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분명 1학년 체육제, 온갖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던 토도로키의 세계를 미도리야가 뒤집어엎어 버린 일. 벌써 2년이나 지났지만 토도로키는 그때의 일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했다. 흩날리던 얼음 조각, 흉하게 뒤틀린 손가락, 괴로움에 일그러지던 얼굴, 그러면서도 올곧게 부딪혀 오던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한, 날카롭고 나지막했던, 온갖 감정으로 가득 차 무거웠던, 절로 새어 나왔던 미도리야의 외침. 토도로키를 가두고 있던 벽은 그때, 어째서 이때까지 그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쉽고 너무도 예쁘게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단지 그날, 그 이유만으로 미도리야를 사랑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계기는 어디까지나 계기일 뿐, 사실 제대로 된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의! 힘이잖아!! 어쩌면 그저 입에 발린 말이 될 수 있었던 외침을 토도로키가 받아들인 것은 상대가 미도리야였기 때문이었다. 정직하게, 열정적으로, 상처 입어 너덜너덜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딪혀 왔으니까, 그런 미도리야였으니까 받아들였다. 미도리야였으니까 용서했고, 미도리야였으니까 사랑했다. 그래, 진부한 이유지만 토도로키는 단지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미도리야를 사랑했다.
운명의 사랑을 자각한 것은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토도로키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반박도 혼란도 없었다. 한번 깨닫고 나면 그 마음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처럼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고요하게 흐르는 강처럼. 온 마음을 다해, 나날이 깊어져 가면서.
허나 그렇다고 해서 토도로키와 미도리야의 사이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상은 여전히, 이전처럼 조용하게 흘러갔다. 조금 더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시선과 조금 더 진해진 망설임과 차가운 얼굴 아래서 조금 더 빠르게 뛰던 심장을 제외하면 이전과 모두 똑같았다. 스스로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음에도 담담함을 가장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절실함의 저변에 포기가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에게 고백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용기가 없는 것과는 달랐다. 그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자신은 이미 미도리야에게 수많은 기적을 받았다. 그러니 미도리야에게 더 이상의 기적을 바라면 안 된다고. 특별 따윈 바라지도 않아.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넘칠 정도니까. 이 마음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진심. 아주 약간의 거짓이 섞인.
3학년 여름, 토도로키의 마음은 아직 어느 쪽도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집보다도 익숙해져 버린 기숙사 현관 앞에서 토도로키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딱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클레스메이트들 보다 조금 일찍 등교하는 덕분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고, 이제는 너무 당연한 광경인 덕분이기도 했다.
아직 아침임에도 유리 너머로는 쨍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덥겠구나. 토도로키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직 초여름인데. 개성 덕분에 체온 조절이 가능한 자신에게는 영 쓸모없는 걱정이었으나, 무심코 푸념조가 되어버린 것은 필시 누군가의 탓이다. 기실 토도로키는 모든 일에 있어 그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모든 일에 있어 그를 연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게 옳겠다. 매우 당연하게 떠올리고, 매우 당연하게 그리워했다. 지금 그리 하듯.
“……보고 싶다.”
무심코 걸쭉한 마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토도로키는 제풀에 놀라 볼 안의 살을 짓씹었다. 말하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했으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부디 이 정도는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제아무리 억누르고 억눌러도, 마음이 흘러 넘쳐버려서 이따금 포기해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었으므로.
문득, 위층의 소음에 가벼운 발소리가 섞였다. 탁, 타닥. 귀에 익은 불규칙. 돌아보자 녹색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거듭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어려보이는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진다.
“토, 토도로키 군! 미안, 내가 늦었지?”
가까이 다가온 미도리야가 희미하게 숨을 헐떡였다. 필시 열심히 뛰어온 탓을 터다. 제가 좋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별로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상냥하고 소심한 구석이 있는 미도리야에게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해서 토도로키는 위로 대신 선의의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아니, 나도 방금 내려왔어.”
히어로 지망생으로서 거짓말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성실한 이이다라면 아무리 선의라도 거짓말은 좋지 않다고 말할 것이고 아이자와라면 합리적 허위라며 어느 정도의 범위 안이라면 괜찮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거짓말이 나쁘다는 인식은 있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지만, 성미에 맞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행이다. 미도리야가 이리 말갛게 웃어주므로 토도로키는 당분간 자신이 거짓말을 멈출 수 없을 거란 걸 알았다.
이제 갈까? 미도리야가 제안했고, 토도로키가 답 없이 문을 열었다. 당연한 듯 겹치는 걸음이 기뻤고, 때로는 버거웠다.
이렇게 같이 등교를 시작한 건 2학년이 되기 얼마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크게 차이가 나던 등교 시간이 어느 순간부터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토도로키가 의도한 부분도 있었고 미도리야가 의식한 부분도 있었다. 온갖 이유를 붙일 여지가 있는 부분이었으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여하튼 토도로키는 이렇게 미도리야의 아침 시간을 독점하는 것만으로 과분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아직 초여름인데 덥네.”
걷던 도중 혼잣말처럼 미도리야가 중얼거렸다. 아까 제가 했던 생각이라 설핏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열 중 여덟아홉은 그리 생각할 터인데 서로 같은 걸 떠올렸다는 것만으로 기뻐서. 덕분에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 토도로키는 그렇군,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은 원래 이런 태도가 보통이다. 덕분인지 미도리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어느새 다음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고 있었다.
감정이 금방 얼굴에 나오는 덕분인지 짧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미도리야의 표정이 데굴데굴 몇 번이나 바뀐다. 커다랗게 깜빡이는 눈동자, 열심히 움직이는 입술.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편안하고, 심장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운다. 이전까지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걸 귀찮아하고 있었을 텐데. 그리 생각하면 사랑이란 건 정말 이상하고 대단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잘 웃게 됐네. 누나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분명 1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래? 여상스럽게 대답하려 했지만 사실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야. 약간은 야유하듯, 약간은 장난스럽게, 즐거워하던 누나의 목소리. 갑작스럽게 지적당한 사실에 당황하던 토도로키는 누나가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랬다. 자신들에게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행복의 광경을 찾아준 것도 역시 미도리야였다.
생각에 취해 반쯤은 멍하니 미도리야를 바라보던 토도로키는 문득 둥근 뺨 위로 땀이 한줄기 흘러내리는 걸 알아챘다. 햇살이 살갗을 따끔하게 찔렀다. 아, 덥다고 했지. 새삼스레 그 말을 떠올리고, 토도로키는 잠시 생각하다 오른쪽 개성을 약하게 사용했다. 훅, 주변의 온도가 떨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주 약간이다. 약간일 텐데, 너무도 당연하게 미도리야가 이쪽을 쳐다봤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동자가 이내 웃음으로 가늘어진다.
“고마워.”
타의도 없는 순수한 미소. 단지 그것뿐이라면 좋을 텐데.
“토도로키 군은 정말 상냥하네.”
네가 그러니까, 속에 숨겨놓은 욕망을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구하게, 단지 올곧은 믿음으로, 별무리처럼 반짝이며,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눈부시고 사랑스러워서. 덕분에 토도로키는 퉁명스레 별로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귓가를 숨기는 게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교실까지 얼마 남지 않았던 곳에서 그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적과도 같은 둘만의 시간도 교실에서라면 금방 끝나버린다. 평소라면 아쉬워했겠으나 지금의 토도로키에게는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아무튼 심장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간신히 도착한 교실은 아직 고즈넉했다. 텅 빈 공간, 두 사람만의 발소리.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던 미도리야가 무심히 뒤돌아본다. 찰나를 쪼개놓은 아주 짧은 시간, 시선이 맞았다. 쿵쾅, 피가 흐르는 소리가 자신을 덮친다. 토도로키는 다시금 제멋대로 오르려고 하는 체온을 억눌렀다. 열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휘젓는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하다. 자신이 미도리야를 좋아하는 것도, 그로 인해 일희일비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하나로 자리 잡아버렸는데. 그런데, 왜. 어째서 이제 와서 크게 동요해버리는 걸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넘기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마음을 다잡는 게 그리 어려웠던 적도 없었는데.
어쩌면 초여름의 열기 탓인지도 모른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에 신체가 따라가지 못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아니라면 도무지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손끝에 습기가 엉겨 붙었다. 무언갈 만지면 축축하게 묻어나올 것처럼. 새삼스러운 긴장이었다. 목이 타고, 무언가가 그리 간절해졌다. 정신 차려. 스스로를 타이르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귀로 밀려들어 온다. 어느새 교실은 클레스 메이트들로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다. 미도리야의 자리도 역시. 작은 영웅의 주위로 당연한 듯 모이는 무리, 자신 외에게도 흩뿌려지는 미소. 단절된 채 반짝이는 공간. 지금이라면, 아니 언제라도 저 사이에 끼어들면 미도리야가 반갑게 맞아줄 것을 안다. 하지만 토도로키는 그리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아스라이 시야가 멀어진다. 토도로키는 그날 내내, 물속에 잠겨, 단지 예감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홀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 이제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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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809자
다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진도가 안 나가서 일단 상편.
이키모노가카리의 123~恋がはじまる~를 듣고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나...orz 저는 새콤달콤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