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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가 그 편지를 발견한 건 이른 새벽이었다.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뒤숭숭한 꿈을 꾼 참이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방을 가득 채운 건 아직 푸르스름한 박명. 개꿈 때문인지 뒤틀린 바이오리듬 탓인지 머릿속의 안개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어딘가 어질어질한 기분도 든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다. 눈꺼풀이 지나치게 무거웠기에 그조차 쉽지는 않았다. 단순히 졸리다는 느낌보다는 팅팅 부었다는 느낌이다. 꿈결에 울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분명 꿈에 나온(듯한) 카논 탓이다. 정말이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네.
그래도 몇 번이고 행동을 반복하면 간신히 시야가 트였다. 사람이 시각을 통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럴 때에 명확히 깨닫게 된다. 뿌옇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옴으로써 이유 없는 안심감이 단단해졌으므로. 밤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단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작게 숨을 내쉬며 사라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통상작동을 하는 안구와는 반대로 머리는 아직 무겁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이마에 손등을 대었지만 체온이 그게 그거라 알기는 어렵다. 일단 발열은 하지 않은 것 같긴 했다. 하긴, 아무리 자신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감기에 걸리지는 않는다. 진짜로. 아마도.
몸 상태를 체크한 후, 사라는 버릇처럼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서 손목시계를 찾았다. 원래는 현대인답게 핸드폰을 시계 대용으로 사용했지만 통신이 불가능한 성역의 환경 사정으로 아날로그로 갈아탄 지 오래다. 여담이지만 이 시계를 사준 사람은 사오리다. 취업 선물이라나 뭐라나. 보통 사장님이 이런 걸 사주나 싶었지만 주니까 일단 고맙게 받긴 했었다. 이 시계가 제법 가격 있는 브랜드 제품인 걸 사라가 알게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고―
“우으…….”
무심코 신음이 튀어나온다.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6시 20분. 평소보다 삼십 분정도 빠르다. 애매한 간격에 사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더 잘 수 있다. 더 잘 수 있다고. 그러니까 여기서는 더 자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근데 컨디션이 미묘해! 여기서 더 잤다간 삼십 분이 아니라 세 시간을 더 잘 것 같은데. 아니, 그냥 아주 골아떨어져서 오후 세 시에 일어날 것 같은데. 물론 지각해도 ―사오리 씨 덕분에―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사가의 위장 빼고는―어떤 문제도 없지만 사람의 양심이란 게!
치열하고도 기나긴 내적공방이 일어났다. 오 초정도. 승리한 쪽은 더 자자고 주장한 본성이다. 물론 제아무리 사라라도 아무 계획 없이 결정한 건 아니었다. 너무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어디 아픈가 싶어서 아무라도 보러 오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있다. 결국 지각하는 게 대전제란 소리다.
푹신한 이불 속으로 재다이빙.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기분 좋다. 당연한 듯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마지막 기력을 짜내 팔을 뻗어 손목시계를 제자리에 둔다. 동시에,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손 끝에 닿았다.
‘……종이?’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사이드 테이블을 손목시계 거치대 이상으로 쓴 적이 없으니 책조차 올려놓지 않았을 텐데. 잊고 있는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메모를 해놨나? 조그맣고 접힌 느낌이 있는 게 메모가 맞긴 맞는 것 같다. 일순 갈등이 일었으나 사라는 성역에서 닳고 닳은 마지막 양심을 일으켜 쪽지를 집어들었다. 찝찝함을 품고 자는 것보다 무시하고 자는 게 낫지.
‘어디 보자…….’
가물거리는 눈으로 내용을 확인한다. 몇가지 문장으로 꾸며진 짧은 글. 바로 해석하지 못했던 건 악필이었기 때문이다. 응, 내가 쓴 건 아니네. 자신도 그다지 달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자신이 쓴 글을 못 알아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아이오리아가 쓴 건가. 특히 쓰기 싫은 것(주로 보고서)을 억지로 썼을 때의 글씨랑 비슷한데.
하지만 역시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전할 게 있다면 사람이 자는 데 몰래 들어와 쪽지를 남기는 게 아니라 쳐들어와 억지로 깨우는 게 세인트란 족속들이 아닌가. 아이오리아라면 특히. 무엇보다 이런 걸 남길 만한 관계도 아니고. 그럼 누구일까. 일단 글씨체만으로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므우는 엄청 깔끔한 글씨고, 아이오로스는 훨씬 달필처럼 보이는 악필이고. 그나마 비슷한 건 미로인데 그쪽은 문장이 끝나갈수록 상승한단 말이지.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정신을 집중해 글을 읽는다. 잘 지내고 있어? 처음부터 파급력이 엄청나다. 뭐야, 술취해서 구 애인에게 남긴 카톡 같은 이 글은. 이어서 건강하지? 의례적인 안부의 말. 만나고 싶어. 담백한 그리움. 또 봐. 확신이 담긴 인사. 그리고 마지막 단어, 누나.
“누나?!”
사라는 기세 좋게 이불을 걷어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가득하던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눈을 부릅뜨고 조그만 종이를 움쳐쥔채 읽고 또 읽었다. 당연히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누나. 그리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던 단어. 잘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일단 장난은 아니다. 이곳 사람들이 엉뚱하긴 해도 누군가를 놀려먹을 성품은 아니다. 아니,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몇몇 있긴 하지만 굳이 이런 어정쩡한 장난을 치진 않겠지. 그렇다면 정말 자신의 동생 중 하나가 써놓고 갔다는 건데― 이복동생도, 심정적으로 동생이라 여기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진 않고 대부분이구나. 그래도 그중에 이런 걸 쓸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텐마구나.”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면 누나의 감이다. 더해서 누나, 누나하고 지저귀는 귀여운 병아리들이 어제까지 성역에 있어서 잘 놀았고 지금도 성역에 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텐마가 이백하고도 플러스 알파 년 전에 있단 거지만 사람도 타임슬립 했는데 쪽지라고 타임슬립을 못 하겠어. 혹시 알아. 텐마를 보고 싶어 하는 내 간절한 마음에 감동 받은 아무개 신이 기적을 일으켜줬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이상한 쪽으로만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며 사라는 방을 뒤져 종이를 찾아냈다. 왜,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항상 같은 자리에 편지를 두면 알아서 발송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러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
무엇을 적을까.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까. 넘치는 마음이 너무 많아 글로는 다 옮겨 적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추려내는 데 한참, 하나하나 예쁘게 글로 옮기는 데 한참. 그리하여 두 시간 뒤 사라는 완성된 장문의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출근했다. 출근하니 사가의 한숨이 자신을 맞아줬지만 그건 모른 척하고. 어떻게든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 하루를 보낸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때,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두 번째 편지가 도착한 건 이틀 뒤, 아직 이른 오후였다. 그것도 장소는 침실의 사이드 테이블 위가 아니라 서고의 창가. 저번보다 조금 더 크고 노르스름한 색을 띈 종이였다.
때마침 카논이 옆에 있었기에 사라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숨을 죽였다. 여기서 또 날뛰면 카논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몰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보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그 뒤에 따라올 타박이 귀찮다. 이래뵈도 은근히 잔소리가 많은 남자라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문진(文鎭)같은 게 없는데도 어디 날아가지 않고 얌전히 제자리에 있는 편지가 사랑스럽다. 조심스레 종이를 집어들자 포근포근 햇살을 맞은 탓인지 따뜻했다. 사라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읽는 대신 주머니에 넣었다. 그대로 몸을 돌린다. 카논은 제게 관심도 없다는 듯 본인에게 필요한 자료만 열심히 찾고 있었다.
사라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서고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몇 가지 서류가 쌓여 위가 어지럽다. 그를 대충 모아 구석으로 치워두고 홍차를 끓인다. 한국에 있을 때는 보리차는커녕 생수만 줄창 마셨지만 여기 와서는 다들 차를 외쳐댄 덕분에 행동에 막힘은 없다. 다만 여전히 맛은 모르므로 종류는 아무 거나 선택한다. 양도 적당히다. 이래도 문제가 없는 건 세인트 대부분이 차에 까다롭지 않은 덕분이다. 이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사오리 씨나 아프로디테 정도겠지.
그럭저럭 차가 우러났을 때 카논이 다가왔다. 당연한 듯 자리에 앉는 게 서로에게 무척 익숙해진 듯해 닭살이 돋았다. 아, 진짜. 우리 너무 친해진 거 아닌가요. 그래봤자 카논도 같은 심정일 터라 사라는 굳이 입 밖으로 심정을 꺼내지 않고 차나 따라주었다. 노을 색, 좋아하는 동생의 눈동자와 닮은 색의 액체가 흰 찻잔 속에서 찰랑거린다.
여기에 카논의 찻잔에는 각설탕 하나, 자신의 찻잔에는 각설탕 셋과 우유를 듬뿍 첨가. 어쩌다 보니 자신의 것은 홍차나 밀크티라기보다는 홍차 향기가 나는 우유가 되어버렸지만 입맛에 맞으니까 문제는 없다. 근데 이거 향이 좀 별로네. 저번에 쌍아궁에 갔을 때 카논이 타 준 홍차 향기가 엄청 좋았는데 나중에 그거나 좀 얻어올까. 그보다 얼마 전에 므우가 준 꿀차가 있는데 그거나 마실걸.
그 사이 반쯤 차를 마신 카논이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러놓았다. 부러 소리를 낸 게 분명해 사라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퍽 심드렁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할 말은 뭐냐.”
뭔가 할 말이 있으니까 판을 깐 게 아니냐고 묻는 카논에 사라는 자세를 바로 했다. 사실은……. 어렵지 않게 나온 목소리가 부드럽게 떨렸다.
“저한테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닌 가 싶어서요.”
남자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진다. 이게 또 헛소리 하고 있네. 마음의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일단 대답을 해준다는 점에서 의외의 성실함이 보이는 듯하다. 음, 역시 사가랑 형제야.
“그 꼬맹이들이랑 이복형제니까 출생의 비밀이 있었잖아.”
“아니, 그거 말고요. 외가 쪽으로. 어, 예를 들자면 제가 크로노스의 손녀라거나?”
이번에는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바뀐다. 아무래도 어디가 아파서, 심하게 감기가 걸리거나 해서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고 속으로는 이 자식 헛소리를 뭘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거지,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하다. 으음, 조금 쇼크다. 농담이 조금 섞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진심도 확실하게 섞여있는 데. 1할 정도.
“네가 크로노스의 손녀면 난 우라노스의 손자이게.”
“그럼 제 숙부가 되겠네요.”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카논이 벌컥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더불어 뭔가 중얼중얼거리는 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이 자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욕인 것 같지만. 격렬한 반응에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속말을 꺼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어 사라는 카논이 포기하고 그대로 떠나버릴 때까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다른 시간대에서 편지가 오던데 혹시 제가 크로노스랑 연관이 있어 무의식중에 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요?’라고 상담하려던 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참고로 자신의 방에 가서 펼쳐 본 편지는 텐마가 보낸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편지는 네 통 더 도착했다.
마지막 편지를 받은 날, 늦은 오후. 사라는 여전히 밀려드는 서류와 동료들의 박해 아닌 박해에 허덕이는 사가를 무시하고 서고로 돌아왔다. 걸음걸음마다 동료의 신음이 달라붙었지만 뭐, 가볍게 무시해줬다. 이제 와서 그딴 게 신경 쓰인다면 성역의 단련이 하잘것없었다는 증거다. 아직도 샤카를 무시하는 건 할 수 없지만 그거야 신의 반열에나 올라야 가능한 일이니 차치하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낮이 길어 서고는 아직 밝았다. 그럼에도 기울어진 태양이 실내에 길고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자주 쓰는 위에는 네모나 도려내진 빛 알갱이가 떠돌았다. 사라는 그 안에 자신이 받은 편지를 나란히 늘어놓았다. 모양도, 크기도, 재질도 전부 제각각인 종이 위로 동일하게 빛이 내려앉는다. 사라는 그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편지는 전부 다른 글씨체와 언어로 보내져 왔다. 감정을 못 하는 필적은 제쳐두더라고 사용된 언어만 무려 다섯 가지다. 그리스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내용도 중구난방이다. 일단 텐마가 보낸 편지(추정) 제외하고. 중국어로 쓰인 시는 그렇다 치자. 조금만 더 힘내자 하는 말도 괜찮다. 하지만 배고프다든지 뭐가 가지고 싶다든지 하는 건 뭐냐고. 게다가 유일하게 몰라 카뮤에게 해석을 부탁했던 러시아어로 쓰인 문장은 아름다운 어머니란 뜻이란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일단 사라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첫째. 이렇든 저렇든 간에 이 편지는 전부 텐마가 보냈다.
당연히 고민할 가치도 없는 가설이었다. 그도 그럴게 텐마가 굳이 여러 필체로, 여러 언어로 제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백만 보 양보해서 텐마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치자. 그래도 역시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텐마가 다섯 개 국어나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사라는 제아무리 동생에 대한 콩깍지가 두텁다 해도 객관성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둘째.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다.
설마 싶긴 한데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을 것 같고, 조금 긴가민가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찾아보면 이런 일 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예를 들어 어떤 여신의 이름을 가진 A씨라든가 세인트 중에서 유독 튀는 성격을 가진 D씨라든가 혹은 예상외의 누군가라든가 등등.
그렇지만 두 번째 가설 역시 첫 번째 가설과 비슷한 이유로 폐기되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세인트는 원래 머리보다 몸 쓰는 데 더 익숙한 족속이다. 그런 인간들이 적당한 내용의 편지―라기보다는 낙서―를 써 제 일거수일투족을 살핀 후 타이밍 맞게 제가 가는 곳에 놓아둔다? 그것도 열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도 안 되지. 이렇게 끈기가 필요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인트 중에 있을 리가.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있긴 있는 것 같다. 앞에서 말한 A씨라든가 D씨라든가. 다만 이 사람들이라면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안 하는 것 보니까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긴 한다.
셋째. 크로노스로부터 물려받은 힘(추정)이 폭주하고 있다.
이게 그나마 가능성 높은 얘기이긴 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능력이 갑자기 발휘된 끝에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건 지극히 왕도적 전개였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설정이라면 어지간한 건 다 어거지로 앞뒤를 끼어맞출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
가설에 망상을 조금 더해본다면 아마 처음에 텐마의 편지가 도착한 건 처음 생각했던 대로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일으킨 기적. 다만 일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힘이 제멋대로 자신과 인연이 있는―혹은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 쓴 쪽지를 가져왔다, 정도가 되려나. 같은 맥락에서 아름다운 어머니란 쪽지는 미래의 자신의 아이가 쓴 거로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이유는 미래의 남편이 러시아인이기 때문?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영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원래 미래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비록 저 아름다운이란 수식어가 매우, 엄청, 아플 정도로 의아하긴 하더라도.
“이건 또 뭐냐.”
생각에 잠겨있는 틈에 느닷없이 옆에서 뻗어진 팔이 종이를 하나 들고 갔다. 고개를 살짝 꺾어 뒤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카논이다. 사라는 멍하니 입술만 달싹여 그의 이름을 그렸다. 카논? 꺼질 것 같은 목소리. 들린 것인지 아닌 것인지 남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만 팔락였다. 약간 귀찮은 것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카논. 다시 힘을 줘 그를 부른다. 힐끗, 무기질적인 시선이 떨어졌다.
“이게 뭐냐니까.”
재촉하는 말이 어쩜 이리 열없을 수가. 사라는 두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대답을 할지 말지가 고민스러운 게 아니라 대답을 해줘봤자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게 고민스러웠기 때문에. 그도 그럴게 태도가 딱 ‘시답잖은 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일단 한 번 물어나 본다.’잖아. 음, 얄밉게시리. 그런 모습마저도 예쁘니까 두 번 얄밉게시리.
속으로 욕을 하는 사이 카논이 소파를 빙 둘러 맞은 편에 앉았다. 그 사이 테이블 위를 스캔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내 남자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분명 시답잖은 짓을 이번엔 좀 크게 벌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내버려 뒀다간 오해가 그대로 굳어질 것 같아 사라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의 피가 폭주하고 있다는 증거품?”
곧바로 그가 가당 차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직까지도 그 설정 밀고 있냐?”
설정 아닌데. 진심인데. 사라는 오래전 아이오로스의 행동을 설정으로 퉁치고 넘어갔던 과거를 후회했다. 진지하고 절실한 고민이 삽시간에 부정당하는 건 이리도 아픈 일이었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카논 덕분에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등장해준 건 고맙긴 했다. 때마침 궁금한 게 생긴 참이었으므로.
“카논.”
부름에 카논이 또다시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본다. 이 남자는 슬슬 이 얼굴이 베이스가 되어가는 것 같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주제에 벌써 저리 염세적이어서야, 참 큰일이다. 여기서 자신이 그보다 네댓살은 어리다는 사실은 넘어가고.
“시간을 조종하는 힘이 그렇게 굉장한 건가요?”
“굉장하지. 시간은 신의 영역이니까.”
즉답이 날카롭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세인트답지 않은 발언이다. 그것도 어지간한 신들에겐 불가능해. 아테나조차도 불가능하지. 오직 시간의 신 크로노스만 가능한 권능이다. 이어진 말들도 놀라움의 연속이다. 세상에, 아테나 광신도가 이런 말을 하다니. 다른 누가 들으면 맞아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네. 물론 그 전에 카논이 상대를 때려죽이겠지만.
“하지만 사가랑 카논도 차원에 관한 기술(어나더 디멘션) 쓰지 않나요.”
그것도 분명 신의 영역일 터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예전에 시온이 원래 차원에 관한 기술은 신이나 신의 대리인인 교황만 쓰니 어쩌니 했던 걸 들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아닌 사가나 카논이 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음 교황으로 부려먹으려고 가르쳐 줬던가 했겠지 뭐.
“공간 뿐이야. 시간은 무리다.”
“시간이랑 공간은 차원의 단계가 다를 뿐이지 같은 개념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어디서 들은 말로 대꾸해본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근거를 들어 설명은 못 한다. 얕고 넓은 지식의 폐해다. 더군다가 출저조차 물리학 책이 아니라 어딘가의 패러디 소설, 혹은 판타지 소설이다. 즉, 그냥 한 번 말해봤단 소리다. 바꿔 설명하면 사라는 뭔 멍멍이 나라 말로 짖냔 카논의 표정을 무시했단 소리가 되겠다.
사라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카논이 한 말이나 자신이 한 말이나 별다를 것도 없는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 모르겠다. 짬빱이 안되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 자신이랑은 사고체계가 전혀 다르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자신에게만―어색한 분위기에서 제일 좋은 건 말을 돌리는 거다.
“그, 저번에 비슷한 얘기가 나왔을 때 처녀궁에 있는 사라쌍수도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는 데 맞나요?”
억지로 말을 돌리려니 저도 모르게 요설이 돼버렸다. 다행히 카논은 분위기를 맞춰줄 줄 아는 남자였다.
“아마도. 자세한 건 뒤에 있는 주인한테 물어봐라.”
“네?”
내용은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황급히 몸을 돌리자 익숙한 금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초승달 같은 입술. 사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당신은 왜 기척도 내지 않고 다가오는 건가요! 물론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한데 그래서 더 심장에 나쁘다. 자신이 심근경색으로 죽으면 분명 이 남자 탓이다.
하나 그동안 계단 오르내리기(성역 등반)로 운동한 것이 헛되진 않았는지 몸은 재빨리 반응했다. 사라는 콤마 5초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1초 만에 테이블을 돌아 콤마 5초 만에 카논의 옆에 붙어 앉았다. 즉, 2초 만에 피난을 완료했다. 잠깐 시무룩한 샤카의 얼굴과 어딘가 뻐기는 카논의 얼굴이 지나간 것 같지만 무시하고. 언제 오셨어요. 일단 앉으시겠어요? 라는 뜻을 담아 손짓을 하자 샤카가 터덜터덜 걸어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얇은 어깨가 기분 탓인지 축 처진 것 같다. ……기분 탓 맞지?
음……. 사라는 망설이다 그를 불렀다. 샤카. 어이. 우연히도 카논과 목소리가 겹친다. 샤카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시선에 무언의 말이 잔뜩 함축되어 있었지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 의미는 뚜렷하지 않다. 샤카. 다시 이름을 부르자 얇은 입술이 겨우 벌어졌다.
“둘은 사이가 참 좋구나.”
뜻밖의 말에 사라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저런 말을 한 건 둘째치고, 사이가 좋다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누구랑 누구가 사이가 좋다고? 카논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 또한 자신을 보고 있다. 새파란 눈동자에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설마 나랑 얘가? 마음이 겹친 그 순간, 두 사람은 분명한 일심동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하데스조차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절절한 진심이었다. 다만 신에 가장 가까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뿐.
“과연. 이게 현실남매란 건가.”
“난 이딴 동생 둔 적 없다.”
“전 일단 사촌 오빠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아니에요. 그보다 누가 그런 말 가르쳐 준 건가요?”
물론 범인은 뻔히 짐작이 갔다. 사오리 씨 아니면 세이야겠지. 샤카한테 인터넷 상에서 쓸만한 단어를 가르쳐 줄 건 두 사람 밖에 없으니까. 캐릭터랑 어울리지 않는 말 가르치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나. 나중에 이상한 줄임말이라도 쓰면 내 정신건강에 큰일이라고. 물론 그 전에 남매 발언으로 충분히 크리티컬을 먹고 있지만.
일단 당면한 위기부터 극복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사라는 카논과 함께 열성적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작 물어보려고 했던 게 흐지부지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샤카란 이름의 마법인가, 이후 신기하게도 도착하는 편지는 없었다. 때문에 사라는 깊게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크로노스의 손녀 운운이 반쯤 농담이었기반쯤은 진담이란 말이 된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당초 일주일 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냥 누군가의 장난이었겠니, 싶을 뿐이었지. 하지만 사라는 몰랐다. 이 사건을 단순히 장난이라고 넘겨서는 안 되었다는 걸. 적어도 원인, 혹은 범인을 찾으려 노력했었어야 했다는 걸.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건 거기에 더해 열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 싸라기눈이 흩날렸다. 희다. 너른 수평선도, 어둑한 하늘도, 불쑥불쑥 솟아있는 장애물도, 시야에 비치는 것은 전부 순백. 소설에서나 접하던 설원의 모습에 사라는 무심코 한숨을 흘렸다. 그리 내뱉은 숨마저 금방 엉겨 결정이 되어 떨어진다. 놀랄만한 광경이지만 감탄보다는 절망이 더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느닷없이 맨몸으로 이 (외)딴 곳에 떨어져 버렸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궁금증이 먼저 일었지만 의문은 꾹꾹 눌러놓는다.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원인을 생각해봤자 별달리 효과가 없는 건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사라는 어딘가에 있을 대피처를 찾기로 하였다. 고된 여정이었다. 걸음마다 추위가 뺨을 때린다.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다. 눈물이 얼어붙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졸음이 너무 심하여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사라는 어떻게든 노력했다. 근데 진짜 너무 졸린 거 아닌가. 너무 추우면 도리어 잠이 온다더니 참말이구나. 이런 식으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생각하는 와중에도 정신은 이미 휴프노스와 타나토스의 손길을 따라가고 있다. 와, 이 쌍둥이 신이 이렇게 친절한 거 처음이야.
결국 사라는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몸이 눈밭에 절반 이상 파묻힌 것 같은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감각이 다 마비됐나. 무덤덤하게 상념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아무리 극한에서도 사람은 적응하고 생존한다지만 그거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에서지 이렇게 맨몸으로 던져진 상태에서가 아니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피난처를 찾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땅굴이라도 파서 몸을 숨겼어야 했는데. 하지만 너무 늦었으니까 후회다.
이대로 명계로 가게 된다면 약속했던 대로 미노스가 좋은 자리를 봐줄까. 왠지 어처구니없어하는 하데스나 쌍둥이 신이나 기타 등등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데. 이처럼 생과 사의 경계에서 태연히 생각할 수 있는 건 쥬데카를 하도 드나들었더니 생긴 폐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중에 산재 신청할 거야, 진짜. 인간으로서 기본이 안 되어가게 되잖아.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정신을 차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양판소에서나 나오는 흔한 서두 같았지만 그 외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타닥타닥 불티가 튀는 소리가 들린다. 시야 한구석이 환한 걸 보니 난로 같은 것에 불을 붙인 모양이다. 밝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해본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 고생을 했으니 당연하지, 라고 멋대로 생각했다가 몸 위에 두텁게 덮인 가죽을 보고 사라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보온에 엄청 신경 써줬네.
한숨과 함께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저릿한 느낌이 있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감각이 느껴진다.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나 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혹한에서 살아남다니. 강해졌구나, 나. 왠지 성역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눈물짓고 있는 기분이다.
자신의 꿈틀거림을 알아챘을까, 문득 머리맡에서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그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금발. 무심코 입속말이 새었다.
“……효가?”
평소 브라더 콤플렉스임을 자처하던 주제에 미묘하게 의문문이 되어버린 이유는 상대의 모습이 기억보다 훨씬 어렸기 때문이다. 달콤한 황금색 머리카락도, 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도 언제나와 같지만 저 둥근 뺨이라든가 하는 게. 끽해야 열 살 남짓일까. 세인트란 족속들이 대개 원래 나이보다 늙어, 아니 성숙해 보인다는 걸 생각하면 훨씬 어릴 가능성도 많다. 물론 그래도 효가는 귀엽지만. 근데 왜 어려져 있니.
‘아, 혹시…….’
증거는 모두 갖추어졌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 사라는 단박에 정답을 깨달았다. 사실 깨닫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답이 너무 명확했으므로.
‘카논, 저 진짜 크로노스의 손녀였나 봐요.’
설마 과거로 오게 되다니. 귀여운 동생들의 어린 시절을 실물로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럭키다. 카논이 들었다면 뭘 그렇게 여유롭냐고 볼을 몇 번이고 잡아당길 것 같은 발언이지만 어차피 못 들으니 상관없다. 애당초 텐마의 타임슬립부터 시작해서 별별 꼴을 다 겪었는데 고작 이 정도로 여유를 잃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고요. 하여튼 세인트들은 이상한 데서 상식적이라 문제다. 아아니,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라.
사라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던 상념을 싹뚝 자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효가가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상관 않고 돌진해서 조그만 손을 꼬옥 부여잡는다. 한 번 죽을 뻔했다 살아난 몸인지라 관절이 삐걱대고 온갖 근육이 아팠지만 그 정도는 동생을 향한 애정으로 극복한다. 세인트들의 근성론은 무리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다.
코앞의 조막만 한 얼굴. 항상 (일단 겉으로는)쿨함을 유지하던 n년 후와는 달리 아직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거기에 신선함을 느끼며 사라는 어린 과거의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효가. 누난 윤사라라고 한단다. 윤이 성이고 사라가 이름이야. 누나라고 불러주면 참 좋겠지만 그게 싫다면 사라라고 편하게 불러도 괜찮아.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정말정말정말 보고 싶었어. 후……. 진짜 왜 이렇게 귀엽니…….”
말을 쏟아내다 보니 마지막은 무심코 신음에 가까운 감탄이 되어버렸다. 므우와 아이오로스를 제외한 사람이 들었다면 다들 슬금슬금 피했을 것이 틀림없다. 특히 미로가. 대상이 효가였으므로 카뮤라면 한정적으로 동의를 해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얘네가 너무 귀여운 게 죄라고. 찬양하라고 한다면 몇 년은 할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다 사라는 문득 행동을 멈췄다. 정확히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효가가 참 어처구니없어하고, 당황스럽고, 부끄러워하고, 수상쩍은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친한 척할 사이가 아니지? 어떻게든 처음 만난 척한다고 만나서 반갑다는 소리를 하면 뭐하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자기 이름도 알고 갑자기 하악거리는 데, 효가가 아니라 세이야라도 당연히 경계할 상황이다.
“너, 도대체 뭐지?”
아니나다를까 효가가 바로 가시를 세운다. 그래 봤자 상대가 상대라 위협은 전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귀엽다. 사라는 (새삼스럽게)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사라 누나예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카뮤랑 친구라서 여러가질 들었거든.”
거짓말은 아니다. 지금이 아니라 조금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다만 사부바라기에게는 이보다 좋은 핑계는 없었다. 효가의 기세가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음, 말랑한 효가다.
“……그럼 이 앞에 쓰러져 있던 건?”
“카뮤를 만나러 왔다가 조난당했어.”
“그런 차림으로 왔다고?”
“카뮤가 항상 그런 차림이기에 나도 모르게 방심해서.”
이쪽은 거짓말이다. 그것도 뭔가 어설픈 거짓말. 그래도 계속 카뮤, 카뮤 들먹였더니 효가는 납득한 듯하다. 저 순진함은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니면 미래에 누나 이름 하나로 그렇게 무장해제를 해주던지.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음, 갑자기 질투가 나려고 하네.
“그럼 누나도 세인트?”
호칭마저 너에서 누나로 바뀌었다. 진짜 카뮤 부러워. 효가 너무해. 그렇지만 누나라고 불러줬으니 용서하기로 한다.
“아니, 일반인이야.”
그 인간 초월에 가까운 세인트들이 이 정도 추위에 쓰러질 것 같니? 하는 말이 덧붙여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는다. 솔직히 이쪽 시베리아 사제가 이상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더위·추위에 대한 감각은 보통인 것 같았으니까. 그보단 자신이 여자고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에서 세인트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 말도 역시 참았다. 상대는 미로가 아니라 효가인걸. 어, 근데.
“생각해보니 단순한 일반인은 아니네. 일단 성역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니까.”
“세인트도 아닌데 어떻게?”
“아테나의 눈에 띄여서……?”
뭔가 거짓말 아닌 거짓말의 수위가 높아져 가고 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효가가 너무 귀여웠으므로 사라는 지껄이는 걸 멈추지 못했다. 카뮤, 당장 와서 내 입 좀 얼려줘요. 물론 부질없는 가망이었다.
효가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사라의 말문은 막혔다. 절로 더듬거리고 적당한 묘사가 떠오르지 않아서 침묵을 자처했다. 그나마 모르겠다고 일축하지 않은 것도 귀여운 동생이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심한 몰골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의 친구인 카뮤는 제자 바보에, 보이는 것과 다른 열혈에, 제자만 얽히면 오랜 인연인 미로조차 질색할 정도의 달변가에, 이따금 멍청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주는 엉뚱한 인간이다. 하지만 효가가 바라는 건 쿨하고 멋지고 당해낼 자가 없는 물과 얼음의 마술사인 스승. 이 격차에 당황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와 봤자 사기꾼이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띄엄띄엄 이라도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주변, 그러니까 카뮤의 맨얼굴─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일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순진한 모브 1, 2, 3 등에게서 들은 게 있던 덕분이다. 훌륭하고, 대단하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런 모습들에 관한 시선. 솔직히 생각지도 않은 내용을 말하느라 입에 경련이 일어나긴 했지만 효가가 만족한다면 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사라는 어느 순간부터 효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떤 감탄사도 내뱉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철렁했다. 잠깐 말이 없는 것뿐이었다면 너무 감탄해서 아무 소리도 못 낸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여전히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면. 적어도 여태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였더라면.
하지만 효가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이고 안 그래도 조그만 어깨를 더욱 옹송그리고 있다. 주위를 감싸는 분위기가 먹구름 못지않게 칙칙하다. 효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동그란 가마가 움찔거렸다. 사라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효가. 보다 단호하게 부르려던 명칭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효가가 카뮤에게 온갖 마음을 바치듯 사라는 동생들에게 온갖 감정을 바친 지 오래이므로.
“왜 그러니?”
어설프게 흘러나온 문장은 그럭저럭 다정하였다. 언어에 담긴 진심을 알아챈 듯 효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무엇인지, 눈물만은 글썽거리진 않았으나 어린 얼굴은 어울리지 않게 절망의 색을 띠고 있었다. 온갖 빛을 투과하던 빙하의 눈동자가 지금만은 불투명하다. 안타까움에 사라는 손가락으로 괜히 붉은 눈가를 쓸어주었다. 효가가 어설프게 눈가를 찡그린다.
“카뮤는…….”
“응?”
“카뮤는 대단한 사람이지?”
당연하다며 사라는 고개를 잽싸게 끄덕였다. 무슨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뮤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부정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에게는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열둘 밖에 없다는 골드 세인트인 것도, 효가에게 진심인 것도 전부 대단한 거니까. 부모처럼 따르는 제자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렇고. 아니, 솔직히 애 앞에서 욕하면 제가 뭐가 되냐고.
그러나 예상과 달리 효가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침울해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스승을 그렇게 좋아하니 칭찬하면 당연한 얘기라면서 좋아 방방 뛸 줄 알았는데. 너무 일차원적인 사고였나. 하긴,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좋아할 내용이라면 굳이 저렇게 침울한 표정으로 물어볼 이유가 없긴 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효가?”
열없는 재촉에 아이가 결국 와앙 큰 울음을 터트렸다. 보석알처럼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히끅거리며 딸꾹질까지 하는 모습에 사라는 이마를 짚었다. 아, 이런. 내 동생은 우는 것도 귀여워. 물론 이런 사라의 감동은 다행히도 고민하는 것으로 비쳤을 뿐이라, 한번 감정을 토해낸 효가는 무리 없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카뮤, 는 그렇게 대단한데……, 히끅,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흑, 없고, 나약하, 고, ……아이작 처럼, 강하지도, 못, 하고, 너무 한심해서, 카뮤는, 그렇, 게, 아껴주는…, 데, 윽……, 나, 분명, 세인트, 못, 될, 거야…….”
아이작은 또 누구야. 아니, 이건 제쳐두고.
‘……그렇구나.’
사라는 효가의 태도를 손쉽게 이해했다. 자기혐오다.
한국에서 자란 데다 가정환경도 별로 안 좋았지만 사라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둔한 구석이 많았으므로 어지간한 것은 별것으로 넘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 성역에서 그 골드 세인트들 사이에서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사라조차도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자기혐오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원래 자기혐오란 놈은 별다른 일이 없을 때에도 곧잘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직 어리고, 뛰어난 스승이 있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사형제로 추정되는― 뛰어나다고 말하는 아이작이 옆에 있는 효가가 시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사실과 애처로이 여기는 것 역시 별개의 일이라.
“효가, 이리 오렴.”
사라는 두 팔을 벌려 동생을 촉구했다. 아직 슬픔에 빠진 아이는 뭣도 모르고 누나의 품에 안겼다. 적당히 서늘한 온기가 품에 한가득 찬다. 상당히 신기하였다. 자신이 살던 시간 축에서는 동생들이라고 해봤자 전부 저보다 훨씬 커서 이리 가둘 수도 없는데. 하기야 이리 순순히 안기는 것도 세이야와 슌 뿐이었지만. 시류는 조르면 그나마 들어주는 편이었고, 잇키는 절대 질색하는 쪽이었고, 효가는 그 중간 정도였으니 더더욱 신선하다.
고개를 살짝 갸울인다. 뺨에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닿았다. 효가.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면 응, 하며 물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가슴께가 점점 젖어 들었다. 딱 사라가 안타까워하는 만큼.
“혹시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를 알고 있니?”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작품을 물어보자 효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제아무리 삭막한 세인트 생활을 한다지만 이 유명한 동화를 모를 아이는 적겠지. 실제로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못생겨서 따돌림당하던 어린 오리가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다는 내용 정도는 어디서 들어봤을 법하다. 그게 왜? 그리 물어보기라도 하듯 효가가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한다. 사라는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눈꺼풀 안쪽에 세인트가 된 효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끼 오리는 훌륭한 백조가 되었지. 마찬가지란다. 너도 누구보다 뛰어난 시그너스가 될 거야.”
단순히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한 담담한 고백이다. 일반인인 사라로서는 미래의 효가가 세인트로서 얼마나 우수한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라는 들었다. 골드 세인트들이 효가와 다른 동생들에게 보내던 감사를, 다른 세인트들이 그들에게 보내던 찬탄을, 누구도 깎아내리지 못할 업적을. 여기가 자신이 살던 세계의 과거인지, 혹은 일종의 패럴렐 월드인지, 그것은 모른다. 하지만 사라는 장담한다. 효가의 가능성을, 반드시 도래하게 될 미래를. 너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그리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말이냐고 묻듯 효가가 간절한 시선을 보낸다. 잠깐 사이에 퉁퉁 부어버린 두 눈을 보며 사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여기선 가벼운 뽀뽀라도 해주고 싶지만 너무 나간 것 같아 참았다. 뜬금없지만 나름대로 참고 있는 거다, 이것도. 진짜로.
“그래, 진짜로. 다만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응?”
“그렇잖니?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될 수 있었던 건 결국 원래 백조로 태어났기 때문이야. 결국은 혈통에는 이길 수 없다는 소린걸.”
동화를 그리 염세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지만 이건 머리가 조금 굵어진다면 누구나 떠올리게 될 생각이다. 지금이야 위로가 필요하니 곧이곧대로 듣고 있다지만 본래의 효가라면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이건 빌어먹을 혈통 만능주의의 이야기라고. 뭐, 실제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백조가 되니 어쩌니 하는 것도 결국은 효가가 세인트가 되는 걸 전제로 한 것.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라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혈통을 타고나지 않아도 좋아. 백조 따윈 되지 않아도 좋아. 나도, 카뮤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보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의문에 의해 온갖 빛으로 반짝이는 푸름을 보며 사라는 빛접게 웃었다.
계속 의아했다. 왜 제게 이런 일이 갑자기 생기는 걸까.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일인 걸까. 그렇다면 왜 이때로 왔어야 했을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한들 바뀌는 것은 없을 터인데. 이 현실마저 덧없게 흐려질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혹,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정신을 잃을 것도 아닌데 눈앞이 가물거렸다. 효가의 얼굴이 아득했다. 느닷없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 예상대로라면 괜찮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효가가 놀랄까 걱정이지만 뭐, 타임 패러독스니 뭐니, 아니면 만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다만 마지막 말만은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라서.
“세인트든 아니든, 다른 무언가든 아니든, 효가 너라는 아이 자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저 울고 있는 너를 위해 여기 왔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천천히 눈을 뜬다. 어둑한 풍경, 익숙한 천장. 예상대로 성역에 돌아온 모양이다. 목적은 이뤘음에도 살짝 아쉬움이 남았다. 각막에 아직 잔상이 남아있는 듯하다. 가슴이, 아니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전부 아프다. 사라는 자신에게도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난 왜 소파에서 거꾸로 떨어져 있는 거야……”
이러니 온몸이 아프지.
덤 1.
“그런 이유로 너희의 어린 시절 사진이 필요해.”
“그런 이유는 도대체 무슨 이유야?”
“내 고생에 대한 보답?”
놀라울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라를 보고 세이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자신들의 누나라지만 이따금 보여주는 저희에 대한 집착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잇키도 슌한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라의 돌발행동은 전부 자신들에 대한 애정에 기반되어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싫은 건 아니었다.
동시에 지금의 사라에게는 무슨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일단은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세이야는 다른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대게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형제들이 어깨를 으쓱여 화답한다.
“고아원에 있을 땐 몇 장 찍었지만 남아있지는 않은데…….”
“그 외엔 찍을 틈도 없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다. 솔직히 저희 같은 처지에 사진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나마 찍을 틈이 생긴 건 최근이지만 다들 사진 같은 데 신경 쓸 성격도 아니고, 사라가 말하는 어린 시절에 부합하지도 않으니 제외다. 누나라면 지금 찍어서 줘도 좋아할 것 같긴하지만.
다만 저희 누이에게는 이 당연한 사실이 예상외였던 모양이다. 담담한 저희의 대화를 들으며 사라가 처절하게 절규했다.
“스승님들이 하나도 안 찍어줬어?!”
“아니, 마린이 그럴 리가 없잖아…….”
“노사는 그런 기기에 약해서…….”
“저희 스승님도 사진은 딱히…….”
세이야, 시류, 슌은 차례대로 사라의 소망을 부정했다. 덧붙여 그건 아니라며 효가도 부정했다. 정확히는 부정하려고 했다.
“카뮤는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누님.”
덤2.
“아아, 끊어져버렸네~”
신호는 약했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신히,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던 실이 지금 완벽히 끊겼다. 얼마나 고생해서 당기고 있던 건데 아깝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애당초 이쪽과 이어진 것도 이상하고 저쪽에 훨씬 많은 인연이 있었으니. 그렇더라도 조금 아까운걸.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어질 정도라면 나름대로 쓸만한 물방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생각해도 소용없으니까 다음 막으로 넘어가 볼까~”
아직 수단은 잔뜩 남아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악마(메피스토펠레스)는 미소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글이 엉망이네요.
최근에는 계속 기력이 없어 글을 못 씀 → 글을 안 쓰다보니까 엉망이 됨 → 글이 엉망이니까 더 기력이 없어짐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절실히 재활을 필요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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