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이름이 불려 토도로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돌리니 미도리야가 불쑥 얼굴을 들이대고 이쪽을 살피고 있다. 그 뒤로 시끌벅적 가방을 챙기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들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하교 시간이 된 모양이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리커버리 걸한테 갈까?”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에 토도로키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사실을 말할 수 없으므로 담담하게 적당한 변명을 지어낸다. 미도리야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럭저럭 수긍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바로 말해줘. 그래도 결국 한마디가 덧붙었지만.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돌아갈까. 제법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며 가방을 챙겼다. 미도리야는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문득 생각하니 이이다의 모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담임에게 불려갔던가. 위원장의 편리함을 잘 알고 있던 아이자와는 사양 않고 이이다를 부려먹곤 했으므로 이런 일은 곧장 일어났다. 경험상 일이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미도리야와 둘이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군.”
“응?”
“아무것도 아냐. 가자.”
예고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 미도리야가 당황해하며 뒤따라왔다. 심히 허둥대는 기척. 필시 땀을 흘리면서도 이쪽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겠지. 그 광경을 상상하며 토도로키는 부풀어만 가는 심정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단둘이라는 걸 기뻐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게 틀림없다.
밖으로 나오면 다시 열기와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교내는 냉방이 되고 있으므로 차이가 불필요하게 크다. 덥네. 버릇처럼 미도리야가 중얼거린다. 아아. 토도로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잠깐의 단절. 아침과 비슷한 대화인데 아침과 달리 어색함이 감돌고 있다. 원인은 필시 자신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오늘 자신이 굉장히 이상했다는 자각이 있다. 어딘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고 원래 능숙하지 않았던 대화마저도 뚝뚝 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미도리야를 접할 때만 과민하게 반응해, 주변에서 싸우기라도 했냐고 걱정까지 끼쳤다. 다행히 미도리야는 그저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정도로 생각해주는 모양이지만.
저기. 눈치를 살피며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걸려온다. 잠깐 편의점 들렀다 가지 않을래? 조심스러운 것은 미도리야 답지만 어미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다. 깨지기 쉬운 물건을 정중하게 다루는 듯한 태도는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몸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토도로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보잘것없는 말 한마디에 어쩐지 미도리야가 기뻐해 주는 것도 같았다.
유에이 학교와 기숙사는 당연히 인접해 있기에 편의점에 가려면 오히려 돌아가야 했다. 그래 봤자 몇 분, 아주 잠깐의 유예인데. 그럼에도 토도로키는 언제나 그 찰나의 시간을 즐겼다. 아직 높게 걸린 여름의 태양. 담벼락과 나무 그늘만을 골라 밟으며 나누는 실없는 잡담. 뜨거운 아스팔트와 몇 개의 횡단보도로 이루어진 여로.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남는 것들.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미도리야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뛰쳐들어갔다. 허나 오른손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채다. 어서 들어와. 무언의 초대를 받아들여 토도로키는 한 발짝 움직였다. 미도리야가 완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도 오른손을 움직인다. 그 탓에 살짝, 손과 손이 닿았다. 한 호흡이 멈추고, 움직임도 멈출 뻔하고, 그것뿐이었다. 잠깐의 접촉을 미도리야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고 토도로키는 모르는 척했다.
차가운 공기에 땀이 빠르게 식어간다. 긴 시간 동안 용케도 바뀐 적 없는 아르바이트생이 퍽 친근하게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미도리야 역시 친밀하게 답을 되돌린다. 토도로키는 건성으로 눈짓만 던진 뒤 성큼성큼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허둥지둥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대충 뭘 살진 알았기에 형형색색으로 전시된 음료수 코너 앞에서 멈춘다. 옆까지 따라온 미도리야도 걸음을 멈추고 고민한다. 음, 그러니까……. 그게 그건데 저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평소의 습관대로 아랫입술을 부여잡고 중얼중얼하는 꼴이 퍽 진지하다. 고작 음료수 하나에. 어처구니없음에도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게 사랑의 콩깍지라 토도로키는 비긋이 웃고 말았다. 그걸 또 용케 알아채고 미도리야가 이쪽을 바라본다. 토도로키 군은? 글쎄. 심드렁히 대답하며 토도로키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기실 토도로키는 입맛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별다른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게 옳다. 굳이 고집하는 게 있다면 어릴 적 어머니가 사주시던 음료수 정도지만, 그것도 맛 때문이 아니라 추억 때문이다. 제아무리 많은 종류의 음료수가 있더라도 그것이 토도로키에게 의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할까. 무심하게 진열대를 쳐다보던 토도로키는 문득 한 점에서 시선을 멈췄다. 작은 병에 들어있는 옅은 하늘색 음료수. 맘을 정하고 그것을 꺼내면 미도리야가 웃었다. 그거 맛있어. 응. 토도로키는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이전에 미도리야가 맛있다고 말했던 사실을 토도로키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그걸로 할까.”
같은 것을 꺼낸 미도리야가 평소와 달리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 쌍이네. 음료수병을 들어 보이는 모습이 참으로 의기양양하다. 아아. 토도로키는 긍정했다. 한 쌍이다.
계산대에 똑같은 음료수를 올려놓는 건 왜인지 굉장히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물건을 확인한 점원도 쿡쿡 웃는다. 두 사람 정말 친하네요. 뜻밖의 말에 토도로키와 미도리야는 무심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먼저 수긍한 사람은 미도리야였다. 네! 친해요! 정말로 기쁜 듯이. 괜히 이쪽까지 간질간질해지게.
“하긴. 언제나 함께니까요.”
점원이 중얼거렸다. 순간, 토도로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필시 의미 없는 말이었을 터인데 마치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이 어루만져진 것 같아서. 언제나 함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미도리야의 특별한 존재로서. 그러한 것들을 전혀 바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거짓말을 짓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토도로키는 그러한 것을 알고 말하는 거냐고 상대에게 물을 수 없었다. 그것을 묻기엔 너무 이상했고,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어금니를 한 번 깨무는 사이 내밀어진 당연한 인사가 괜히 축객령처럼 느껴져 토도로키는 우물거리다 편의점 밖으로 걸음을 향했다. 옆에서 미도리야도 종종걸음으로 보조를 맞춘다. 안녕히 계세요오. 미도리야의 조그만 인사가 허공에서 꼬리를 끌다 사그라들었다.
밖은 여전히 더웠다. 잠깐 사이에 기온이 그리 빠르게 떨어질 리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 다만은. 괜히 머쓱해져 토도로키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하지 않은 단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끈적끈적, 깔끔하지 못하게 아직 입안 어딘가에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저기……. 침묵 속에서 미도리야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른다. 아직 음료수 뚜껑도 열지 못하고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채로. 둥근 뺨이 이상할 정도로 붉다.
“우, 우리, 그렇게 함께였던 걸까……?”
“……뭐어.”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이다와 함께 셋이 있는 일이 제일 많았으나 둘만 있는 일도 적진 않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서로가 서로를 찾는 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토도로키는 사랑 때문에, 미도리야는 아마 습관과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새삼 깨달은 것인지 미도리야의 안색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 이리저리 바뀐다. 기뻐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단지 당황하는 것뿐인지 잘 모르겠다. 물어보면 답이야 쉽게 나오겠지만 토도로키는 관뒀다. 다른 말이라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데 싫냐고 묻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무섭다. 토도로키는 무의미한 충동을 참아내려 남아있는 음료수를 전부 한입에 마셔버렸다.
“……그건 그렇다 쳐도 우리 일을 잘도 알고 있군.”
저 녀석. 분풀이를 하듯 짓씹어 내뱉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도리야가 어색하니 웃었다. 그야 오,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어째서 의문형이야.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토도로키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햇수로는 3년, 실제로는 2년 조금 넘는 기간. 하굣길,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자주 들렸던 편의점. 꼭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깊은 교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대가 당연한 듯 자신들의 일을 언급할 정도로.
3년인가. 토도로키는 감개무량하게 중얼거렸다. 응. 3년이네. 미도리야 역시 중얼거린다.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 쇠약해, 토도로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도리야? 이름을 부르자 미도리야가 튕기듯 이쪽을 올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있고, 눈가가 아플 정도로 빨갛다. 마치 울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의 얼굴이 딱딱히 굳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목소리론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은 분명히 의문을 그렸다. 미도리야가 황급히 양팔을 파닥거린다. 아, 아니! 벌써 3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달까, 그동안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괜히 뭉클했다고 할까, 그, 그런 거야! 쏟아지는 변명, 변명, 변명. 끝에서야 미도리야는 간신히 진심을 내놓았다.
“그, 그리고 토도로키 군이랑 이렇게 지내는 게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타까워서…….”
이번에는 토도로키가 당황할 차례였다. 갑자기 왜. 그러나 생각해 보면 미도리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반년. 그 후로는 모두가 졸업을 하고, 사무소에 들어가고, 프로 히어로가 되어 각자의 길을 걷겠지. 당연하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고, 몇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토도로키는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미도리야의 특별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꿈꾸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가슴 깊은 곳에 재워놓기만 했다. 전부, 전부 포기했다. 그랬는데 어째서 앞으로도 당연히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어찌 제가, 감히.
입술을 꾸역꾸역 움직였다. 자신이 아는 모든 말들이 날뛰었다. 원망을 내쏟고 싶었다. 허나 토도로키는 차마 그러지조차 못했다. 그리하여 노력 끝에 겨우 하나의 문장만이 완성되었다.
“졸업하면……, 더는 너와 있을 수 없는 건가?”
“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바로 이해 못 했는지 미도리야는 일순 멍하게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였다.
“서, 설마!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걸! 직장이 가깝다면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있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 연락만 하면 바로 만날 수 있어! 무, 물론 토도로키 군이 싫지 않다면 그렇단 소리지만……!!”
“싫지 않아.”
토도로키는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뚝, 미도리야의 입술이 멈췄다. 놀란 듯, 안도한 듯. 그러한 표정마저 금방 스르르 풀린다. 응. 연삽하게 웃는 얼굴이 어째서 평소와 같을까. 아직도 남아있는 원망을 꾹꾹 누른다. 미도리야는 언제나, 언제나 토도로키의 인내를 알아채지 못했다. 모든 건 이미 닳고 닳아, 더 이상 닳을 부분도 없는데.
미안, 내가 이상한 말을 해서……. 아니. 나도 미안. 인내가 거듭 필요했다. 담담한 대화 아래서, 토도로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단 한마디의 말에 커다랗게 파문이 번져나간다. 이제는 스스로 막지 못할 정도로.
이제 와서지만 토도로키는 자신이 어째서 오늘 그토록 이상했는지 알았다. 포기라는 이름 아래,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묻어버리려고 했던 감정들은 이미 깨닫고 있던 것이다.
이제 곧, 여름의 끝이 온다고.
-
공미포 4335자
말씀을 안드렸는데 이 소설은 토도로키가 삽질하는 (것 같은) 소설입니다. 아마. 분량이 왜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