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야는 진학문제로 담임선생님에게 불려 간 텐마와 잇키, 아론을 기다리며 다른 소꿉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얘기라고 해도 어차피 시간 때우기므로 대부분이 실없는 잡담이다. 실제로 세이야는 중간부터 제대로 얘기도 듣지 않고 적당히 대꾸만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슌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세이야는 교실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수업을 마친지 벌써 50분. 시간이 꽤 흘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집에 갈걸. 하지만 늦을 수도 있으니 먼저 가란 텐마의 말을 듣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자 사샤와 슌의 목소리가 멈췄다.
“왜 그래, 세이야?”
지나치게 걱정이 가득한 사샤의 목소리에 세이야는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 텐마가 좀 늦는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론 오빠도 아직 안 오고.”
사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세이야는 내심 안도했다. 소꿉친구들, 특히 사샤와 슌은 상냥한 만큼 걱정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러다 언제 한번 울려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때문에 세이야와 텐마는 항상 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담이 오래 걸리는 걸까.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사샤랑 그런 얘기를 하던 세이야는 문득 슌이 아무 말이 없는 걸 알아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뭔가를 굉장히 고심하고 있다. 슌?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녹색 눈동자가 강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세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엥?”
갑자기 슌이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덕분에 세이야는 무심코 이상한 목소리를 흘려버렸다.
“세이야는 왜 텐마보고 형이라고 안 불러?”
“………엥?”
느닷없이 무슨. 세이야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만 깜빡였다. 허나 의외로 슌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던 듯 이쪽을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사샤도 마찬가지다. 소꿉친구들의 압박에 가까운 시선에 세이야도 그제야 심각하게 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하니까, 이미 버릇이 되었으니까. 아주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이유.
확실히 아주 어릴 적에는 형이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단편적으로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이야는 텐마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텐마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어영부영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더라. 그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어린 시절 일이니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싸움이 원인이겠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기에 세이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슌이랑 사샤도 텐마라고 부르잖아.”
“그건 친구니까 그렇고. 형에게는 제대로 형이라고 부르는걸.”
“그래. 형제인 세이야와는 달라. 나도 오빠에게는 제대로 오빠라고 부르고 있어.”
“큭…….”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다. 세이야가 우물쭈물하는 데 갑자기 교실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보인 건 교사인 사가다.
“너희, 아직 안 돌아가고 있었나.”
말투는 딱딱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럽다. 사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세이야들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교사와 학생이기 이전에 오랜 지인이다. 허물없는 사이, 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다. 특히 세이야에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슌과 사샤도 그저 싱글싱글 웃을 뿐이다.
일단 텐마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간단하게 설명하자 너무 늦게 돌아가지 말라는 가벼운 잔소리만 남기고 사가가 몸을 돌렸다. 그때, 세이야의 머리에 문득 스치는 게 있었다.
“사가!!”
부름에 사가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그제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아무도 없는데 어때, 라며 세이야는 속 편히 넘겨버렸다. 다행히 사가도 같은 생각인지 별다른 말이 없다.
“카논은 사가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
느닷없는 소리다. 푸른 눈동자에 의문이 한가득 떠오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착실히 대답해 주는 게 이 사가라는 남자다.
“보통은 그냥 이름으로 부른다만…….”
갑자기 왜? 라며 의아해하는 사가를 내버려두고 세이야는 소꿉친구들을 향해 가슴을 폈다. 원하는 답이 나왔기에 거리낄 게 없다.
“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카논도 그러잖아. 이름으로 불러도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세이야도 참…….”
못 말리겠다는 듯 사샤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이야는 의기양양했다. 그 기분도 슌에게 사정을 들은 사가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말에 바로 곤두박질쳐버렸지만.
“아니, 나와 카논은 쌍둥이니 네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엣.”
당신만은 믿었는데!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사가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렇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세이야의 원망은 더더욱 깊어졌다. 슬쩍 슌과 사샤를 보니 이쪽도 그럼,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걸 진퇴양난이라고 하던가.
어떻게 해야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세이야는 고민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봤자 방법 따윈 없다. 허나 다행히도 신은 아직 죽지 않아, 세이야에게 마지막 구명줄을 던져주었다.
“미안, 좀 늦었지. ……근데 뭐 하고 있는 거야?”
때마침 돌아온 텐마가 교실 안의 미묘한 공기를 읽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순간이지만 모두의 시선이 텐마에게 집중된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세이야는 그 틈을 읽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절대 활로를 놓치지 않는 기적의 페가수스는 고마운 자신의 형제를 데리고 그 즉시 튀었다.
등하교를 할 때는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했다. 자전거는 하나뿐이므로 형제가 번갈아가며 운전한다. 이번엔 텐마의 차례다.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 텐마의 뒤에서 세이야는 얌전히 형의 등을 바라보았다. 주변 풍경이 흔들흔들 지나간다. 머릿속에는 아까의 대화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체격과 용모가 똑 닮았기 때문인지 세이야와 텐마는 종종 쌍둥이로 착각되곤 했다. 그렇지만 텐마가 형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설령 본인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더라도.
2년, 2년이다. 세이야와 텐마 사이에 있는 것. 이렇게 말로 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시간의 무게. 세이야 쪽에서 보자면 고작,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하지만 텐마 쪽에서 보면 어떨까. 텐마도 과연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역시 제대로 형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텐마.”
“응?”
“텐마도 형이라고 불리는 쪽이 좋아?”
텐마가 살짝 고개만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명백한 의문의 시선에 세이야는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얼핏 텐마가 쓴웃음 짓는 기척이 났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됐어,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고.”
그런가, 하고 세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텐마의 목소리가 밝았으므로 저 말이 진심이라는 데는 의심이 없다. 하지만 세이야는 찝찝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골목 너머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흐리게 번져가는 주홍. 예전에 저 색이 자신들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얘기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아론이나 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이야 자신보다 텐마의 눈이 훨씬 선명한 노을 색이다. 이렇게나 닮았으면서도 이렇게나 다른 자신들.
세이야는 불쑥 입을 열었다.
“텐마 형.”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자전거 체인 소리만이 끼릭끼릭 시끄럽게 침묵을 가른다.
한 박자 뒤, 형제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어색하잖아.”
“그러게.”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며 세이야는 장밋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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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869자
장난 외에 형이라고 말하는 세이야는 어쩐지 잘 상상이 안됩니다(웃음)<
모처럼 나왔으니 사가 얘기를 하자면 교사입니다. 담당 과목은 수학이나 역사, 아무튼 까다로운 걸로. 아이오로스는 체육< 무인 연소조는 다들 고등학교 동창이지 않을까요. 대학과 학과는 전부 다르지만 사이가 좋다거나(정해놓은 게 없어서 전부 추측형) 로캔 쪽은 잘 모르겠는데 레굴루스는 전학생이라거나? 시지포스랑 레굴루스가 사실 텐마와 먼 친척이라거나 하는 설정도 재밌을 것 같고.... 라지만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