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책장에 꽂는데 갑자기 종이가 한 장 팔랑 떨어져 내렸다. 황급히 주워 보니 마법사 협회에서 보낸 의뢰서다. 순간 이게 왜 이런 데 있나 의아해했지만 곧 도코가 보관할 데를 찾지 못해 아무 곳에나 끼워 넣었을 거라고 텐마는 이해했다. 의외로 덜렁거리는 성격이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무심코 내용을 읽던 텐마는 곧 하단에 찍힌 문장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선이 여러 개 복잡하게 얽힌, 검푸른 색 잉크로 찍힌 이 문장은 분명 낮에 갔던 피자 가게에서 봤던 것이다. 이게 여기 찍혀있다는 것은 마법사 협회의 엠블럼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그 가게도 마법사들과 연관이 있는 곳일까. 그냥 평범한 가게 같았는데.
잠시 고민하던 텐마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포기했다. 이제 와서 그걸 알아서 어쩌겠단 말인지.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인걸.”
말끝에 남은 거스러미를 모른 척한 채, 텐마는 종이를 다시 책 속에 끼워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질감이 기묘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기실, 요정과 마법사는 텐마의 현실이 아니었다. 물론 동거인이 동거인인 만큼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고 있었지만 그게 다다.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느끼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도코도, 그의 친우인 시온도 텐마의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18세의 소년이었다. 그들은 요정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텐마가 요정과 인연을 맺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텐마는 지난 세월 동안은, 적어도 기억을 잃고 난 후의 시간은 일반인으로서 살아왔다. 헌데 그런 삶에 또 다른 마법사가 끼어든 것이다.
텐마는 시지포스와 레굴루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처음, 그것도 잠깐 만난 사이인데 또렷이도 얼굴이 떠올랐다. 개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한숨이 나왔다.
첫 만남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상대가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별로 그들이 싫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기회만 있으면 제법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특히 레굴루스는 자기 또래로 보였으니까 더욱더. 하지만─
그들은 마법사다. 그 사실이 싫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도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온이 마법사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온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은 마법사의 세계에 관심이 없어 굳이 뛰어들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텐마는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짐을 정리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 질 녘이 되어있었다. 오렌지색 노을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새하얀 벽지를 물들였다. 커튼 때문인지 창틀 때문인지 천장에는 기묘한 모양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멍하니 시선으로 그림자를 따라 그리던 텐마는 곧 눈을 감아버렸다. 눈꺼풀 안쪽에서 갖가지 빛이 점멸한다. 요정의 날개에는 반짝이는 가루가 묻어 있다는 동화가 생각났다. 어쩌면 자신은 그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느닷없이 낯선 마법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불안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말로는 할 수 없지만 지독히도 익숙해서 오히려 알기 어려운 것. 예감이라 불러야 하는 것.
그 순간 텐마는 자신이 그들을 꺼리는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들은, 시지포스와 레굴루스는 자신이 여태껏 무시하던 세계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것은 너와 연관 없는 얘기가 아니라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화면 너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너 또한 이 세계의 주민이라고. 이제껏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눈을 돌리고 있던 사실들을 실로 잔인하게.
이 감정은 반발이고 또한 예고다. 본능이 경고한다. 저쪽 세계로 넘어가지 마, 심연으로 들어가지 마. 그들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왜?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이 요정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게 없을 텐데.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수마가 덮쳐왔다.
눈을 떴을 때, 텐마는 어둠 속에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깜깜해서 그런가 싶어 손을 뻗어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등 뒤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분명 자신은 거실 소파 위에 누워있었을 텐데 도대체 여긴 어디일까. 고함을 질렀지만 내지른 목소리마저도 바람 새는 것처럼 희미하게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텐마는 불현듯 직감처럼 깨달았다. 전부 이 어둠 때문이다. 단순히 빛이 없는 것과는 다른, 밤의 부드러운 암흑과는 다른 어둠. 이것은 형체가 있고 질량이 있다. 분명하게 실존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전부 삼켜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제외하고─
“……웃기지 마!”
텐마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의도치 않아도 분노가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젠장! 여긴 도대체 어디야!”
아무리 생각해도 알지 못하는 곳이다. 아니, 정말로 현실이긴 한 걸까. 지나치게 리얼한 게 걸리긴 하지만 어쩌면 전부 꿈일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정말 기분 나빴어, 하고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꿈. 그래, 갑자기 어딘가 끌려왔다는 것보단 그쪽이 앞뒤가 맞다. 분명 눈을 뜨면 자신은 거실 소파 위고 바닥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텐마는 어떻게든 꿈에서 깨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텐마는 꿈에서 깰 수 있는 방법 따윈 알지 못했다. 보통 꿈이란 걸 알게 되면 깨지 않나? 아니면 이게 정말로 현실이기라도 한다는 거냐고.
“아우…. 어떻게 해야 깨는 거야…….”
텐마는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은 방법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자신은 계속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건 정말 싫다.
그 때, 갑자기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텐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자신만이 아니라 뭔가가 더 있는 걸까.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단지 진동이었던 것이 점점 실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졌다. 가까이서 들은 적이 없어 낯설면서도 잘 알고 있는 소리로. 텐마는 소리가 바짝 가까워졌을 때야 그것이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챘다.
“……말, 발굽 소리?”
중얼거린 순간 거대한 말이 부딪히듯 뛰어들었다.
“우왓!”
왜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커다란 말이었다. 칙칙한 회색 말이었으니 어둠에 묻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몸을 굴려 간신히 충돌하는 걸 면한 텐마는 느닷없이 나타난 말을 바라보았다. 바로 딱, 하고 시선이 맞았다. 유일하게 붉은 말의 눈동자가 빛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패닉으로 머리가 굳는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벌어지지 않는다.
한동안 대치상태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치도 잠시였다.
작게 투레질을 한 말이 다시금 달려든다. 텐마는 비명을 내지르며 피하려고 했다. 허나 모든 건 시도에 그쳤을 뿐이다.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도 바람 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시간이 동결되어버린 것 같은 기이한 감각.
시야에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몸체가 제 위로 드리운다. 말발굽이 저를 짓밟는다. 그리 여긴 순간, 발아래가 쑥 꺼졌다.
“텐마!!!”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힘입어 텐마는 간신히 눈을 떴다. 어두운 데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눈 위로 아른대는 빛이 눈 부시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면 간신히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까이서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코?”
조그맣게 입을 열자 도코가 안도한 것처럼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텐마는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도코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오늘 안으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난 걸까 그도 아니면 벌써 하루가 지나버린 걸까. 멍한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코는 도코대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괜찮은가?”
낯선 목소리에 텐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어째서인지 시지포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복잡한 눈길을 보냈지만 역시 답은 없다. 시지포스가 자신의 몸을 살피곤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이상은 없는 것 같군. 다행이다. 너무 깊게 끌려들어 가버린 게 아닌가 걱정했어.”
“……? …뭐가?”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쉰 목소리로 반문하자 시지포스와 도코가 애매한 얼굴을 하고 서로 마주 봤다. 잠깐의 침묵 끝에 설명을 시작한 건 시지포스였다.
“사실은 너와 헤어지고 난 후에 이상한 기척을 느껴서…….”
그것뿐이라면 특별히 신경 쓸 이유는 없으나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거기에 그 일이 텐마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단순히 기우라면 좋겠으나 어쩐지 그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수고를 들이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하고 뒤늦게 쫓아왔지만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반응은 없지, 덕분에 초조해져서 차라리 무단침입을 할까 생각하던 찰나에 도코가 되돌아와 사정을 설명하고 같이 들어와 악몽에 시달리던 텐마를 겨우 깨웠다는 게 시지포스의 설명이었다.
“악몽(나이트메어)?”
“그래.”
얘기 중 익숙지 않은 단어가 나와 무심코 혼잣말을 하자 시지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방금까지 꾸고 있던 악몽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꿈에 문자 그대로 말이 나왔었다.
뭐야, 역시 꿈이었구나, 하고 텐마는 안심했다. 그게 전부 꿈이라면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갑자기 시지포스가 엄격하게 꾸짖었다.
“단순히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마. 심각한 경우에는 영혼까지 끌려가서 영영 악몽에서 못 벗어나는 수가 있으니까.”
“켁.”
어째 반쯤은 협박이다. 텐마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뭐 그딴 게 다 있어. 곰곰이 따지면 참 끔찍한 얘기다. 다시는 그딴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텐마는 생각했다. 시온에게 부탁해서 부적이라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할까.
“그런데 왜 텐마를 노렸는지 모르겠군. 텐마가 특별히 요정의 눈에 들 만한 녀석이 아닐 터인데.”
문득 도코가 중얼거렸다. 텐마는 전적으로 그에 동의했다.
시지포스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 건 텐마와 헤어진 직후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나이트메어가 피자가게에서부터 텐마를 따라왔다는 소리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정들이 장난, 혹은 더 심각한 짓을 하는 데 대상을 가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요정들은 대개 그때그때 눈앞에 있는 대상을 노리지 굳이 한 사람을 목표로 정해서 따라다니는 짓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또 모르지만 텐마는 마법사조차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시지포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 보니까 알겠군. 뭐가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인이 깨진 거겠지.”
“봉인?”
느닷없는 소리였지만 상대에겐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시지포스가 자세를 바로 한다. 텐마도 그를 따라 무심코 앉음새를 똑바르게 고쳤다.
“텐마. 너는 기억이 없다고 했지. 이건 추측이지만 아마 그 영향으로 너 자신의 힘까지 봉인되었을 거다. 그리고 지금 그 봉인이 깨져 힘이 드러나고 있어. 실제로 현재의 너는 요정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보석처럼 보이겠지. 나이트메어가 너를 꿈속에 빠트린 것도 그런 이유다. 그 녀석들은 그런 방법밖에 모르니까.”
텐마는 반쯤 타성으로 생각했다. 왜 이 인간이 말하는 건 폭탄선언밖에 없을까. 지금도 그렇고 낮에도 그렇고 저런 말을 참 태연히 한다 싶다. 듣는 이쪽은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도코도 비슷한 심정인지 참 괴상한 표정이었다.
결국 뇌가 처리할 수 있는 허용량을 전부 넘어버린 텐마는 그대로 소파에 축 늘어졌다. 더는 뭔가 생각하는 것도 싫다. 그러나 그런 텐마의 속도 모르고 이번만은 눈치가 없던 시지포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텐마. 내 제자가 되지 않을래?”
“………네?”
텐마(15세)의 장래가 결정되어버린 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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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포스님이 나와 계약해서 마법사가 되지 않을래?를 시전했습니다. 물론 뻥. 계약은 데프랑 해야죠<<
어쨌든 이걸로 에피 1도 끝.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어떻게든 다 썼네요. 다음 에피는 뭐로 해야하나....