정도다.
싸움의 원인이 텐마에게 있지 않다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것이 원인이었다고는. 꿈에서라도 절대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 녀석은 어째서 항상……. 생각하고 있던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바보냐, 네 녀석은.”
매도하는 말에 텐마는 눈을 치켜뜨고 데프테로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카논 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타인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쓴다. 이상할 정도로 이타적인 소년. 만약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가족이나 친구였다면 데프테로스도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텐마가 바라는 건 항상 그 이상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쏟아 붓는다. 외면하는 법을 모르고 곧게 앞으로 나아갔다. 약한 주제에 자신의 손이 닿는 곳 너머에 있는 사람까지 지키려고 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지키겠다고 욕심을 부린다. 현실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그 마음이 텐마의 강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어리석음이 기적이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진흙탕을 구르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진심.
소년의 상냥함은 언제나 뜨겁다.
“그렇다고 굳이 싸움을 일으키는 녀석이 어디 있냐.”
쓴웃음을 섞어 말하면 그를 눈치챈 것처럼 텐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퍽 어린애 같은 모습이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고맙다.”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솔직하게 감사의 말이 나왔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알았겠는가. 타인에게 위로받고, 거기에 감사를 표하며, 이런 약함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날이. 전부 상대가 텐마니까, 자신이 텐마에게 무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자 텐마가 응, 하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마지막으로 또르륵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