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잔등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차 있다. 우와, 큰일 났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쏟아질 모양이었다. 진짜 큰일이다. 다급해진 코난은 신간 미스터리 소설을 품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비에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심한 비가 아니라 이슬비 정도였기에 쫄딱 젖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차라리 어디 가게에라도 들어가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걷고 있던 곳은 주택가라 적당한 가게가 눈에 띄지 않았다. 달리 비를 피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남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가사 박사님의 집까진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저 앞에 있는 집 정원을 가로질러 통과하면 고작 5분.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코난은 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정원으로 뛰어들었다.
최대한 비를 피하기 위해 관목 밑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났다. 나무에 조그만 꽃이 피어있었으므로 그 향기일지도 모른다.
어딘지 낯익은 향기에서 문득 봄을 깨닫고 코난은 숨을 크게 삼켰다. 가슴 속이 크게 울렁거렸다. 무심코 다리가 멈출 뻔했다. 간신히 참고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코난은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들떠서 무얼 어쩌려고.
나무 밑에서 빠져나오면 예쁜 정원이 나타났다. 그리 크진 않지만 잘 정돈되어 있다. 바닥엔 돌을 깔아 길을 만들었고 주변에는 빈틈없이 화초를 심어 놨다. 지금은 3월 초라 아직 여린 잎사귀밖에 보이지 않지만 4, 5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난다는 걸 코난은 알고 있었다. 아직 쿠도 신이치였을 때 어머니가 몇 번이고 예쁜 정원이라 감탄해 몰래 보러 왔던 게 기억에 선명하다.
그 정원 한복판에 우산을 쓴 누군가가 있었다.
우아한 모습의 노부인이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깨끗한 은색인 걸로 봐서 나이가 상당할 텐데 아직도 자세가 곧고 바르다. 주름진 얼굴은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소녀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머니가 나이를 먹고 차분해지면 이런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다.
딱 시선이 마주쳐 코난은 놀라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처음엔 당황하던 그녀가 이내 상냥하게 웃었다.
“어머, 어린 손님이 찾아왔네요.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갈래요?”
“……어, 아니. 저는…….”
평소에는 준비하지 않아도 술술 말할 수 있으면서, 이럴 때만 혀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멍청하게 우, 라든가 아, 하고 신음만 흘리고 있자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사라진다.
“그러지 말고. 아이참, 이렇게 젖어서는.”
따뜻한 손이 자연스럽게 등을 떠민다. 말투는 친절한 권유인데 행동은 거의 강요에 가깝다.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코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밀어붙이는 것에 약할지도 모른다.
노부인은 수건을 건네주고 바로 주방 쪽으로 갔다. 아마 차라도 대접해 주려는 것일 터다.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코난은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다. 외관과는 다르게 의외로 마이페이스일 지도 모른다. 거기서 코난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떤 대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 조금 가슴이 아팠다.
집안은 정원과 마찬가지로 잘 꾸며져 있었다. 가구도, 장식물들도 전부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우아하고 정갈하다. 마치 영화 속에나 나오는 외국 귀족의 저택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곳곳에 있는 화분이다. 척 봐도 상당한 수란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거실 한쪽에는 미니 온실도 있다. 실내라 더 따뜻해서 그런지 꽃을 피운 화분이 많다. 심지어 거실 테이블 위에도 손질된 꽃이 늘어져 있다. 저건 꽃꽂이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곧 노부인이 트레이에 차와 쿠키를 담아서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홍차를 받았다. 한 모금 마시니 몸 안에 온기가 퍼졌다. 코난은 그제야 자신이 꽤 추워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꽃이 참 많네요.”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그녀가 입가를 가리고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예에. 늙은이의 보잘것없는 취미랍니다.”
그녀의 말에 코난은 으응,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원예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간단한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정원만 해도 그렇다. 매년 그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어지간한 노력가지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 엄청 대단한 걸! 나라면 분명 이렇게 예쁘게 못 키웠을 거야.”
“어머, 고마워요.”
그녀가 솔직하게 기뻐한다. 덕분에 코난까지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그때, 문득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그녀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꽃을 한 송이 집어 들었다.
“그래. 귀여운 손님에게도 조금 나눠줄까요?”
“에? 아니, 그러면 미안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의 표시로 제가 주고 싶을 뿐이랍니다.”
“………….”
뭘까 이 데자뷔. 감각이 지독히도 익숙하다. 어쩐지 현기증이 나 코난은 소파 위로 털썩 무너져 내렸다. 역시 자신은 이런 타입에 약한 것 같았다.
*
그리하여 거대한 꽃다발과 우산을 선물 받아온 코난을 보고 스바루는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이런. 한발 먼저 봄을 전해주러 온 건가요, 코난 군?”
말투도 미소도 평소와 같지만 어딘가 장난기가 느껴진다. 질 나쁜 어른의 반응에 코난은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어쩌다 보니 얻었을 뿐이야.”
알기 쉬운 토라짐에 남자가 쓴웃음을 짓는다. 내심 어린애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화가 나는 것 같아 코난은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스바루를 지나쳐 거실로 갔다. 등 뒤로 스바루가 느긋하게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쨌든 나쁜 것은 스바루지 꽃이 아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미안하므로 코난은 일단 꽃병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든 아버지든 꽃다발을 사거나 받는 일이 많았으므로 찾아보면 한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둘 건가요?”
뒤를 돌아보자 기분 탓인지 스바루가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코난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돼?”
확실히 ‘아카이 슈이치’가 꽃을 애지중지 돌보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오키야 스바루’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전에 살던 빌라에서는 ─역할에 충실한 거였겠지만─매일 아침마다 주인도 돌보지 않는 화단에 물을 주지 않았던가.
“안된다기보다는…….”
적당한 단어를 찾는 것처럼 스바루가 말끝을 흐린다. 코난은 일단 꽃병을 찾는 걸 포기했다.
“탐정 사무소에 가지고 가지 않는 건가요?”
“응, 가져가 봤자 아저씨는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란 씨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코난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도 받은 거라지만 일단 자신이 란에게 꽃다발을 주는 듯한 형태가 되면 조금 그렇다. 특히 자신의 진짜 마음을 자각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꽃, 너무 커서 둘 곳도 없을 것 같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뱉어보지만 이 남자는 이런 것에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옆집에 준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요. 아가사 박사님도 그녀도 싫어할 것 같지는 않군요.”
“………….”
그 선택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간신히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코난은 경악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자연스럽게 꽃다발을 스바루에게 가져왔다니. 단순히 이곳에 두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건 쉽지만─
크게 동요하는 자신을 보고 스바루가 눈높이를 맞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렇게까지 몰고 간 것은 본인이면서 엄청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맛없다.
“그렇게 당황할 건 없어요. 단지 꽃 종류가 종류라서 조금 착각해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요.”
“……종류?”
무언가 의미라도 있는 걸까. 골라준 건 전부 그녀라 의미가 있더라도 코난은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
“예. 튤립, 팬지, 안개꽃, 목련, 베고니아.”
능숙하게 남자가 꽃의 이름을 읊는다. 조금 의외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꽃말을 대충 말하자면 사랑의 고백, 나를 생각해주세요, 사랑의 성공, 사모, 짝사랑이 되겠네요.”
“……에?”
스바루가 싱긋 웃는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목덜미가 화끈하다. 입술은 멍청하게 벌어진 채로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고른 건 내가 아닌데. 나는 그저 받은 것뿐인데. 꽃말 같은 건 하나도 몰랐는데. 그런데─
“이건 전부 우연인가요, 코난 군?”
아니면,
Is this a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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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182자 예상보다 길어졌다.
꽃 굉장히 좋아하기에 즐겁게 썼다. 받으면 정말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받고 싶은 선물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