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돌아다니던 사가는 눈앞에 벌어진 소란에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비명을 억누르고 있었다. 별로 호기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다만 버릇으로 상황을 살피던 사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엎어진 매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과일들, 값비싼 옷을 입은 남자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처녀. 그리고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소년─ 지긋지긋한 일이다.
어디든 부와 권력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는 인간들이 있는 법이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쪽이 드물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이미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모습이 추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사가는 인간이 원래부터 이런 종족이라는 걸 이해했고 납득했다. 원래 이런 종족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당연한 종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남자는 사가에게 불쾌감조차 일으키지 못했고, 여자는 조금의 동정조차 부르지 못했다. 소년을 봤을 때도 그저 용감한 아이군, 하는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웃기지 마!!”
씩씩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사가는 드러난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 숨을 삼켰다.
소년의 맑은 시선이 빛을 투영한다. 반짝이는 호박琥珀에서 곧 열을 품은 홍옥紅玉으로 바뀌는 보석 같은 눈동자. 눈이 부시다.
일순, 사가는 소년의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겼다.
“웃기지 마!!”
분노로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세이야는 속으론 비관적인 미래를 떠올렸다. 웬 귀족이 애꿎은 여성을 괴롭히는 상황에 호기롭게 나서긴 했지만 세이야는 힘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용을 써봐야 상황이 호전될 리는 만무했고, 혹여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긴다 하더라도 후에 보복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세이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겁먹지 않는다. 불합리한 상황을 보고 넘기지 않는다. 그것만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더러운 꼬맹이가!”
고함을 내지르며 귀족이 팔을 치켜들었다. 귀족의 손에 들린 채찍이 거무튀튀하게 빛난다. 위협적인 행동에 세이야는 곧 다가올 아픔을 대비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세이야는 머뭇머뭇 눈을 떴다. 시야에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귀족과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이 비친다. 무슨 일이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세이야는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그가 자신을 도와준 모양이다.
일단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세이야는 남자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섬세한 옆얼굴이 비친다. 갑작스러운 난입자의 모습에 세이야는 무심코 상황도 잊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장신의 균형 잡힌 몸매, 새하얀 피부와 단정한 옆모습은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조각이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단단히 다물린 입매에서는 무뚝뚝함보다는 품격을 느껴졌으며 이마와 뺨 위로 흘러내린 깨끗한 남색의 머리카락이 남자에게 신성함을 부여했다.
허나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순간 세이야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독히도 무기질적인 눈동자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위험한 눈동자.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그 순간,
“에?”
변화는 일순이었다. 세이야를 시야에 담고 남자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린다. 좀 전과 차이가 너무 명확해 세이야는 아까 봤던 것이 환상이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다가왔다. 매우 느릿한 동작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씩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세이야는 다른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남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야, 이거.
당황한 세이야는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 가늘어졌다.
“─이름은?”
“어? 아, 세, 세이야.”
“세이야.”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질문이 들어왔다. 무심코 대답하자 확인하는 것처럼 남자가 세이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게 물들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를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내달린다. 제 이름이 이렇게도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세이야는 처음 알았다.
괜히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세이야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이어갔다.
“어?”
너무 자연스러운 태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한 손이 잡히고 나서야 세이야는 남자가 자신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지극히 우아한 몸짓으로 남자가 세이야의 손등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지금 여기서 내 피와 이름에 걸고 맹세한다. 설령 세계가 두 개로 나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너를 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너를 지키겠다. 너를 지키고, 보살피고, 결코 상처 입히지 않고, 그렇게 곁에서 살아가겠다.”
남자의 입술이 언어를 쏟아낸다. 마법에는 조금의 재능은커녕 관심도 없는 세이야였지만 남자의 말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아챘다. 마치 목소리 자체에 힘이 있는 것처럼 그 말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에 취해있던 세이야는 한 박자 늦게 주변의 소란을 주워들었다. 슬쩍 주변을 돌아보니 주위의 구경꾼들이 전부 이쪽을 집중하고 있다. 모두 수군대는 꼴이 놀람이라기보다는 야유에 가깝다. 부끄러움에 얼굴로 화악 열이 몰렸다.
“다, 당신!!”
“사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도, 도대체 지금 뭘 한 거야!!”
거의 폭발할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는 세이야를 보고 사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단순한 서약이다.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소년의 비명이 푸른 하늘을 갈랐다.
이 제멋대로인 남자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그 정체가 용 중의 용,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세이야가 알게 되는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
공미포 2260자
제목 그대로. 캐릭터와 스토리야 어쨌든 설정 자체가 제 취향에 스트라이크라 전부터 쓰고싶었는데 딱히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조각글 형식으로. 한 두어개 정도 더 쓸 것 같습니다. 전부 이어지는 내용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